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경상북도교육정보센터] '내 고장 경산, 부활을 꿈꾸다' 참가 후기

페이지 정보

14-12-07 11:24 조회663회 2014.12.07

본문

[경상북도교육정보센터] '내 고장 경산, 부활을 꿈꾸다' 참가 후기

경상북도교육정보센터 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내 고장 경산, 부활을 꿈꾸다참가 후기

 

                                                                                                                                                               한울타리독서회원 박경애 

 

 

<1차 탐방-6. 14.>

 

   경산의 세분 성현(聖賢)중 한분이신 원효스님과 관련 있는 주변지역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에 참여 하게 되었다. 탐방에 앞서 경산시립 박물관 초대 관장님이신 김종국 박사님의 강연을 듣기 위해 정보센터 지하 시청각실에 모였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전 신라로 시간여행을 떠나듯 김종국박사님의 이야기보따리가 쏟아져 나왔다.

김춘추와김유신장군,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들 보희와 문희, 부적주공아파트 앞의 김유신의 마유지, 진량 윤성 아파트앞 김유신장군의 군사 훈련지이자 연병장, 마유지를 지나 진량 방면 우측 300m 지점안쪽에 위치한 신라화랑 교육장 등 우리지역 가까이에 있는 유적지의 내력을 듣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다 들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 

도시락으로 점심을 간단히 하고, 정보센터 마당에 대기 중인 대형버스에 올라 탐방길에 나섰다. 버스가 출발하자 김종국 박사님의 원효스님 탄생설화 사라수에 얽힌 이야기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다. 탐방을 마치고 느꼈지만, 박사님은 우리들에게 방문지 이전에 사전지식으로 예습 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경산시 유곡동에 위치한 원효스님의 생가 터인 초개사는 정보센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차는 몇 분 이내 멈췄다. 정보센터에서 가까운 거리임에도 도심에서 벗어난 그곳은 문명의 침범이 비껴 간듯 신라시대의 그때 인듯한 착각을 하게 하는 곳이었다. 건물이라고는 나즉한 인가(人家) 몇채와 둑주변에 잡초와 칡넝쿨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저수지 옆에 차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스피커를 메고, 저수지둑 으로 오르시는 김 박사님 뒤를 어미닭을 따르는 병아리들 마냥 한울타리독서회원, 어울렁 더울렁 동화 구연팀, 꿈여울 어린이 독서 모임 팀은 뒤따라 오르고 있었다. 신라때 적대연(跡帶淵)이라 불린 이 저수지는 지금은 버들유자, 못지자를 써 유지(柳池)라 불리고 있었다. 둑 위에서서 원효 스님의 조부 잉피공을 모신 사당이 있다는 능선과 신라때부터 고여 있었을 저수지 물을 번갈아보며, 원효스님의 조부 인피공께서 이 저수지 쪽을 보고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유월의 뜨거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개사는 원효 스님의 생가터인지 초막을 지었던 터 인지는 불분명 하지만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효스님께서 출가후 이곳에 절을짓고, 초개사라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初開寺라는 현판이 있을 자리에 휴심원(休心院) 이라는 현판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력으로 '심생즉 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 왔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는 모든 것은 마음에 딸린 것 이라는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기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여 합장으로 공경을 표하고 화쟁문(和諍門) 안으로 들어갔다.

원효스님이 태어 나신 곳을 사라사라 전해 오는데, 그곳이 지금의 자인에 있는 제석사자리라 하였다. 원효스님의 모친이 산달에 이르러 친정인 경주로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가 있어 밤나무 아래에 남편의 가사를 둘러 산실을 만들고, 원효스님을 낳았다고 하여 가사를 걸친 밤나무를 사라수라 일컫고,그 자리에 절을 지어 사라사라 하였다. 탄생설화에 걸맞지 않게 제석사는 주택가에 자리 하고 있어, 살아생전 대중과 함께 하고자 했던 원효 스님의 대승불교의 바람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제석사절 안으로 들어서 오른쪽 건물이 원효스님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사당 건물의 삼면벽에는 초개사처럼 원효스님 설화에 얽힌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겨 놓아, 그림책을 보듯 김 박사님께서 하나하나 이야기해주셨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이름만큼 신비한 반룡사였다.

용성면 용전리에 자리한 반룡사로 가는 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아비를 기다리다 죽은 한 여인의 원혼이 서린 구불구불한 고갯마루를 넘어서자 앞에 큰 병풍이 가려진듯 높은산이 의기롭게 버티고 있는 산 아래 차가 멈췄다. 초개사에 오르는 길보다 더 가파르고 숨 가쁜 산행으로 반룡사 평지에 올랐다. 마치 산 아래 중생계를 굽어 살피시듯 정각에 계시던 반룡사 주지 혜해 스님께서 맞아주셨다. 유월 더위와 산행에 목마름을 느낄 즈음에, 산바람이 산들 부는 정각에 둘러 앉아 먹은 수박 맛은 가뭄에 단비 마냥 시원하고 달콤하였다.

