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하도서관]끊어진 철길에서 시작하는 평화와 통일의 길 -철원 (박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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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숙 14-11-06 20:16 조회759회 2014.11.06본문
남북의 경계, 철의 삼각지에서 통일을 빌다
- 민통선 주변 역사 유적지를 가다 (철원을 중심으로)
박거용 (교하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참가자)
<철원, 그 비극의 아름다움 >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폭파침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안 함 두 쪽이 육상에서 다시 만나고 순간적으로 비명에 간 천안 함 46용사를 생각하며 철원 철의 삼각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렇게 철원의 과거 북한 노동당사가 첫 방문지이고, 피의 고지라고 불리던 백마고지가 방문지가 된 것은 우리 문화탐방의 시의적영험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상적으로야 평화적인 통일을 기원하며, 개인과 국가가 더욱 번영하고 번창하길 기대하지만, 우리 현실로 돌아오면 남과 북이 최상의 무기로 극한 대립을 하고 있고, 그 악몽이 잊혀 질 만하면 툭툭 사건이 하나씩 둘씩 불거지는 것이다. 그 중 서해바다 천안 함 피폭 사건은 아마도 21세기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지 않을까 싶다. 폐허가 되어 근골만 남은 철원 노동당사 역시 근대 피의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46년 초 철원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철원일대 일개 리 당 쌀 2백 가마와 강제 노동을 동원하여 그 해 말 완공하였다고 한다. 6.25발발 때까지 북괴의 전진기지였고, 38선 이북의 반공활동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 처형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철원노동당사는 말한다. 그 치열한 이데올로기 전쟁은 과연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그래서 지금 그들이 말하던 꿈의 사회주의 국가와 진정한 평화와 번영은 이루어졌는지, 검게 그을린 가슴과 앙상한 뼈를 들어내고 되묻는다.
답사이든 여행이든 떠난다는 것은 항상 설레 이고 어릴 적 소풍가는 느낌이 들어 좋다. 그것이 요즘 같은 가을철이라면 더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슴 아린 아픔의 回想이 채 가시기도 전에 멀리 민통선을 휘어 돌며 백마고지에 도착했다. 고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담한 작은 언덕에는 붉은 단풍이 지천으로 불타오르고, 화사한 가을날의 햇볕이 활엽수 가지마다 힘찬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이런 곳이라면 너른 철원평야를 발목이 시큰하도록 즈려 밟고, 농악대의 꽹과리 소리에 진한 농주 한잔, 花煎에 불콰하게 취하며 어깨춤에 가을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곳 아닌가. 그런데, 이 아담한 능선이 철의 삼각지 좌견부에 위치한 너무나 중요한 요충지여서 6.25전쟁 기간 내내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전쟁이 막바지로 돌입하고 휴전협상이 논의되던 1952년 9월부터 이 395미터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혈투가 절정에 달하였다고 한다. 마지막 10월 6일에서 15일까지 10일 동안에는 중공군 최정예 부대 제38군 3개 사단과 우리 군 제9보병사단 간의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밀고 밀리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져, 결국 우리 9사단이 대승을 거둠으로서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서게 된 것이다. 아군은 3,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중공군은 1만 명의 전사자 또는 포로를 내었으며, 쌍방 간 주고받은 포탄만 27만 4,954발이었다고 하니, 오, 인간 세상의 전쟁은 하느님의 인연과 업으로 보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해석하고 위로해야 할는지.
'여기 자유의 제단에 피의 제물이 되신 세 군신을 보라.
그들은 짧은 인생을 바쳐 조국과 함께 영원히 살았다.'
(노산 이은상, 추모의 시 중에서)
'풀 섶에 누워 그 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끓는 피로 용솟음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이 한 몸 초개같이 바치려 숨찬 목소리로 다 같이
강물을 헤치고 산을 부수며 달려오는 적들을 막았노라.'
(위령비, 모윤숙, 백마의 얼 중에서)
그래 그랬을 것이다. 해방된 기쁨도 잠시 조국은 백척간두 같은 이데올로기 끝에 매달려 전쟁에 시달렸고, 그 때 젊은이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갈망은 숭고 했으리라. 강제로 그어 놓았던 38선이 이제 막 붕괴되었고, 마음은 민족의 영산 백두로 치달리고 있었으리. 그 때 반도의 중심에 막무가내의 중공군이 몰려오는데, 저 작은 고지가 바로 내 심장일 진대 내 몸 뿐 아니라 누구의 몸이라도 바쳐서 막았을 터, 아 그렇게 지킨 조국의 60년 오늘, 아직도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네.
'2014년, 다시 백마고지에서' (박정래의 시)
백마는 봄볕에 붉게 타오르네.
하늘로 솟구친 님의 기상 가히 시대를 넘고
미처 깨닫지 못한 佛子의 하루
한 걸음 한 걸음
총성과 피로 얼룩진
그 苦行의 아픔이 가슴을 쥐어뜯네.
