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교육문화관] 제2차, 햇볕에 바래고 달빛에 물들다 by 심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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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15-07-16 13:10 조회876회 2015.07.16본문
제2차 ‘길 위의 인문학’, 햇볕에 바래고, 달빛에 물들다
내 고향 ‘삼척’ / 심미영
지난 7월 4일 ‘햇볕에 바래고, 달빛에 물들다’라는 주제로 제2차 ‘길 위의 인문학’ 탐방이 있었다. 이번 탐방 지역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삼척’이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어릴 적 내 기억 속의 삼척은 '울진, 삼척무장공비사건'이 전부였다. 그다지 멋있게 보이지도 않았던 ‘죽서루’와 들어본 듯도 한 '육향산', 내 눈앞에 늘 있던 '코끼리산', 그것이 내가 기억하고 있던 삼척이었다. 그런 탓이었을까 예전엔 이유도 없이 삼척이 싫었다. 그런 기억의 연장선에서 함께 가는 친구가 있으니 나들이 간다는 생각으로 탐방에 임하였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미로면 활기리의 ‘준경묘(濬慶墓)’,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 장군의 묘라고 한다. 초입의 길이 가팔라서 힘들었지만 연세 드신 분들과 함께 했으니 힘든 기색을 할 수도 없다. 한고비 넘자 평평한 숲길이 나타나고 시원하게 뻗은 잘 생긴 소나무들이 무거운 다리를 가볍게 했다. 탐방단원 중에 전주이씨(全州李氏) 후손이 있어 대표로 참배하고 넓은 잔디밭에 둘러앉아 ‘준경묘’에 얽힌 홍인희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다.
태-정-태-세-문-단-세... 학창시절 수학공식처럼 외우던 조선왕조 계보였다.
세종 29년(1447)에 간행된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의 6대조(목조-익조-탁조-환조-태조-태종)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세종대왕의 6대조인 목조부터 아버지인 태종까지가 조선왕조를 준비하고, 개국한 ‘뿌리 깊은 나무이며, 샘이 깊은 물’이라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서 보듯이 조선왕조는 세종대왕의 6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로부터 시작된다. 고려 후기인 1230년대는 각 지방마다 토호(土豪)들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전라도 전주는 전주이씨(全州李氏)가 토호세력이었으며 이안사는 그 18세손이었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주관(州官) 등의 고급관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그를 접대하기 위해 이안사가 총애하는 관기(官妓)를 청하였으나 평소 주관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안사는 크게 노하여 거절하였다. 그러자 주관은 안렴사와 공모하여 이씨가 왕이 된다는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을 구실로 이안사를 역적으로 음해하였다. 이에 이안사는 아버지를 모시고 전주와 정반대 방향인 외가가 있던 강원도 삼척으로 피하게 되니 그를 따르는 일족과 외족이 170여 호나 되었다고 한다. 삼척에 자리 잡은 얼마 후 부친인 이양무장군이 급사(急死)하여 상(喪)을 치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건국과 관련된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이 탄생한다. 이안사가 산에서 만난 고승(高僧)으로부터 장차 왕이 나올 명당을 소개받았는데 묘를 쓸 때 “백 마리의 소를 제물로 바치고, 금으로 된 관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백 마리의 소(百牛)와 금관(金棺)을 구할 수 없었던 이안사는 처가에 있던 흰 소(白牛)를 제물로 바치고, 금색의 귀리 짚으로 관을 짜서 장례를 치렀는데 그 때 만들어진 묘가 ‘준경묘’이다.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백우금관’의 전설이 탄생한 명당 ‘준경묘’가 내 고향 ‘삼척’에 있었다. 묘 뒤편으로 우거진 숲은 예로부터 왕실에서만 사용하던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의 군락지로 2009년 광화문과 숭례문 복원에 사용된 20그루도 이곳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한다. 추위와 바람에 시달리면서 햇볕을 찾아 올라간 황장목은 강원도의 기후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준경묘’를 뒤로 하고 차로 5분 정도 내려왔을까, 작은 비각(碑閣)만 덩그러니 자리한 곳에서 내리란다. 볼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내리라니 내려야지. 한 바퀴 휘 둘러보고 차에 타려는데 한쪽에서 들리는 홍교수님의 설명, 여기가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다는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址)란다. 조선왕조가 시작된 뿌리,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말인가?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어릴 적부터 비뚤어져 있던 내 고향 ’삼척‘에 대한 생각이 동살 퍼지듯 조금씩 밝아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점심을 먹고 찾아간 곳은 근덕면 궁촌리(宮村里)의 ’공양왕릉(恭讓王陵)‘. 궁촌은 예전 내 할아버지가 사신 곳이고, 지금은 아버지가 노년을 보내시는 곳으로 늘 저기 어딘가에 왕릉이 있다던데....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던 그 곳에 ’왕릉‘이 있었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1389년 이성계 등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1392년 조선 건국 직전 폐위되어 원주로 추방된 뒤 2년이 지나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삼척에서 교살된 ‘공양왕’.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와 삼척, 두 곳에 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 새롭게 개국하면서 공양왕에 대한 기록이 허술해 정확한 고증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두 4기의 무덤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의 무덤이고 2기는 왕자의 무덤, 석축이 없는 나머지 1기는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 전한다. 궁촌(宮村)에서는 3년마다 어룡제(漁龍祭)를 지내는데, 그에 앞서 반드시 공양왕릉 앞에서 먼저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다. 왕이 유배된 곳이라 하여 ‘궁촌’, 마을 뒷길 고돌산에서 살해되었다고 하여 ‘사랫재(살해재)’, 말을 매던 ‘마리방’ 등 지금까지도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물속이 훤히 비칠 정도의 맑은 바다를 지닌 한적하고 깨끗한 어촌마을 궁촌리는 슬픈 고려의 마지막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 찍기에 바빴던 나는 동행한 문화해설사와 홍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내 고향 삼척에 대한 무관심에 뒤늦은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유식(有識)이 또 한 됫박 채워졌다. 탐방을 마칠 즈음이면 내 유식의 곳간에 족히 한 말은 채워질 듯하다. 모두를 태운 차는 ‘육향산(六香山)’으로 향한다. 육향산, 들어본 이름이지만 정라진에 있을 줄이야! 부끄러워서 몰랐다는 말도 못하고 입구의 계단에 걸터앉은 채로 육향산 이야기에 귀를 세운다. 삼척항과 인접한 높이 불과 25m의 산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육향산은 본래 정라진 앞바다에 있던 죽관도(竹串島)라는 섬이었는데 삼척항을 만들면서 육지와 연결되고, 이름이 육향산으로 바뀌었다. 산꼭대기에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 육향정(六香亭)이 있다.
‘척주동해비’는 조선 중기 남인(南人)의 거두 미수(眉?) 허목(許穆)의 글씨가 새겨진 우리나라 최고의 전서체(篆書體'+location_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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