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립의성도서관] 아픔의 땅을 밟으며 아픔의 땅을 어루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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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15-06-26 11:53 조회627회 2015.06.26본문
아픔의 땅을 밟으며 아픔의 땅을 어루만지며......
경상북도립의성도서관 백 상 애
드디어 그 땅으로 간다는 설렘을 어찌 표현할까? 역사를 전공했던 내게 나의 머릿속을 통째로 뒤흔들었던 땅 벌교. 빨강색이 좋다는 말만 해도 왠지 죄를 짓는 생각에 내가 좋아했던 빨강을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그 시절.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벌교에 가면 내가 가졌던 궁금증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 땅 벌교를 수도 없이 그려보고 마음으로 가보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점차 잦아들었던 벌교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 이번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코스가 벌교로 잡혔다는 소식은 나를 충분히 흥분시켰고 잊혀졌던 벌교에 대한 애정을 다시 살아나게 했다.
소설 「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이 있었던 1948년 늦가을 벌교 포구를 배경으로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가던 1953년 늦은 가을 어느 날까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픈 과거를 반추해 내고 있다.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고 대부분의 인물이 실존인물을 모델로 하여 실제 사건을 그려낸 것이기에 더 많은 물음과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태백산맥 문학관은 작가를 키워준 벌교에게 효도라도 하듯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위승환 명예관장님은 그런 태백산맥 문학관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계셨다. 차분한 말투로 시작된 강의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중간 중간 섞여 정겨우면서도 거침없는 모습에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항쟁으로 시작된 질곡의 현대사를 되짚어 주시며 벌교에서 농민봉기 등 민중항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연결고리를 민초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열강을 해주셨다. 특히 낙양읍성에서의 이 노년의 신사가 들여 준 판소리를 곁들인 해설은 보성 소리 축제에도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벌교하면 이젠 이 분을 빼놓지 못할 만큼 멋진 분이다.
태백산맥 문학관은 건축가 김원이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어둠에 묻혀버린 우리의 현대사를 보며, 동굴과 굿판을 건물 안으로 끌어 들인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고 절제된 건축양식으로 문학관을 시각화시켰다. 그런 이유에서 문학관은 10m아래에 자리 잡았고, 전시실의 이종상 화백의 벽화는 높이 8m, 폭 81m에 이른다. 또한 해방 후부터 6.25를 거친 민족분단까지 ‘민족사의 매몰시대’를 벽 없이 공중에 떠있는 2층 전시실에 반영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 옥상으로 가면 18m의 유리 탑이 새 역사의 희망을 상징하듯 솟아있다. 전시실을 둘러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16,500매의 작가의 육필원고와 이 작품에 애정을 듬뿍 담은 필사본들이었다. 작가의 작업을 컴퓨터가 담당하는 요즘, 고집스럽게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써나가며 작품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졌을 작가정신을 배워 본다. 곳곳에 의미를 담은 이 곳을 시간에 밀려 꼼꼼히 살펴보지 못해 아쉬움이 많았다.
밖으로 나와 문학관의 오른편에 있는 벽화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은 분단의 아픔을 종식하고 통일을 간구하는 문학, 건축, 미술이 조화를 이룬 최초, 최대의 옹석 벽화이다. 벽화의 웅장함에 놀라고 그 의미에 또 한 번 숙연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문학관을 나와 향한 곳은 문학관 바로 앞에 위치한 소화의 집과 현부자집이었다. 소화의 집은 아름다운 소화만큼이나 소박하고 단아했다. 현부자집은 일본식 건축을 가미한 색다른 양식의 건물로 소설 태백산맥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집이며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김범우의 집에 비해 예쁘게 단장하고 있어 훨씬 더 넓고 말 그대로 부잣집으로 느낄 수 있었다.
벌교를 여행하며 특이하게 느꼈던 점은 이 작은 마을에 유달리 다리가 많은 점이다. 철다리를 비롯하여 홍교, 소화다리(부용교)가 그것인데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라는벌교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이 세 다리 중 내 마음을 가장 붙잡았던 다리는 소화다리이다. ‘부용교’라는 원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소화다리는 소설 속 ‘소화’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의 연호였던 ‘소화’를 붙여 누군가 부르기 시작하여 부용교라는 이름보다 더 많이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다리는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힘없고 배고팠던 민초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비극의 장소로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25의 대 격랑이 요동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다리인 것이다. 일본인 중도(나카시마)의 이름을 딴 중도방죽과 함께, 다리의 이름이 이젠 부용교로 고쳐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아픔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방죽과 다리 이름을 되새기며 역사 속에서 다시 범하지 말아야할 오류를 경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고팠던 땅, 벌교를 밟고 온 오늘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감동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렇게 가슴 뜨겁게 한 소설을 쓰신 조정래 작가가 진정 위대하게 여겨지는 것은 나뿐일까? 다시 한 번 「태백산맥」을 되짚으며 작가를 키워낸 이 땅이 충분히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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