더듬어 숭고한 投身을 우러른다고 한들
되 살아 님의 모습 現身할 수 없겠지만
生과 死 윤회의 한 고리
그대와 우리는 이미 사자의 서
나란히 그 이름을 기록하네.
거룩한 주검을 기억하네.
정녕 가신님들 영혼에 물들어
오늘 다시 百尺竿頭 같은 세상
天馬로 부활하여 白頭로 달리고 싶네.
<그렇게 백마고지를 건너 彼岸에 이르다>
어둠을 헤치고 지름길로 달려 주신 베테랑 기사님도 사바하, 빵빵한 사운드에 노래 일발 장진 발사, 또 장진 발사도(백마고지에 추억의 백마강을 노래로 폭격하는가) 그렇게 동패동에 돌아오니 의미 있는 하루도 문화탐방에서 새로운 해법을 얻다.
이번 탐방, 특히 백마고지탐방에서 과거 ROTC장교로 GP, GOP 근무시절을 회상하며, 가슴 아팠던 군대에서의 추억을 회자정리를 하셨다는 말씀이다.
<2014. 10. 25일 일정>
10:00 동패동 교하도서관 출발
12:00 백마고지 역
백마고지 전적지, 기념촬영
월정리 역, 두루미 관
철원 역 터
13:00 철원 노동당사 탐방, 기념촬영
철원 평화전망대
철원 소이산
16:00 금강산 전기철도교량
17:00 고석정
17:30 승일교
18:40 교하도서관 도착
철원의 고석정(孤石亭)은 철원 최고의 명소라 할 수 있는 곳이다. 협곡이 많기로 유명한 한탄강변 중에도 최고의 협곡이 바로 이 고석정이다. 강 양쪽으로 깍아 지른 듯한 바위가 병풍처럼 서 있고, 그 입구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가히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이런 경관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경치임에 틀림없다. 고석정은 조선 명종 임금 때의 도적 임꺽정에 관련된 전설이 있다. 임꺽정이 이 큰 바위에 숨어 살다가 관군이 잡으러 오자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해 한탄강으로 뛰어들었다는 전설이다. 또 고석정은 현재 관광지로의 개발되어, 숙박시설, 음식점 등이 들어서 있고, 넓은 잔디공원과 놀이동산까지 갖추고 있다. 그리고 고석정 앞에 철의 삼각지 전적관이 있는데,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철의 삼각지 전투를 기념하는 기념관으로 당시 전투에 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또 철의 삼각지 전적 관에서는 철원의 비무장지대를 돌아보는 철의 삼각지 견학을 할 수 있다. 전적 관에서 신청을 하면 제2땅굴, 철의 삼각지 전망대, 월정리 역, 백마고지 등을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비무장지대 여행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석정 옆의 철원온천관광호텔에서 온천을 즐길 수도 있다.
철원의 노동당사는 남한의 북단인 철원에서도 최북단인 민통선 바로 앞에 자리 잡은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는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 그때 북한에서 지어놓은 노동당사 건물이 바로 이 건물이다. 그러나 전쟁 후에 이 땅이 수복됨으로써 남한에 속하게 되었다.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전쟁의 상흔을 크게 입었다. 지붕은 없어지고, 기둥부터 벽 곳곳에 총탄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원래 이 지역이 철원의 중심지였는데, 전쟁 때 철저히 파괴되어 전쟁 후 삼부연 폭포 앞에 신 철원을 건설했을 정도이니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노동당사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었는데, 서태지 씨가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또 열린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린 후로 세인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노동 당사를 돌아보는 것만큼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기 좋은 곳도 드물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서북쪽12㎞지점에 위치한 해발 395m의 고지로, 한국전쟁(6ㆍ25전쟁)의 전적지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는 야산으로, 한국전쟁 당시'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던 395고지를 지칭한다. '백마고지(白馬高地)'란 막대한 양의 포격으로 인해 나무가 모두 없어진 고지의 모습을 두고, 백마(白馬)가 누워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 : 철원ㆍ평강ㆍ김화)'에 속했던 철원은 2억 평(약 661㎢)에 달하는 철원평야를 비롯해, 병참선이었던 3번국도 및 경원선 철로를 확보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로 인해 1951년 7월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유리한 지형을 차지할 목적으로 UN군과 공산군의 잦은 충돌이 발생했다. 미 9군단에 배속돼 있던 국군 9사단은 1951년 10월부터 철원 일대에 투입, 백마고지와 철원평야까지 방어하고 있었다. 마침내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전개된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 9사단은 중공군 최정예 38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약 10일간 12차례의 전투로 고지 점령과 탈환을 24회나 번복한 끝에 백마고지를 사수하였다. 국군 9사단은 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지휘 아래 국군 1포병단의 화력 지원을 받아 21만 9954발의 포격을, UN 공군의 항공기가 754회 지원 출격하여 폭격을 가했다. 이에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은 5만 5000발을 포격하여 백마고지에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이로써 중공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으며, 국군도 전사 818명과 부상 2498명 등의 피해를 입었다. 이때부터 국군 9사단을 백마부대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편 2012년 11월 20일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가 휴전 이후 단절됐던 경원선 신탄리에서 철원 간 5.6km 구간의 철도 복원사업을 마무리하여 경원선 백마고지역이 개통되기도 했다.
