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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未堂) 시(詩)의 사찰로 드는 일주문/ 임영조 글]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첫 행을 읽는 순간, 뒤통수를 둔중한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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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未堂) 시(詩)의 사찰로 드는 일주문/ 임영조 글]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첫 행을 읽는 순간, 뒤통수를 둔중한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미당(未堂) ()의 사찰로 드는 일주문]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첫 행을 읽는 순간,

나는 그만 뒤통수를 둔중한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어안이 벙벙하고 가슴 저린 감동이었다.

 

문학사상사(2001.7.25. 초판),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④

[서정주, <자화상>임영조 미당(未堂) ()의 사찰로 드는 일주문’ 205쪽에서]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던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