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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립서강도서관] 미술관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후기 (기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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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15-05-13 20:17 조회612회 201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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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립서강도서관] 미술관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후기 (기선계)

고흐가 존경한 스승, 밀레 전을 다녀와서 (기선계)

                                                      

 

서강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미술관으로 떠나는 인문학 프로그램 : 강연 * 미술관 탐방 )

장소: 소마 미술관 (올림픽 공원내)

 

"여러분이 이 전시회의 기획자고 포스터를 만든다면 어떤 그림을 쓰겠습니까?"

이 동섭 교수가 물었다. 초여름 햇살을 피해 올림픽 공원 내 나무그늘이 드리운 계단에 앉았다. 푸르른 언덕을 배경으로 분수를 내뿜고 있는 호수를 바라보며 볼을 간질거리는 바람을 기분 좋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양치기 소녀요. "

씨 뿌리는 사람이요."

"추수 중에 휴식 (룻과 보아스)."

"바느질 수업 아닐까요."

"뜨개질 수업도 좋던데요."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고 이 동섭 교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메밀 추수, 여름'이 좋았으니 그걸 쓰겠노라고 속으로 대답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다시 곰곰 생각해보니, 이 질문은 결국 밀레라는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밀레라는 작가의 고유성 '에 중심을 두느냐 아니면 '미술사라는 관점에서 바라 본 밀레'에 중심을 두느냐 일 것이다.

 

7,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나에게 밀레의 그림은 이발소 그림으로 친숙하다. 아버지를 찾으러 이발소에 갔을 때, 턱에 면도 거품을 잔뜩 묻히고 뒤로 젖혀진 의자에 누워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면도를 하고 있는 이발소 아가씨의 치마는 구부릴 때마다 허벅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올라갔다. 꽉 조이는 셔츠아래 탱탱한 가슴이 터질 듯 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고개를 돌리자 색깔이 바랜 하얀 벽에 밀레의 그림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밀레 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고흐가 가장 존경한 화가, 밀레'라는 구절이 없었다면, 서강도서관에서 하는 '미술관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강좌를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밀레를 고흐가? '청출어람을 위해 필요한 비장의 카드는 무엇인가'라는 강연 제목을 보고 둘 사이가 궁금해졌다. 강사로 나선 이 동섭 교수가 10여년을 파리에서 보낸 공연 미학 박사라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줄 것 같았다. 충격적이게도, 고흐가 밀레의 그림 수십 점을 모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막장 드라마에서 가장 마지막에 가서야 애인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어리석은 연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두 점도 아니고 수십 점이었다. '씨 뿌리는 사람' '낮잠' '첫 걸음' '자화상' '만종' '갈퀴를 든 여자' '나무꾼' '나무 아래에서 양털 깎기' '삽질하는 두 사람' '아침 일터로 나가다'......

밀레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남부의 퐁텐블로 숲 근처의 바르비종이라는 작은 도시에 둥지를 틀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눈으로 본대로 그리고자 하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였다. 그들은 바르비종파라고 불렸다. 그는 풍경을 위주로 그린 그들과 달리 일하는 농부들의 삶을 그렸다. 쿠르베를 비롯한 사실주의 화가들이 처음으로 보통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한 시대였지만, 주로 농부들의 삶을 그린 밀레는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되었다. 그가 그린 그림들 속의 농부들에게는 가난과 질시를 묵묵히 끌어안고 살아가는 삶의 숭고함이 느껴진다. 고흐가 밀레를 사랑하고 존경한 이유일 것이고, 밀레가 고유성을 가지는 부분일 것이다. 가난한 광산촌에서 목사생활을 하면서 그들과 삶을 같이 했던 고흐는 밀레의 그림 속에서 감화를 받았다.

 

6개의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밀레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미술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와 장르화는 이 화가들이 자연주의 화풍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결국 미술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인상주의가 탄생했다.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미술사라는 것, 또한 시대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상업의 발달로 신흥 귀족과 부유한 상인 계급들이 출현했다. 왕족이나 귀족을 위해 종교화 신화 초상화 등의 커다란 그림들을 그리던 화가들이 이들을 위해 집에 걸어둘만한 풍경화나 풍속화와 같은 작은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왕과 귀족들을 위한 로코코 미술이 유행하여 이런 흐름이 끊어졌다. 하지만 혁명 후 새로운 계층의 대두와 그들의 그림에 대한 욕구로 17세기 네덜란드화의 전통은 19세기 중반 바르비종파로 이어졌다. 특히 2전시실의 디아스 데 라 페냐의 '퐁텐블로 근처의 숲속 길' '숲속 웅덩이'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빽빽한 나무 때문에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숲 안은 헨델과 그레텔이 길을 잃고 헤맨 그로테스크한 숲 같다. 언뜻언뜻 숲 사이로 비치는 빛들은 카라바조나 램브란트 회화에 나타나는 명암의 극적인 대비가 생각난다. 요세프 이스라엘스의 '이별 전야 ' (1862년작) 는 특히 명암의 대비가 강렬하여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전시실 한 칸을 차지한 밀레의 농촌 여인들의 생활 그림들은 17세기에 유행한 네덜란드의 장르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네덜란드 장르화는 여성과 아이, 또는 사소한 일상의 한 장면을 그림의 주제로 삼은 풍속화로 은은한 조명, 어두침침한 분위기, 탁한 색조를 특징으로 한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장르화가 19세기 프랑스 화가 밀레에게 영향을 미쳤고 다시 인상주의의 대가인 네덜란드 화가 고흐에게 영향을 미쳤다.

처음 이 동섭 교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내가 밀레의 고유성에 중점을 둔다면 농부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씨 뿌리는 사람'이나 '감자 심는 사람들'을 포스터로 써야할 것이다. 미술사적인 그의 역할에 더욱 중점을 둔다면, 인상주의적 화풍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메밀 추수, 여름'이나 '바느질 수업'을 써야할 것이다. 분석을 해 놓고 보니 그냥 느낌이 좋다고 '메밀 추수, 여름'을 포스터로 쓰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고흐처럼 그의 고유성에 한 표를 던지겠다. 그래서 '씨 뿌리는 사람'으로 포스터를 만들 것이다. (‘감자 심는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작품 훼손으로 4월경 보스톤 미술관으로 가져갔다.)?

 

'청출 어람을 위한 비장의 카드는 무엇인가?‘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존경은 하되 나는 나의 그림을 그리겠다. '

이 동섭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멘토는 버려야 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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