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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한겨레]취미와 휴식과 배움의 황금비율 /이병학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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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한겨레]취미와 휴식과 배움의 황금비율 /이병학

취미와 휴식과 배움의 황금비율


등대 기행 참가자들이 부산 가덕도에서 일제가 남긴 ‘사령부발상지’ 빗돌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인문학 테마여행 인기
삶의 여유 생긴 중·장년층 중심으로 테마 정해 휴식과 배움을 즐기는 자발적 ‘학습형 여행자’ 증가

“거의 매 주말 아내와 여행 갑니다. 유명 관광지는 잘 안 가요. 각 지역의 소소한 문화유산들을 찾는 데 재미를 붙였어요.”

 

지난달 부산 영도에서 만난 50대 부부 여행자의 말이다. 성황당·비석·바위글씨·절터 등 ‘소소한 옛날 것들’에 관심이 많다는 이 부부는, 여행 지역을 정한 뒤 자잘한 볼거리 위주로 자료를 검색해 미리 공부하고 떠난다고 했다. 꼼꼼히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두는 건 물론이다.

 

주5일 근무제 정착 뒤 주말여행이 일상화하면서, 이처럼 자신의 관심 분야에 집중해 공부하고 여행을 즐기는 개별 여행자들이 늘고 있다.

 

11월7일 경북 청도 녹명리 죽바위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길위의 인문학’ 영남대로 탐방행사 참가자들.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배우기 위해 길 떠나는 평생학습 여행자들

 

여행지를 ‘배움터’로. 늘어난 여가생활 기회와 평생학습 욕구가 맞물리면서, 나만의 특화된 테마여행을 공부하면서 즐기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주로 자녀를 어느 정도 키운 중년층이나, 취미와 여행을 깊이있는 배움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장년층 부부들이 이런 여행을 즐기는 부류다.

 

토종식물 여행, 전통시장 여행, 박물관 여행, 역사인물 탐방 등처럼 테마를 정해 휴식과 배움을 아울러 즐기려는 자발적 ‘학습형 여행자’들이다. 연구자나 일부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이뤄져온 역사기행·문화재답사·생태탐방 등의 테마여행이 이제 일상적인 주말여행 방식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얼마 전 딸을 결혼시킨 50대 정경수·최종희(서울 중계동)씨 부부는 요즘 “야생화나 식물 공부 하는 재미”로 다달이 여행을 떠난다. 최씨는 “평소 관심 있던 야생화 등 식물 공부와 사진찍기에 취미를 붙였다”며 “남편과 산자락·들판을 헤집고 다니며 다양한 식물들을 만나는 재미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꽃과 식물들을 디카로도 찍고 폰카로도 찍은 뒤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해 이름을 확인하고 자신만의 ‘식물 도감’을 만들어간다고 했다.

 

교사인 이호열(54·배문중)씨는 몇년 전부터 전국 도시의 뒷골목 여행에 빠져 있다. “도시의 옛 골목들에 남아 있는 1960~70년대 풍경과 가끔씩 마주치는 근대문화유산들의 매력” 때문이다. 이씨는 “언젠가는 사라져갈 도심 골목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혼자서도 가고 아내와 같이 가기도 한다”며 “출발 전에 그 지역 출신 인물이나 역사·문화를 배워가는 재미도 남다르다”고 말했다.

 

용인대 문화관광과 오순환 교수는 “우리 여행문화도 이미 먹고 놀다 오는 소비적 여행에서, 각자 관심거리를 찾아 체험하고 배우는 여행으로 바뀌고 있다”며 “여가시간과 소득 증대로 평생학습 욕구를 여행 속에서 충족시키려는 추세는 갈수록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렇게 주말여행을 배움의 기회로 삼으려는 ‘적극적 여행자’들이 늘면서, 학습을 주제로 삼아 떠나는 테마여행이나 역사·문학·철학 강좌 등을 여행과 결합시킨 인문학 테마여행도 쏟아져나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토종식물, 전통시장, 박물관, 
도심 뒷골목, 역사인물 탐방 등 
스스로 테마 정해 집중 체험 
역사·문학·철학과 여행 결합한 
인문학 테마기행도 쏟아져

 

강의 들으며 열차여행·도서관탐방·등대기행

 

지난 9월 말부터 11월8일까지 매주 토요일 경춘선 임시열차에서 진행된 ‘춘천 가는 인문학 열차’는 열차 안 인문학 강의라는 색다른 테마여행으로 눈길을 끌었다. ‘케이티앤지(KT&G) 상상마당 춘천’과 코레일이 마련한 행사다. 여행 목적지인 김유정문학촌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동양철학자·문학평론가 등 각 분야 명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고 사색에 잠기는 이동 강의실로 관심을 모았다.