백마고지 전적비 철원군 북방에 있는 이 백마고지는 6.25동란 당시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10일 동안에 걸쳐 대 혈전이 계속되었던 백마고지 전투는 피아의 포탄낙하가 30만발이 작렬했고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만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어 2개 사단이 완전 와해되고 말았으며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이라 명명되었다.
흙먼지와 시체가 뒤엉켜 악취가 코를 찔렀으며 피아간의 포격으로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형상과 같다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철원 평화 전망대는 인근의 철의 삼각전망대 앞으로 나무들이 우거지면서 제 기능을 잃어 2007년 준공되었다.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의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제2땅굴과 군 막사, 검문소를 재현한 전시물과 비무장지대 사진 등이 갖춰져 있으며, 50인승 규모의 모노레일이 설치돼 관광객들이 쉽게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태봉국의 옛 성터와 철원 평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쌍안경을 통해 북한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 안보관광코스
고석정(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 →제2땅굴 → 철원평화전망대 → 철원 두루미 관 → 월정 역 → 노동당사 (3시간 소요)
月井里 驛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에 있는 기차역이다.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졌던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다. 신탄리역 다음 역으로, 남방한계선에 근접한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폐역 상태다. 6·25전쟁 당시 월정리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잔해 일부분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 진 인민군의 화물열차 골격이 보존되어 있다. 그 앞에는‘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현재의 역사건물은 철원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복원된 것이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에 위치해 있다.
金剛山 電氣鐵道橋梁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도창리(道昌里)에 있는 교량이다.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전력공사 소유이며 철원군수가 관리한다. 1926년에 건립한 금강산 전기철도용 교량이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1919년 착공하여 1931년 철원~내금강을 잇는 116.6㎞가 개통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지하자원 수탈에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금강산 관광용으로 운행되면서 강원도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6·25전쟁 때는 북한군에 의해 군수물자수송에 이용되었으며 이후 휴전선이 생기면서 철도의 사용이 중지되었다. 교량은 2007년 관광자원화를 위해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균열된 교대와 썩은 상판 등의 전면 보수작업을 거쳐 공개했다. 남북분단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국 근·현대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구조물이다.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도창리에 있다.
철원 역 터는 노동당사의 좌측에 연접해 있었는데 1936년 당시에는 34명의 경찰병력을 갖고 있으면서 철원 역 파출소에는 4명의 별도 경비원을 배치했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소련군 주둔 사령부로 사용되었으며, 6·25전란 당시 공산당은 이 건물 지하실에서 수많은 양민과 반공투사들을 고문·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곳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란으로 건물은 완전 파괴되어 현재는 건물터 일부만 남아 있다.
철원소이산은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으로 길 숲섬이라고도 불리우며 텃밭이 딸린 집터를 60년쯤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흙먼지 날리던 학교 운동장은 그 기간 동안 어떻게 바뀔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가면 그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화한 뒤 군사목적으로 매설한 지뢰가 사람의 간섭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2011년 6월 7일 사요리 산 1번지가 주소인 소이산(해발 362m)을 찾았다. 북한이 1946년 지은 3층짜리 건물인 노동당사 건너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이다. 산을 희게 물들이고 있는 아까시 나무 꽃을 따라온 양봉가의 벌통이 널려 있었다. 소이산은 민통선 밖에 있지만 주요한 군사시설이 많아 출입이 통제되어 왔다. 전쟁으로 교란된 읍내 야산이 반세기 동안 스스로 변화해 온 모습이 간직돼 있다. 소이산 전경, 해발 362m의 낮은 산이지만 철원평야의 조망점이다. 일제 때 사방림과 연료림으로 많이 심은 아까시 나무가 아직도 숲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길가에 무리지어 돋아난 외래종이자 생태교란종인 단풍 잎 돼지 풀은 이곳에 오랫동안 군사기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곳은 외래종인 아까시 나무가 향토수종에 앞서 황폐한 땅을 선점한 이후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나갈지를 생태사회학적으로 연구할 최적지”라고 말했다. 산 중턱 이후부터는 아까시 나무가 줄고 생강나무, 갈참나무, 때죽 나무 등 토종 나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대로 놔두면 아까시 나무가 산을 점령할 것이란 우려는 근거가 없음이 드러난다. 소이산 정상에 오르자 눈앞이 확 틔었다. 주변과 표고차가 200여m 밖에 안 되지만 1,000m급 고산에 오른 느낌이 들었다. 널찍한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그리고 그 건너 북한의 평강고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산이 없었다면 전쟁 때 철원평야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실감 났다. 소이산은 철원평야 논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이다. 철원평야를 한눈에 굽어보는 가치 때문에 이곳엔 고려 때부터 봉수대가 설치돼 함경도 경흥에서 서울로 연결되던 경흥선 봉수로에 속해 있었다.
