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도서관 - 조병화 문학기행 참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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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식 14-11-07 10:30 조회696회 2014.11.07본문
?제3차 종로도서관과 함께하는 '조병화 문학기행' 참여 후기 (2014.10.15)
- 시화 속에 녹아드는 힐링 조병화의 꿈과 사랑 이야기 -
‘꿈은/ 존재의 숙소이며/ 사랑은/ 그 숙소의 양식~~’(조병화 시 <나의 철학> 중에서)
순수한 고독과 허무를 배면에 깔고 영롱한 꿈과 사랑의 가지를 펼친 조병화 시인. 베레모, 담배 파이프, 양복 윗주머니의 행커칩, 술, 유화, 소묘가 시인의 아이콘이다. 시인은 저항 참여작가인 이상화, 한용운, 심훈, 김지하, 김남주 등과는 달리 ‘인간의 정서 회복에 진력을 다한 시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내 머릿속 조병화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고통스럽다. 전두환에게 대통령 취임 축시를 바치는 등 군부독재를 미화하고, 이를 밑천 삼아 문인협회 이사장, 예술원장 등을 역임한 예술권력가로 각인되어 있으니. 하긴 역지사지해 보면 누구나 배교를 거부하고 의연하게 목숨을 버린 천주교 순교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범인의 입장에서 보면. 저항에서 친일로 전향한 최남선과 이광수도 그랬듯, 목숨이 오가는 그 서슬퍼런 시기에 미적 감동을 추구하던 여린 마음의 시인이 군부독재의 총칼을 쉬 피할 수 있었을까? 만약 독재가 시인에게 축시를 강요하고, 강요 당한 시인의 눈앞에 사랑하는 가족이 오버랩 되었다면? 모르겠다. 어쩌면 시인은 그 쓰라리고 수치스런 역사의 편린을 떨쳐내기 위해 술과 담배를 보듬고 꿈과 사랑과 낭만과 기다림과 그리움과 이별과 고독과 죽음과 허무라는 단어 뒤에 더더욱 숨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을 절대적으로 이해하고 찬양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에겐 부정과 긍정이 공존한다. 그리하여 이번 문학기행에서는 부정적 장막을 잠시 걷고 시인의 고독과 허무와 꿈과 사랑의 숨결만 좇기로 한다.
경기도 안성. 예부터 안성맞춤의 유기가 유명한 곳, 전국의 모든 특산물이 유통되어 처녀들이 장사해도 전혀 허물이 안 되던 곳, 허생이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허생전의 배경이 된 곳. 그 곳에 조병화 문학관이 있다.하숙집에 근거한 윤동주 문학관, 소설 속의 지명에 뿌리를 둔 황순원 문학관과는 달리 시인은 자신의 고향에 문학관을 두었다. 특이하게도 살아 생전에 자신의 손으로.
가을 중턱의 맑고 평온한 농촌, 난실리 마을. 짙푸른 하늘에 눈이 시렸는지 천지사방의 이파리들이 때 이르게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황금들녘을 바로 지나 주차장에 이르자 감나무, 너도밤나무, 도토리나무의 보초 사이로 팔자 지붕이 드러난다. 벽의 무성한 덩굴이 운치 있다. 청와헌(聽蛙軒)이다. 조병화 시인이 집필과 휴식을 취하던 곳. 건물 바로 앞 들판에서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하여 청와헌이라 칭했단다. 그 앞의 고독한 시비(詩碑)에는 시인을 함축한 ‘꿈’이 음각되어 있다. ‘꿈의 귀향/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생과 사의 원천을 어머니로 귀결 지은 조병화 시인. 그는 효자였다고 한다. 시집 <어머니>를 낳게 하고, 3년 상을 치르는 마음으로 어머니 묘소 옆에 문학관을 둘 정도로 어머니를 자신의 종교로 치환한 그 대단한 효심은 어디에서 왔을까? 5남 2녀의 늦둥이 막내에 대한 어머니의 전폭적인 사랑에 연유했을 수도 있고, 시인 나이 여덟 살 때 일찍 여읜 아버지의 빈자리에 대한 반사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런 추리에 이르자 문득 시인이 마지막까지 빨았던 담배 파이프는 아마 엄마의 젖꼭지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청와헌에는 시인의 유품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는데, 유화 등 귀중한 유품 보존 차원에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 섬세한 숨결을 느낄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청와헌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걸으니 시인의 묘역이 나온다. 