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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미학/ 송수권 글]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웃게 되는 웃음은 얼마나 이지적이며 소중한 것인가.
2017.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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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미학/ 송수권 글]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웃게 되는 웃음은 얼마나 이지적이며 소중한 것인가.

[에로스의 미학]

 

이처럼 한 편의 시를 다 읽고 난 후에 떠오르는

웃음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코미디언 들이

순간순간 쏟아 내는 웃음이 아니다.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웃게 되는 웃음은 얼마나

이지적이며 소중한 것인가.

 

문학사상사(2001.7.25. 초판),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④

[네루다, <벌레>송수권 에로스의 미학’ 133쪽에서]

 

 

 

 

 

<벌레>

                           네루다

 

그대의 허리에서 그대의 발을 향해

나는 기나긴 여행을 하고 싶다.

 

나는 벌레보다 더 작은 존재

 

나는 이 언덕들을 지나간다.

이것들은 귀리빛깔을 띠고 있는.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는

가느다란 자국들을 갖고 있다.

몇 센티미터 정도의 불에 데인 자국들을,

창백한 모습들을.

 

여기 산이 하나 있다.

나는 거기서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

오오 얼마나 거대한 이끼인가!

그리고 분화구 하나와 촉촉이 젖어 있는

불의 장미 한 송이가 있다!

 

고대의 다리들을 따라 내려오면서

나선형을 그리며 생각에 잠기거나

혹은 여행하면서 잠을 자다가

마치 맑은 대륙의

단단한 꼭대기들에 이르듯이

둥그런 단단함을 지닌 그대의 무릎에 나는 도달한다.

 

그대의 발을 향하여 나는 미끄러진다

날카롭고 느릿하고.

반도(半島) 같은 그대 발가락들의

여덟 개 갈라진 틈새로.

그리고 그 발가락들에서

하얀 시트의 허공으로

나는 떨어진다. 눈 멀고

굶주린 채 그대의 타오르는 작은 그릇 모양의

윤곽을 찾아 헤매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