 

10월25일 ‘춘천 가는 인문학 열차’에서 동양철학자 김시천씨가 ‘노자·공자와 함께 번잡한 도시를 떠나다’란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사진 ‘상상마당 춘천’ 제공
상상마당 춘천 쪽은 내년 3월부터 코레일과 함께, 각 분야 전문연구자들을 초청해 열차 내 인문학 강의를 들은 뒤 도착지인 상상마당에서 강의를 이어가는 인문학 강의실 열차를 월 1회씩 정기적으로 운행할 계획이다. 각 기관·단체들의 특성에 맞춰 강사를 섭외해주고 특정 주제의 강의를 진행하는 ‘맞춤형 인문학 열차’ 운행도 추진하고 있다.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은 지난 10월부터 이달까지 ‘해양문화·등대 기행’을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인류 해양문화의 상징물 중 하나인 등대에 담겨 있는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며 주변 포구와 섬들의 해양문화 유적들을 탐방하는 여행이다. 해양학자·역사학자 등의 강의가 곁들여지는 건 물론이다. 연구원 쪽은 제주 마라도 등대기행, 부산 영도·가덕도 등대기행을 진행한 데 이어 오는 11월29일엔 제주 우도 등대기행을 벌인다. 제주시에서 출발하는 당일 기행으로, 국내 해양전문가와 일본·중국 등 아시아지역 해양학자 10여명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

 

연구원 쪽은 내년 상반기부터는 일본과 동남아 지역의 해양문화를 탐방하는 ‘아시아 해양문화 기행’도 마련해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 10월부터 11월 초까지 길과 도서관, 인문학을 연계해 삼남대로·영남대로 옛길을 탐방하며 각 지역의 도서관에서 인문학 토크쇼를 펼쳤던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문화체육관광부 주최)은 내년에도 지역 도서관과 인문학 강의, 옛길 탐방을 묶은 기행을 이어갈 예정이다.

 

김태희 ‘길위의 인문학’ 사업본부장. 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김태희 ‘길위의 인문학’ 사업본부장 “지역주민들의 관심이 가장 반가웠죠”

 

“올해 처음 시작한 행사치고는 나름대로 큰 성과를 거둔 셈입니다.”

 

지난 9일 부산 동래 일정을 마지막으로, 지역 도서관들을 거점 삼아 우리나라 옛 대로인 삼남대로와 영남대로를 탐방하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행사를 마친 김태희(사진) 한국도서관협회 사업본부장의 말이다. 그는 두 옛길 탐방을 통해 “길과 도서관, 인문학의 연결고리를 마련했고, 이를 유기적으로 엮어 발전시킬 얼개를 짜게 됐다”고 말했다.

 

“각 지역 도서관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역 주민들의 높은 관심이 예상 밖이었어요. 영남대로의 경우 밀양 구간에서만 대학생들을 포함해 40여명의 지역민이 탐방에 따라나서 성황을 이뤘죠.” 모두 6개의 지역 도서관이 도서관 이용 주민들의 참가신청을 받아 행사에 참여했다.

 

‘도서관에서 길을 묻고, 길에서 인문을 만나다’란 주제 아래, 각 도서관에서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인문학 토크쇼도 옛길 탐방 참가자와 지역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김 본부장은 “토크쇼에 나선 교수·연구원들의 옛길과 길에 얽힌 이야기들에 참가자들이 자리를 뜰 줄 모르고 빠져들곤 했다”고 말했다.

 

탐방에 나선 일행을 안타깝게 했던 건 두 대로상에 옛 모습을 간직한 구간이 매우 적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러나 참가자들이 살아남은 일부 구간이나마 걸으면서 옛길의 가치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소득”이라고 했다.

 

내년부터는 미진한 점을 보완해 “지적 만족과 감동을 동시에 줄 수 있는 다양한 ‘인문학 여행길’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도서관 참여도 늘리고, 교수·학자들 외에 지역 역사·문화를 꿰고 있는 토박이 향토사학자들을 참여시켜 문화 소통의 기회도 넓힐 계획이다.

 

“‘길 위의 인문학’ 사업은 여행자와 지역 주민, 전문가들이 소통하면서 지역 문화를 한 차원 끌어올려, 궁극적으로 국민 정신문화 진흥과 문화융성에 기여하는 계기로 작용할 거라고 봅니다.”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