사요리는 옛 철원읍의 중심지로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과 금강산 전철이 다녀 관광객이 북적이던 곳이었다. <철원군지>에 실린 1930년 소이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산 밑에까지 크고 작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박정용 철원문화원 문화 해설 사는“해방 때 철원읍 인구는8만이었고 은행 2개와 여고, 도립병원도 있었는데 현재 철원읍 인구는 그 절반 가까운 4만 7,000명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농산물검사소 등 과거의 주요 건물은 근대문화유적으로 남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철원에 평화도시가 조성된다면 소이산은 그 조망 점으로서 서울의 남산과 같은 구실을 할 것”이라며 “평화의 숲이자 도시의 산림공원으로서 보전하고 개발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생명의 숲’이 2006년 소이산을 ‘천년의 숲’수상지로 선정한 것도 ‘평화의 숲’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서였다.
소이산의 북쪽 산자락은 모두 지뢰지대이다. 노동당사에서 국도 87호선을 따라 대마리로 향하는 길 양쪽은 옛 철원의 시가지였지만 지난60여 년 동안 지뢰통제구역으로 묶였다. 그동안 묵은 논은 습지로, 묵밭과 집터는 숲으로 바뀌었다. “지뢰지대 안에 고사리와 고라니가 많지만 폭발사고가 나 사람들이 들어가길 꺼린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곳에 대한 생태조사도 이뤄진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소이산의 생태적 가치는 훼손이 심한 산 위보다 산자락의 지뢰지대가 높을 것으로 본다. 도로를 따라 지뢰지대를 보면 아까시 나무, 버드나무, 신나무와 함께 마을에서 심어 기르던 호두나무, 뽕나무 등도 눈에 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서울의 평지 숲의 원형이 여기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지뢰지대 안의 숲 모습, 평지여서 과거 논이거나 집터였을 것이다. 소이산 건너편의 지뢰지대는 넓은 초지를 키 큰 포플러와 아까시 나무가 둘러싼 모습이 독특하다. 해방 때 2,600여 명의 졸업생을 냈던 철원공립보통학교 터이다. 운동장은 초원이 됐고 귀퉁이는 고랭이, 부들 등이 자라는 습지가 됐다. 온대지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의 간섭이 중단된 채 생태계의 천이와 복원이 이뤄진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러나 이곳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소규모 지뢰지대여서 인접한 도로와 군부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란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쟁의 유물인 지뢰밭이 지킨 숲의 가치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민통선지역인 백암산에서 희귀한 사향노루서식지가 발견된 것처럼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민통선 인근 지역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생태적 가치가 발견될 잠재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철원 承日橋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東松邑)장흥4리(長興四里)와 갈말읍(葛末邑) 문혜리(文惠里)를 잇는 다리이다.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강원도 소유이며 철원군수가 관리한다. 총 길이120m, 높이35m, 너비8m로, '한국의 콰이 강의 다리'라고도 한다. 1948년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에서 공사를 시작하였다가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휴전이 성립되어 한국 땅이 되자, 1958년 12월 한국 정부에서 완성하였다. 결과적으로 기초 공사와 교각 공사는 북한이, 상판 공사 및 마무리 공사는 한국이 한 남북합작의 다리인 셈이다. 3개의 교각 위에 아치형을 이루고 있는 다리로, 처음 북한 쪽에서 지을 때에는 구소련의 유럽 공법이 도입되었으나, 뒤에 한국 측에서 지을 때에는 그와는 다른 공법으로 완성되었다. 처음의 북한 설계자는 진남포제련소의 굴뚝을 설계한 김명여라고 한다. 콘크리트 다리로서 시공자와 완성자가 다른 까닭에 양쪽의 아치 모양 또한 약간 다른데, 북한 쪽에서 먼저 지은 다리는 둥글고, 한국 측에서 지은 것은 둥근 네모 형태를 띠고 있다. 명칭에 대해서는 김일성(金日成)시절에 만들기 시작해서 이승만(李承晩)시절에 완성했다고 해서 이승만의‘승(承)’자와 김일성의‘일(日)’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과6·25전쟁 때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중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박승일(朴昇日)대령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는 후자의 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강원도철원군동송읍장흥 4리 갈말읍 문혜리 읍 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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