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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참관기(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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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15-09-22 17:21 조회727회 201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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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참관기(강화도)

버드내 도서관 길위의 인문학참관기(강화도)

 

버드내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역사와 함께한 성곽 마주하기프로그램 중 두 번째 시간엔 강화도 현장 수업이다. 6월에 진행하기로 했으나 메르스로 인하여 연기되어 72일에 진행되었다.

세류동에 위치한 버드내도서관은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하여 동네사람들에게 사랑방 같은 느낌이 든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드디어 8시 강화도로 출발한 차량은 약 두 시간 정도 지나니 강화도 정족산성 동문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먼저 화장실에 들렀다. 여기서도 화장실문제점에 대한 열띤 이야기가 나온다. 여자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보다 3배정도는 많이 설치되어야 된다고 한다. 여자 참가자가 많고 화장실의 줄이 길어지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동문 매표소까지 자유롭게 오라고 했다. 매표소까지는 약간 경사가 있어 숨이 차다.

정족산성은 산봉우리 세 개가 다리 셋 달린 옛날 솥과 닮았다하여 정족산이라 부르고 그 곳에 쌓은 성이 정족산성이다. 또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이라고도 한다.

우리들의 탐방은 동문에서 시작된다. 동문은 윗부분만 전돌 3단으로 둘러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만들었고 문루가 없이 암문처럼 작은 문이다. 동문으로 들어서니 오른편에 비각이 하나있다. 그곳은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막아낸 양헌수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제 정족산성 정상을 향해 달맞이 고개로 이동하였다. 조금은 가파른 길이라 힘겨워하신다. "남한산성은 평지에 가까운데 여긴 너무 경사가 심하다라며 옆에 가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니, 저분들은 남한산성 어디를 가셨는데 여기보다 평지라고 하는 걸까?’ 물론 평지도 있기는 하지만 여기보다 남한산성은 크고 더 가파른 곳이 많다. 정비가 아주 잘 되어 있어 그늘 하나 없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드디어 달맞이 고개 정상이다. 그곳은 치성이어서 성벽이 약간 밖으로 나와 있다. 뒤늦게 오시는 분들까지 다 오를 무렵 한차례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준다. 산위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정말 시원하다. 갑자기 노랫소리가 흐른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혼자서 조용히 부르던 노래가 어느새 합장이 되어 모두들 힘들지만 기운 나는 노래와 달달한 바람이었다.

다시 달맞이 고개에서 북문으로 향했다. 북문은 온수리 방면으로 통하는 길이 나있다. 북문은 동문보다 더 작다. 드디어 정족산의 정상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강화도 들판은 네모 반듯반듯하다. 정상에서 맛보는 시원함을 뒤로하고 이제 다시 서문 쪽으로 향했다. 서문에서 성벽을 따라 가면 남문이 나오지만 우린 정족산사고쪽으로 해서 성 안쪽으로 들어왔다.

정족산사고에서 설명을 들으려 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웅성한다. ‘뭐지??’

~오십센치도 넘는 커다란 초록뱀이 그 자리에 있다. 난 일초도 안 봤는데 그 모습이 머릿속에 박혀 하루 종일 발밑만 보고 다녔다.

다시 사고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조선은 기록이 철저했던 나라이다. 사관이 있어 임금의 모든 행동과 신하들과 주고받은 이야기 등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사관이 기록한 내용을 추려서 만든 것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실록 등 나라의 중요한 기록물을 보관하던 건물을 사고라 한다. 조선 초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성주, 전주에 4대 사고를 설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고 전주사고만 남았다. 전주사고 실록을 5개의 복사본으로 만들어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오대산, 태백산, 마니산, 묘향산에 보관하였다. 1660년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그 성안에 사고가 만들어졌다. 사고에 보관된 책들은 정기적으로 3년마다 1번씩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햇볕을 쬐게 해 주는 포쇄도 볼만한 장관이었을 것 이다. 정족산성 깊숙이 자리한 정족산사고는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친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전등사 쪽으로 이동하며 빨간 보리수 열매도 하나씩 따 먹어보았다. 잠시 삼성각 앞에 멈췄다.