반룡사는 신라때 군사 병참 기지로 신라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였고, 원효스님은 군사 참모로서의 역활을 수행 하면서 머문 곳으로 짐작 할 수 있다고 하셨다. 병풍처럼 높은 산을 넘어 신라의 도읍인 경주로 넘어가는 군사들의 이동로 였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왕이 압량주를 행차 할 때 넘어 온 고개라서 '용재'라 불리고 있었다. 반룡사라는 이름에서 두 가지를 추측하면, 청도 압량지역의 군을 이곳에 소집하여 경주로 넘어 갔을 것으로 추측하고, 많은 수의 군 이동 모양새가 마치 용의 트림과 같은 장관으로 보여져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임금을 용처럼 신성시 했던 그때 임금이 머물렀던 곳에서 유래 되었다고 전합니다. 어떻든 이곳은 그 지세와 지명만으로도 충분히 그 위상을 높이기에 모자람이 없을 듯하였다. 용성면 용전리 그 지명 또한 그렇게 추측해 보면서, 꼭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기에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싣고도 눈길이 창밖을 향하게 되는 곳이었다.

신라의 공주로 몸이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을 요석공주는 지아비와 아들 설총을 먼저 생각하는 맘을 내어 원효스님의 수행지인 초개사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거리인 반룡사 에서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인재 설총을 키워 내심을 칭송하시던 혜해스님의 말씀은 어머니로서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훌륭한 일임을 다시한번 각인 시켜 주셨다. 또한, 아버지의 부재를 뛰어 넘고, 훌륭하게 자란 설총과 같은 인물이 되라고, 꿈여울 어린이 독서회원들에게 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2차 탐방(6. 21.)>

일주 뒤에 경주로 향하는 버스에 한울타리 독서회원, 어울렁더울렁 동화 구연팀, 꿈여울 어린이 독서 회원 팀이 다시 모였다. 몇몇 분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일주전 일차 체험후 지인을 데리고 오신 회원님들이 보였다.

기대에 찬 여행길에 1차때 함께 함께 하셨던 김종국 박사님께서 함께 하지 못하심이 아쉬웠다. 하지만 차가 도착한 경주 교동 마을 주차장에 손수협 경주 박물관 강사님께서 너그러운 풍채와 환한 미소로 맞이해 주셨다.

교동마을 입구로 안내 하신 후 꿈여울 어린이 독서회원들에게 선물을 준비 했다고 하시면 신라시대의 대학격인 국학에 대한 퀴즈를 내시고 설명도 함께해 주셨다.

교동 마을은 옛 경주의 중심지로 12400여년을 내려온 최 부자 집이 있고, 국학의 후신인 향교와 박 혁거새 탄생 설화가 서린 계림 숲, 무엇보다 이번 탐방의 중요 목적지인 요석 궁으로 들어 가는 월정교가 있으며, 계림 숲을 조금 벗어 난 좌우 거리에 첨성대와 석빙고가 있어서 날씨 좋은 날에 걸어서 다시 한번 더 신라의 보물 하나 하나를 느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처음 방문엔 여기에 무엇이 있구나! 두 번 방문에 이것이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를 되새기면서 한 번에 그치지 않는 꾸중한 탐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되는 곳곳의 유물들을 보면서, 현재를 살고 있는 내 주변과 더불어 아이들의 현재가 될 미래도 생각 하게 해주는 좋은 공간에서의 시간이 되었다.

교동을 벗어나 방문한 곳은, 신라의 왕자가 기거한 동궁으로 추측하며 신라 통일후 고구려 건축양식과 백제건축양식을 모두 섞어 만든 아름다운 정원 양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이 고여 있으면 섞기 마련인데, 동궁의 연못물이 섞지 않고 맑음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옆 강에서 깨끗한 물이 들어오고 있는 수로를 보여 주시고 설명해 주셔서 새삼 알게 되었다.

선조의 지혜로움에 감탄하며, 보슬비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 손수협 강사님께서 신라 동궁 연못 옆에서 읊어 주신 조선초 세종때 천재 시인으로 최고 문인인 매월당 김시습의 시 사청사우를 떠올리며 황룡사지터까지 버스를 타지 않고 트래킹 코스로 걸어 갔다.

 

사청 사우

김시습

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 잠깐 갰다 잠깐 비 오고 비 오다 다시 개니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 천도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상의 정이야

譽我便應還毁我(예아편응환훼아) 나를 칭찬하는가 했더니 곧 다시 나를 비방하고

逃名却自爲求名(도명각자위구명) 이름을 피하는가 하면 도리어 이름을 구하네

花開花謝春何管(화개화사춘하관) 꽃이 피고 꽃이 진들 봄이 무슨 상관이며

雲去雲來山不爭(운거운래산부쟁) 구름 가고 구름 옴을 산은 다투지 않도다

寄語世上須記憶(기어세상수기억) 세상에 말하노니 모름지기 기억하라

取歡無處得平生(취환무처득평생) 어디서나 즐겨함은 평생 득이 되느니라

 

이 시는 잠깐 갰다가 잠깐 비가 오는 날씨를 보고 지은 것으로, 자연 현상에 비추어 인정(人情) 세태(世態)가 변함을 풍자한 시이다'+location_nm+'

' }); infowindow.open(map, marker); // 지도의 중심을 결과값으로 받은 위치로 이동시킵니다 map.setCenter(coords); } });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