묘소의 오른쪽이 어머니, 가운데가 시인보다 5년 먼저 떠난 아내 김준 여사, 왼쪽이 시인. 묘소 옆에는 어머니와 아들만 조각된 모자상이 시인의 효심을 뽐내고 있다. 아내이자 며느리가 서운하겠다. ‘~ 나는 어머님의 흰 두루마기에 왈칵 붙어서/ 무섬무섬 꼼짝을 못했지/ ~ 이곳을 지나칠 때까지/ 그 생각, 하얀 어머님 생각 ~’(시 <오산역을 스칠 때마다> 중에서). 남편의 지나친 효심과 시어머니를 읊은 많은 시를 대하며 저편에서 애끓어하던 아내와 며느리는 죽어서야 비로소 시어머니와 남편을 갈라놓았다. 시인의 기단식 무덤 앞의 비석은 의의로 간명했다. ‘片雲 趙炳華 1921.5.2~2003.3.8’. 조각 구름(片雲)의 호(?)에서 시인의 시 세계가 한꺼번에 느껴지는 듯하다. 작가의 호는 그 성격과 상징을 내포한다. 황순원의 호는 백성의 고향을 의미하는 민향(民鄕)이다. 그는 저항 작가로 불린다. 반면, 편운에서 드러나는 조병화는 분명 저항 참여시인이 아니다. 조각 구름처럼 살고자 했던 조병화. 외로이 떠 있는 한 조각 구름에서 고독을 보았을까, 어느 순간 사라지는 구름에서 허무를 깨쳤을까. 아니면 한가로이 노니는 조각 구름을 보며 꿈을 꾸었을까. 그런 시인에게 독재가 씌운 올가미는 가혹했다. 문득 쳐다 본 푸른 하늘 속의 구름 조각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묘소 참배 후 다시 청와헌 쪽으로 향하니 온통 하얀색의 벽에 팔자 지붕을 얹은 단층주택이 눈을 가로막는다. 편운재(片雲齋)이다. 조각 구름이 머무르는 곳. 편운재는 별세한 시인의 어머니를 위해 그 묘소 옆에 세운 묘막이란다. 입구 옆 벽면에는 ‘편운재’ 표지석이 붙어있고 그 밑에 시인의 효심이 새겨져 있다. “어머니 말씀/ 살은 죽으면 썩는다./ 어머니 陳遠行心 1882-1962 을 위하여 이 산막을 세움”. 陳遠行心은 어머니 진종 여사의 불교 법명인 듯하다.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죽어서 가지고 갈 것은 없으므로 아끼지 말라는 가르침이란다. 소위 자비와 배품의 철학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증명코자 했는지 평소 지갑에 돈이 있는 한 술값 밥값을 항상 먼저 내고 가난한 문우들을 자존심 건드리지 않으면서 따뜻하게 보살폈다고 한다. 가진 거 모두 내 놓고 빈손으로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존재. 여기에서도 시인이 탐구한 허무의 냄새가 돈다. 아마 시인의 순수한 고독과 허무의 유전인자는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앞 풀밭에서 편운재를 지키고 있는 하얀 조각상. 역시 모자상이다. 보채는 아이를 업고 먼 곳에 눈길 주는 어머니.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남편을 기다릴까? 책가방을 든 자식을 기다릴까? 그 눈길을 따라가 본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동구밖 좁은 길. 어머니의 눈길은 그 길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다. 밥상은 이미 차려 놓았는데 길은 오랫동안 텅 비어 있고 어머니의 가슴은 타들어 간다. 얼른 강아지의 그림자라도 비쳤으면 좋으련만. 시인의 기다림과 그리움과 고독은 어머니의 눈길이 머문 곳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편운재 안에는 시인의 유품과 생전에 작업실로 썼던 혜화동 서재를 원형 그대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는데 이 역시 보존 차원에서 공개되지 않는다고 하니 거듭 아쉬울 뿐이다.
편운재에서 아담한 계단을 내려오니 푸른 잔디의 너른 정원이 펼쳐진다. 그 위 하얀 차림의 이층 양옥이 조병화 문학관이다. 입구 옆 ‘그리움’이라는 제목의 외톨이 여인상이 일행을 맞이하며 오랜 기다림을 떨쳐낸다. 문학관에는 시인이 직접 그린 인물소묘전이 열리고 있었다. ‘고독한 혼과 혼의 대화’라는 주제로. 전시관 벽면에 빼곡 붙어있는 시인의 이웃 모습. 그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소묘 하나가 반갑다. 황금찬 시인. 사랑과 평화를 노래한 아름다운 시인이기도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현옥 시인이 찬미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조병화 시인은 황금찬 인물 소묘 위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당신은 언제나 악의가 없는 그 목소리가 좋소.”
