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사례집
공지
[인문칼럼] 인문학과 여가 /우응순
2014.01.10
1,510

본문

[인문칼럼] 인문학과 여가 /우응순

인문학과 여가

우 응 순(기획위원)

 

숨 가쁘게 진행된 2013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이 마무리 되었다. 121개의 도서관에서 강의?탐방으로 연계된 360개 이상의 프로그램이 진행된 것이다. 대중매체와 참여자들의 반응을 보면 2013 ‘길 위의 인문학’은 대성공 이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사회에 차고 넘치는 수많은 인문학 강좌들 중에서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이 거둔 성공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인문학’에 대한 폭발적 관심과 참여 열풍은 2000년대 들어 지속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주요 징후이다. 관, 민 중 누가 주관하든지, 도서관, 박물관, 어느 곳에서 하든지 일단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이 열리면 남녀노소 시민이 움직이고 있다. 왜일까? 배움에 대한 열망이 유난히 강렬한 민족이라서? 더 잘살기 위해서는 성공한 사람들의 지혜가 필요해서? 불안정한 현실에 부딪히면서 따뜻한 위로가 절실해서? 아니면 유행이라서 그냥?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단순한 일시적인 호기심일수도 삶의 절실한 요구에서 나온 지속적인 내적 움직일 수도 있다. 사회학자들의 분석은 사후적이다. 현장의 도서관 기획자들은 사회적 징후에 대응하는 예민한 촉수를 지녀야 한다. 징후에 동시적 순발력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대학의 인문학 전공자들이 인문학에 대한 이런저런 정의를 내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지는 인문학의 의미와 방향을 논하는 자리에 가면 결론은 예정되어 있다. 황폐화된 대학 인문학의 암울한 현실, 더 어두운 미래에 대한 탄식과 직면하게 된다. 대학 안에서는 춥고 배고픈데, 대학 밖에서는 뜨겁다니! 이러한 온도차가 생긴 멀고 가까운 이유를 이 자리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기획하고 진행되는 도서관 인문학은 대학 인문학과는 접근시각 자체가 달라야 할 것이다. 대학 인문학은 교수에게는 전공이고 학생에게는 학습이고 평생 따라다니는 학점이다. 도서관 시민 인문학은 교양이고 여가이고 만남이다.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에서 교육, 계몽을 구상하면 도서관 프로그램은 실패한다. 재론의 여지없이 평생교육의 시대이긴 하지만 접근방법은 학습 - 유용, 계몽 ? 변화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 시대의 남녀노소는 충분히 교육받았고, 받고 있으며 계몽되었다. 오랫동안 습관처럼 다닌 학교에서, 하루 평균 2시간 이상은 보는 tv를 통해서. 그 뿐인가! 손에 들고 있는 지식은 인류가 전 역사 과정을 통해 축적한 지식의 총량, 백과사전 그 이상이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된다.


교육, 학습의 방향이 아니라면 시민 인문학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여기서 인간의 삶을 좋게 훌륭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기본재에 대해 생각해보자. 최고가 되기 위해,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하는 공부, 탈진하여 쓰러질 때까지 경쟁해야만 쌓을 수 있는 전문 지식, 스펙 등등. 삶에 대한 약간의 성찰만 있더라도 이런 것들은 수단은 될지언정 각자의 삶을 좋게, 훌륭하게 하는 기본재가 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한번 태어난 세상,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면서 만족스러울 수는 없겠지만 그런대로 좋은 삶을 구성하려 할 때, 기본적인 요소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3부작 케인즈 전기로 유명한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how much is enough?)>> 라고 물으면서 인간의 삶에 보편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기본재(basic goods)로 7가지를 거론한다. 건강, 안전, 상호존중, 여가,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이다. 동의 여부를 떠나서 7가지 항목 중에서 하나라도 빠진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거나, 외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내면이 황폐해지고 불행해질 것은 분명하다.


인문학의 효용으로 지혜와 성찰이 논해지는 분위기에서 여가의 인문학을 내세우는 것은 가볍게 여겨질 것이다. 여가는 놀이, 유흥을 연상시키며 게으름, 시간의 낭비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의 잠을 자지 않고 휴식 없이 일한 결과, 거대한 부를 이룬 경제영웅의 신화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잠을 줄여 가며 공부해도 누구나 명문대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문대를 나온다 한들 부귀영화가 보장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최고로 올라가는 사다리는 너무도 좁고, 꼭대기까지 간다한들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 그렇게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을.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여가만큼 절실하고 귀중한 것이 있을까? 여가는 이완된 심리 상태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에 몰입하는 적극적인 활동이다. 피로, 탈진사회에서 개인은 기계 부품으로 닳아가지면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무기력한 탈진상태로는 자신을 사랑, 존중할 수 없다. 가족, 친구사이에서 친밀감, 우정을 형성하고 키워나갈 수도 없다. 좋은 삶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쉬게 하고, 가족, 친구, 동료를 배려하는 삶의 여유, 여가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도서관 인문학은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학습, 계몽이 아니라 시민에게 여가의 기쁨을 제공해야 한다. 그냥 좋을 것 같아서 혼자 참가했는데, 너무 좋았다! 다음에는 아내, 딸과 친구들과 같이 오고 싶다. 이런 반응이 최고 수준의 성과이다. 무게 있는 인문학 저서를 접하고 싶다, 동서양 고전을 완독하고 싶다 등등의 요구가 나온다면 다음 단계의 프로그램을 준비하면 된다.


왜 매주 북한산, 관악산 입구가 북적되는가, 왜 인사동, 삼청동을 약속 장소로 정하는가? 건강을 위해 올라가야 할 산이 있어서, 볼 만한 작은 상점들, 맛 집이 줄지어 있어서 ... 더 근원적인 이유를 생각해보면, 인간은 서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상호 존중하는 데서 나오는 기쁨을 삶의 에너지로 삼아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에너지원이 고갈된 후에는? 힐링의 제왕이 강림하셔도 마른 샘을 적실 수 없다.


2014에도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이 진행될 것이다. 대성공을 예감한다.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탐방을 통해서 발견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차고 넘치는 그 어떤 인문학보다도 좋은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