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교육정보센터] ' 내 고장 경산, 부활을 꿈꾸다' 참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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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란 14-12-07 11:29 조회656회 2014.12.07본문
내 고장 경산, 부활을 꿈꾸다.
천윤자
언제부터인가 내 고향 경산 앞에 교육도시라든가 삼성현(三聖賢)의 고장 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인근 대도시에 있던 대학들이 옮겨오더니 새로운 대학들이 들어서고, 군은 시로 승격되었다. 교과서에서나 만나던 일연선사, 원효대사, 설총이란 분들이 이 고장 출신 위인이라며 역사문화관을 짓고, 그들을 알리는 일에 열중이다. 단오 때는 고향마을 제석사에서 원효대사 다례제를 올리고, 유월이면 시립 박물관에서 지역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연선사 탄신을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마을은 여느 시골마을이나 다름없는 농촌이었다. 대문 밖만 나서면 논밭이 펼쳐지고, 집 앞 개울은 아낙들의 빨래터였으며, 여름밤 개구리가 밤새워 연주회를 여는 동네였다. 주민들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 더러 학교선생님이나, 면사무소 직원이 있었지만 그 분들의 가족들도 농사를 지었고, 선생님도 주말이나 휴일에는 농사일을 했다.
면 소재지에는 국민학교와 남.녀중학교, 농업고등학교와 여자상업고등학교도 있었으니 두메산골은 아니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한 학년 6학급에 학급마다 60명이 넘어 줄잡아 360명이 넘었고, 전교생 2천명이나 되는 요즘 대도시 학교 못지않은 많은 학생들이 다녔다. 우리 세대를 일러 ‘베이비부머’라고 한다. 아이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더러는 공장으로, 더러는 일찌감치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에 뛰어들기도 했고, 또 몇몇은 인근 대도시 학교로 유학을 떠났지만 대부분 면내 남녀 중학교를 거쳐 농업학교와 상업학교로 진학하고 어른으로 성장했다.
내가 처음 원효, 설총, 일연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그때는 그들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먼 역사 속 인물인줄만 알았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태어 난 인물인 줄은 몰랐다. 그 시절 내가 알고 있던 이순신장군이나 세종대왕 같은 위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알고 있지나 않았을까.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처음 읽은 것도 그때쯤이다. 국민학교 4~5학년쯤 이었으니 어린이 수준으로 쉽게 번역된 책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에도 학교에서는 고전읽기를 강조했다. 학년마다 선정도서를 정해 읽게 하고 독후감도 쓰고 내용을 소재로 그림그리기도 하고, 독서퀴즈 같은 시험도 쳤다. 나는 몇 개 문제에 답을 적어냈고, 학교 대표로 군 대회를 거쳐 도 대회에 나가는 행운도 얻었다. 그 덕에 나는 수업도 빼먹고 도서실에서 읽었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공부까지 해야 했다. 기억해보면 강요된 책읽기는 참 재미없었다.
책 표지가 푸른색 이었던가 노란색 이었던가 기억도 흐릿하지만 내 기억 속에 선명한 것은 삼국유사의 지은이가 ‘승 일연’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강요된 암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당시의 나는 일연 앞에 쓰인 승(僧)자가 김이나 이, 박과 같은 성씨인줄 알았다. 그런 나의 독서 수준이었으니 내용인들 얼마나 이해 했겠는가마는 그때 읽었던 단군신화나 박혁거세 이야기, 서동과 선화공주라든가 이상한 피리 만파식적, 이차돈의 순교, 선덕여왕의 지혜, 김춘추 이야기는 오래도록 내 기억의 창고에 잠재되었다가 역사시간이나 국어시간에 불쑥 뛰어 나오기도 했다. 고등학교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향가의 출전도 바로 오래전 읽었던 이 책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반가움은 차라리 놀라움이었다.
시골 아이였던 내가 그나마 어릴 때부터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친척 아재 덕이 아니었던가 싶다. 고향마을에서 신문지국을 운영하던 아재는 당시 시골에서는 흔치않게 농업고등학교를 나온 엘리트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문지국을 운영하여 먹고 살기가 편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것저것 하던 일이 잘 되지 않아 월부 책장사를 시작한 아재는 가끔 우리 집에 들러 여러 가지 전집들이 사진으로 찍힌 기다란 광고지를 아버지 앞에 펼쳐놓고 생활고까지 함께 풀어 놓았다. 그런 날이 지난 후면 어김없이 책이 든 무거운 상자가 집으로 배달됐다.
학교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던 안데르센과 이솝, 한국전래 동화, 한국위인전기, 세계위인전기가 내 손에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아버지가 집안 동생의 살림살이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싶어 보내준 배려에서였다. 어쨌든 아재는 내게 책 선물을 하는 고마운 분이었고, 아재의 월부 책장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내가 받은 책은 이후 오랫동안 나의 보물로 남아 친구들 앞에 우쭐댈 수 있게 했다.
길 위의 인문학, 원효, 설총의 자취를 따라 탐방 길에 오른 것도 내 고장 경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살다 귀향한지 2년. 참 많이도 변했다. 한 학년 360여명이던 학생은 20여명으로 줄었고,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농업고등학교는 자동차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마음만 먹으면 책은 언제나 읽을 수 있을 만큼 풍성하다. 곳곳에 도서관이 생기고 책뿐만 아니라 갖가지 문화강좌와 체험의 장이 열린다.
원효대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경산시 유곡동, 설총선생의 탄생과 유년기를 보냈던 용성면 반룡사와 왕재 둘레길, 원효의 탄생설화가 있는 자인면 제석사 등을 어린 친구들과 동행하며 둘러봤다. 어릴 때 내가 다니던 길, 어른들이 ‘불당골’이라 부르던 곳이 이 절집 때문이란 것도 그때는 몰랐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게 된 월정교를 비롯해 경주에서도 원효와 설총의 발자취를 찾아다녔다. 마치 1600년 전 신라인이 되어 원효대사와 함께 구도의 길에 나선 듯. 고향에서 다니던 여중 2학년 때, 생애 첫 수학여행지였던 경주도 내게는 첫사랑처럼 아련한 그리움을 주는 곳이다.
내게도 고향 경산은 삼성현의 고장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