1층 전시실 가운데 유리관에는 시인의 베레모, 만년필, 안경, 도장, 원고지 등 시인의 상징물들이 들어있다. 특히 끝이 부드럽게 굽은 담배 파이프가 눈에 띈다. 시인은 공초 오상순처럼 대단한 골초였다고 한다. 담배를 입에 물고 원고를 쓰고 늘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아마 시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병환도 담배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전시관의 안쪽 구석에는 머리에 월계관을 쓴 시인의 흉상이 놓여 있다. 월계관은 계관시인을 상징한다. 흉상 밑받침에 새겨진 시인의 자화상이 문득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버릴 거 버리고 왔습니다./ 버려선 안 될 거까지 버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나의 자화상’. <버릴 거>와 <버려선 안 될 거>와 <보시는 바>가 머리에서 희미하게 잡힐 듯한데, 흉상 머리 위의 감투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다른 유리관에는 온통 시인의 작품이 담겨 있다. 시집 53권을 포함하여 수필집, 이론서, 화집 등 160여권의 저서를 출간하였단다. 그 저작량은 우리나라 시인 중 최고의 기록. 입이 절로 벌어진다. 약 50년간 저작활동을 했다 치면 1년에 3권 이상 출간한 셈인데, 그 엄청난 성실성과 추진력과 체력(대학 럭비선수였다 함)에 박수를 보낸다. 일부에서는 시인의 시가 너무 쉽다고도 한다. 수긍이 간다. 시의 특성인 애매모호성이나 메타포가 결여된, 일상 언어를 이용한 평이한 표현으로 인해 시인의 시를 읽으면 그 의미를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이니. 시인의 감성을 여과 없이 원고지에 뿌린 것도 같다. 그래서 학창시절에 공부를 썩 잘 했다는 머리 좋은 시인이 혹시 치열한 고뇌 없이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쓴 건 아닌지, 창작이 아닌 제작을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부와 여유와 권력의 펜에서 흘러나온 시가 인간의 고뇌를 얼마나 깊이 담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일상생활 언어와 감성적 언어로 쉽게 쓴다고 해서 무슨 문제란 말인가? 현대미술 미니멀 아트의 선구자인 미국 멜 보크너(Mel Bochner)가 "만약 누군가가 그의 작업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술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시인의 시가 쉽든 말든 그의 시는 시다. 오히려 난해한 정보화 시대 속 바쁜 독자들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순기능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시. 하여간 그 놀랍고도 초인적인 저작량, 시인의 성실성에 대한 평판과 체력과 그 엄청난 흡연량을 생각하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동경에서 사범대학을 다녔다. 그러나 전공은 물리?화학으로서 처음부터 시를 쓸 작정은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유학시절의 외로움을 잊기 위해 시집을 끼고 다닌 것이 시인이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해방 후인 1949년, 그러니까 29살 서울고 교사 시절,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들>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해방 후의 일이니 구조적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 문인은 될 수 없었겠다. 그래서 친일도 모자라 전두환 생일 축시까지 바친 서정주 시인보다 낫다는 생각에 이르자 피식 웃음이 나온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복도 위 벽면에는 시인과 가족의 역사가 나열되어 있다. 복스럽고 넉넉한 모습의 그의 아내 김준. 그녀가 산부인과 의사라는 대목에서 가난한 시골 총각의 영민함이 느껴진다. 의사인 자신 앞에서 술과 담배를 내지르는 겁 없는 남편, 깊은 효심으로 어머니 치마폭을 떠나지 않는 남편, 아내에 관한 시를 거의 남기지 않는 남편, 방대한 창작과 독서와 잦은 여행으로 가정에 소홀했을 남편. 그런 남편의 바깥에서 지독하게 고독과 허무를 느끼고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몸부림 친 사람은 시인이 아닌 오히려 그녀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층 복도 끝에는 시인이 펜을 놓게 되는 슬픈 사연이 머물러 있다. ‘일생을 시를 쓰며 시를 살아왔지만/ 두뇌에 약간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창작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시집(53)으로 끝을 맺으려 하는 겁니다./ 좀 섭섭하지만 그러나 만족을 합니다.’ 시인의 마침표를 보니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진다. 결국 이렇게 허무로 돌아가는가 보다. 창작에 대한 열정도 권력과 명예에 대한 열정도 모두 허무가 되는 이 우주의 원리. 이 엄숙한 철학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겸허해진다. 그런데 두뇌에 약간 고장이 났다니! 그럼 치매 증상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누구보다도 왕성한 두뇌 활동을 보여왔기 때문에 치매는 아닐 터이나 의외로 다가온다. ‘비석이 쭈르르 비를 맞고 있다./ 순수 고독,/ 순수 허무.’(조병화 시 <비석> 중에서). 시인의 마지막 시집 53권 <넘을 수 없는 세월>은 시인이 소천한 후에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2층 복도 끝 문을 지나니 옥상이 나온다. 청아한 하늘과 후련하게 확 트인 황금 들녘,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무조건 좋다. 옥상 한 켠, 푸른 천에 ‘꿈’이 하얗게 새겨진 깃발. 조병화 문학관 심벌이다. 푸른 꿈은 금방이라도 푸른 하늘로 날아갈 듯 거침 없이 나부끼고 있다. 그림은 나의 위안이고 시는 나의 철학이라던, 시는 그림처럼 쓰고 그림은 시처럼 그린다던, 보편적 인생을 노래하고 싶었다던 편운 조병화 시인.
시인이 조각 구름되어 푸르게 날아가고 있다.
수치와 욕망이 없는, 꿈과 사랑이 있는 그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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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풍을 마련해 주신 종로도서관에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먼 길을 잘 이끌어 주신 도서관 관계자 여러분께도 고마운 말씀 전하구요. 그리고 강의실에서 버스에서 문학관 현장에서 조병화 문학에 대해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신 경희대학교 김종회 교수님과 문학관 문화해설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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