우리나라 산신령은 무엇을 타고 다닐까요?”

라는 질문에 구름, , 나무 등 다양한 답이 나왔다. 답은 삼성각 안에 있습니다. 산신령 옆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세히 살펴보시고 아래로 오세요. 보고도 모르겠다고 하신다. 산신령 옆에 호랑이 있잖아요. 정답은 호랑이입니다.ㅎㅎ

전등사에는 보물이 3점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전등사 범종(보물 제 393)앞에서 설명을 들었다. 이 범종은 특이하게 우리나라 종이 아니고 중국 송나라에서 만든 것이다.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일본은 많은 총알과 포탄을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뒤지며 금속을 강제로 가져갔다. 약탈한 금속은 부평 병기창으로 옮겨졌는데 해방되자 불교 신자가 범종을 찾기 위해 인천 항구를 뒤지고 다니다가 부평 병기창에 큰 종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으나 본래의 종은 찾을 길 없어 대신 그곳에 있는 중국 종을 가져왔다고 한다. 종에는 1097년에 하남성의 백암산 숭명사에서 제작한 것이라 쓰여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우리나라 유일하게 중국 철제 종이 보물로 지정되어 철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 종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에 있는 나부상과 내부는 각자 자유롭게 살펴보라고 했다. 대웅보전 내부에는 세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부처님을 모신 수미단과 닫집의 조각이 아주 뛰어나다고 하니 꼭 자세히 살펴보라고 하신다.

드디어 오전시간이 다 지나고 점심시간이다. 남문으로 내려와 남문 주차장 옆에 있는 남문식당에서 산채정식을 먹었다. 배고픈 탓에 눈 깜짝 할 사이 밥그릇을 비웠다. 느긋하게 따뜻한 커피한잔을 타서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여유를 부려본다.

다시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다.

오두 돈대 옆 강화 전성을 보러 간다. 강화도는 해안도로를 따라 돈대, , 진 등 국방유적을 설치했다. 정족산성 남문에서 오두돈대로 오는 길 논길을 따라 오는데 신문에서 보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마음이 참 아프다. 가뭄이라고 뉴스에서 들었지만 직접 마른 논을 보니 심각하다. 논에 물댈 수로조차 바짝 말라있었다. 타들어가는 농민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오두 돈대는 자라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은 오두 돈대를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처음 쌓은 전성의 흔적을 보러 온 것이다. 전성은 벽돌로 쌓은 성벽이다. 지금 우리가 본 것은 대부분 붕괴되어 벽돌이 드문드문 보일뿐이다. 벽돌을 쌓아 만든 전축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에서 볼 수 있는 벽돌보다 더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마지막 코스인 광성보로 갔다. 광성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였다. 고려가 몽골군을 피해 강화로 도읍을 옮기며 쌓은 강화외성에 효종 때 광성보가 설치된 것이다.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돈대가 있다. 안해루 밖으로 나가 염하를 가까이에서 느끼며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와 어재연.어재순 두 형제 장군을 기리는 쌍충비각앞에 이르렀다.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각 건너에 신미양요 때 전사한 조선 군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인 신미순의총으로 내려가 전사한 분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손돌돈대로 가서 손돌 이야기를 듣고 용두돈대로 향했다. 용두돈대는 염하에 아주 가까이 있기에 겨울철에 오면 센 물살을 눈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출입제한 줄이 쳐 있다.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안해루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일정이 끝났다.

오늘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보물섬 강화도에서 많은 역사이야기와 문화유산을 눈으로 직접 보는 시간이었다. 문화유산에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움을 준 버드내도서관 담당자 김은희 사서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지면을 통해 전한다. 또한 더운 날씨에도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려고 열정적으로 안내해 주신 신영주(수원 지기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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