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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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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17-03-02 10:21 조회1,050회 201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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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구술:아들 딸이 받아 쓴 우리의 이야기 - 6

Ⅲ. 구술 : 아들 딸이 쓴 우리의 이야기 



두 번
가장이 된 나

이인호 | 목포공공도서관_전남

 

 

나도 꿈이 내 전문 분야를 가르치는 강사였지만 이루기 힘들었던 나 대신 동
생이 이뤄줘서 기쁘고 한편으론 부러웠다. 나의 하나뿐인 남동생 해운이는 축
구를 잘해서 나처럼 학교에서 선수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생이었
을 때라, 부모님은 어린나이에 기숙 생활하는 것이 힘들다며 반대하셨다. 해운
이는 올림픽 축구경기를 보며 장난식으로 “아, 내가 저기에 서 있을 수도 있었
는데”라고 말하곤 한다. 그 때마다 가족들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함께 추
억 속에 잠긴다.
그 무렵 해운이와 놀다가 큰 일 날뻔한 적이 있다. 해운이가 갑자기 내 등에
올라타는 바람에 나는 앞으로 쓰러져 얼굴을 바닥에 ‘쿵’하고 박았다. 바닥에는
이빨이 떨어져 있었고 그건 바로 내 이빨이었다. 너무 놀랐고, 당황스러웠다. 이
빨이 부러진 이 큰 일을 어머니한테 숨길 수도 없어서 나와 해운이는 어머니한
테 심하게 혼났다.
우리 집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부모님은 시골 장에 다니며 옷가지 장사
를 하셨다. 짐이 많기 때문에 자전거에 싣고 다니셨다. 가까운 장에 가실 때면
나도 같이 가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일부 짐을 들어주기도 했고 짐을 풀거나 정
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같이 아버지와 다니는 게 좋았고 장에서 붕어빵, 호떡을
사주실 때 맛있었다. 부모님께서 그렇게 장사를 열심히 했지만 우리 집 형편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안 형편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
등학생 때 꿈은 연구기술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능 올림픽대회 준비를 위
해 2년 동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실습했다. 그러던 도중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
아가셨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우리가족은 꽤 오래 힘든 시간을 지냈
다. 아버지의 부재는 경제적으로나 마음으로나 아주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장남
인 나한테는 집안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생겼다. 나는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도와 집안을 책임지게 된 가장으로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공장에 취직했다. 공고생들은 3학년 2학기가 되면 실
습 겸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고향에서 떨어진 서울에서 1시간 30분을 걸려 출퇴
근 하며 한 달 19만원을 벌었다. 열심히 일하여 받은 첫 월급 19만원을 가지고 동
대문 시장에 갔다. 동대문 시장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가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는 시장구경을 한참 하다가 어머니께 드릴 빨간 내복과 동생들에게 줄 조그마
한 선물을 샀다. 나한테 19만원은 큰돈이었지만 동대문 시장에서 내가 사고 싶은
걸 다 살 수 있을 만큼 거액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번 돈으로 가족들
의 선물을 살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뿌듯하고 기뻤다. 어른이
된 것 같고, 진짜 가장이 된 것 같았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고향 가까이 와서 목포역 근처의 공장에 취직
했다. 모든 일을 열심히 배우며 일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기계 부품 제작 중 마
무리하기 위해 사포로 작업하고 있었다. 회전하는 작업 시에는 장갑을 끼고 하면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잠깐 무시하고 방심했던가. 사포와 장갑이 기계
속으로 끌려 들어가 손가락을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급하게 봉합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이동해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때 의사와 주고받은 말이 기억난
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손가락 절단은 하지 말아 주세요”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다. 그 사고로 일을 쉬어야 했다. 쉬고 있으려니 고등학생 때 어쩔 수 없이 포
기 해야만 했던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의논했다.
그 무렵 어머니도 저희를 책임지시느라 몹시 힘드셨는데 내게 공부하라고 말
씀해 주셨다. 뒷바라지 해주시겠다면서. 열심히 공부했던 덕분에 공과대학에 입
학할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강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건에 맞지
않아 그나마 자신 있는 기계부문의 공장 자동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신일 선풍기’ 공장에 취업했다. 사람이 힘든 일을 기계가 할 수 있도록 하
거나 쉽게 할 수 있도록 기계를 개발하는 일이 아주 재밌었다.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이 그리웠다.
고민 끝에 고향으로 내려와 현대삼호중공업에 취직하였다. 회사에서는 선박의
외장설계를 담당했다. 설계 작업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내가 접해
본 여러 분야의 직업과 경험이 도움이 됐다. 그 동안 해온 여러 작업들이 공간 감
각을 발달시켜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설계를 할 수 있었다.
그 실력을 바탕으로 20년간 일을 하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내 아내를 만났
다. 아내는 입사 동기의 여자 친구의 친구였다. 입사 동기 간의 모임이 자주 있
어서 가끔 아내를 볼 수 있었는데 참 좋아 보였다. 그 때 아내는 한국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계속 맘에 두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친구한테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길지 않은 연애 기간을 거친 뒤
12월 27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도중 너무 긴장한 탓에 신부를 데리러 내려
가야 하는데 멍하니 보고 만 있었다. 주례사가 “얼른 신부 데리러 가지 뭐하고
있습니까?” 라는 말에 예식장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요란한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신부를 맞이하였고 무난히 하루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행복한 날이
시작 되었다.
내게 첫 번째 아기 시원이가 찾아왔다. 첫째 딸 시원이가 태어 난 그 순간 너무
나 기뻤고 나는 아빠로서 또 한 번의 가장이 되었다. 기쁨도 있었지만 그만큼 부
담감도 생겼다. 책임감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 조그만 생명을 온전하게 보
호하고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 그로부터 2년 뒤 내 생에 두 번째 아기 인호가 찾
아왔다. 인호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1남1녀의 소중한 두 자녀를 갖게 되었
고 “내 아이들은 나처럼 힘들게 살지 않도록 옆에서 잘 지켜야 되겠다”고 다시 다
짐했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나는 모습과 같이 여행가서 찍은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모으기 시작하며 행복한 나날이 계속 되었다.
회사일로 이탈리아에 있는 제작공장 견학 방문을 하게 되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담당자인데 안 가면 어떻게 하냐고 해서 무
거운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처음 가보는 공항, 처음 타보는 비행기, 모든 것들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파리를 거쳐 16시간 만에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공항
에 도착했는데 화물로 보냈던 짐이 도착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동
료의 짐만 찾을 수 있었다. 영어도 못하는데 화물 분실 신고를 해야 했다. 평소에
영어를 좀 할 걸 늦은 후회를 했다. 어찌 어찌 분실 신고를 하고 공항밖에 나와
보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 시내로 가는 교통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이
용하기로 했다. 기사에게 얼마냐고 물어보니 19달러라고 했다. 탑승 후 한참을
달려 로마 시내에 있는 미리 예약한 호텔 앞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에게 19달러
를 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19달러가 아니라 90달러라는 것이었다. 호텔 매니
저에게 90달러가 맞냐고 했더니 90달러가 맞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사기를
당했던 것 같다. 영어를 잘못해서 당한 사기였던 것이다.
다음날 로마 시내와 바티칸을 구경 후 3시간 떨어진 공장으로 기차를 타고 이
동하였다. 한국과 별 차이 없는 정겨운 시골 풍경이었다. 지역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피사의 사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백야 현상으로 인해 밤 10시가 넘
었는데 밖이 훤했다. 그래서 잠들기가 어려웠다. 공장 방문이 끝나고 다시 로마
숙소에 도착해 보니 분실되었던 짐이 도착해 있었다. 어찌 이리 반가울 수가! 짐
을 풀고 가방에 있던 소주를 꺼내 동료와 한잔하고 나자 잠이 저절로 왔다. 이튿
날부터 남은 관광을 하기로 했다. 관광 후 식사를 마치고 시내를 걷던 중 집시에
게 동료 신용카드를 도난당했다.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해하는 우리를 보고 한
국 유학생이 경찰서에 신고해 주었다. 어렵게 카드사에 분실 신고를 했지만 집
시들이 이미 카드를 사용한 후였다. 너무 황당한 일이라 당황해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쓴 이인호는…………
나는 1년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1년 전만 해도 이 글을 쓰고 있
으리라곤 상상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게임을 시작하여
중학교 3학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게임과 TV가 없으면 입에 가시가 돋
을 것 같았던 나는 PC방을 밥 먹듯이 갔다.
책을 펴고 공부하기가 너무 싫어서 마이스터 고등학교를 가려고 부모님께 울며
떼를 써 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
다. 이렇게 철이 없던 내가 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항해사라는 직업을 꿈꿨기 때
문이다. 항해사라는 직업의 매력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물론 앞으로 꿈이 여러
번 바뀔 수도 있지만 나의 소중한 첫 꿈이 나를 바꿔 놓았다.
내가 이렇게 갑작스레 바뀐 후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고등학교 이야기를 하
다보면 내가 하는 말을 전혀 믿지 못한다. 또 고등학교에서 중학교 이야기를 하
면 반 친구들이 믿지 못한다. 참 어이없고도 웃음이 난다. 그 만큼 많이 바뀌었
고 달라졌다는 얘기로 들리기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나는 한 곳에만 집중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특징이 있다. 게임에도 모든 것을 쏟
아부었듯이 공부에도 쏟아부었다. 이 특징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
지만 앞으로는 장점으로 바꿀 것이다. 앞으로의 2년 반 동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친구들은 성적이 낮다고 한다. 하지만 “이
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늘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매순간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이 글을 20년이나 30년 후에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참 궁금하다.
앞으로는 또 내가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고, 미래의 내 직업도 궁금하다. 요즘은
내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 이 글은 이인호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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