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길 위의 인문학」사업 성황리에 마무리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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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운 14-11-03 16:32 조회720회 2014.11.03본문
동해시립북삼도서관 강 성 운
도서관「길 위의 인문학」사업을 신청하며... |
올해 3월경 2014년 도서관「길 위의 인문학」운영 사업의 공문을 접수한 후,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도전해 보고자 마음먹고, 원활한 사업추진을 위해 들뜬 기분으로 4월 3일 개최된 사업설명회에 참석하였다.
전국의 많은 도서관 담당자들이 참석하여 사업운영에 대해 열띤 질의응답으로 진행되어 관심이 많은 사업이라 생각되었고 그동안 탐방지와 주제에 관해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던 주제로, 출장을 다녀온 후 바로 구체적인 사업계획 구상에 들어갔다.
또한, 지원신청에 관한 궁금한 사항이나 의문점은 도서관협회 담당자에게 묻고 또 묻고 꼭 사업에 선정되기만 바라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준비해 나갔다.
어느덧 사업계획이 마무리되고 지원신청서를 작성하여??억압에 저항한 인간의 비극적 생애??,??전설의 바닷길을 찾아서??,??관동팔경의 가치와 문학 ??이란 세가지 주제로 강사를 사전에 선정하여 도서관협회에 제출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수험생 마냥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드디어 4월18일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운영 지원관으로부터 최종선정 되었다는 결과를 통보받고 세가지 주제에 대한 세부운영계획서를 수립하여 지휘부에 결재를 득한 후 홈페이지(동해시청, 동해시립도서관)와 주요 일간지에 수강생 모집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를 진행하고, 2개 시립도서관과 3개 작은도서관에는 홍보용 배너를 설치하여 수강생 모집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 결과 접수 마감일 전에 선착순으로 40여명을 모집하여 강연4회와 탐방4회의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1. 주제 : 허균과 허난설헌을 찾아서 |
이어진 탐방은 강릉 사천면 사천진리의 소나무 숲 속에 위치한 교산시비를 찾았다. 교산시비는 허균의 생가이자 외가인 애월당 뒤 언덕에 세워진 것인데, 애월당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생가의 흔적도 1983년 한국시가문학비동우회에서 세운 교산비 뒷면의 설명에 의지할 따름이다. 이 시비에는「허균의 누실명」이라는 시(반 항아리 차를 거우르고 한 잡음 향피우고 외딴집에 누워 견곤고금을 가늠하노니 사람들은 누실이라 하여 살지 못하려니 하건만 나에게는 신선의 세계인져 - 김동욱 번역)가 새겨져 있다. 교산시비가 세워진 야산은 용이 되지 못한 뱀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교산이라고 불려진다. 이곳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고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교산시비를 둘러보고 초당에 있는 순두부 맛집을 찾아 점심을 먹은 후, 주 탐방지인 허균ㆍ허난설헌 기념관을 찾았다. 공간은 작지만 허균ㆍ허난설헌의 일대기와 그들의 작품들을 잘 정리해 놓은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나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천재적인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이 태어나고 자라던 허난설헌 생가를 방문하였다. 허난설헌은 강릉의 명문가에서 둘째딸로 태어나 15세의 어린나이에 결혼했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식마저 일찍 떠나 보냈으며 동생 허균마저 역모로 몰리는 등 외롭고 고독한 생을 살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인물이다. 허난설헌의 생가는 넓은 정원과 집 전체가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전형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생가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조용히 거닐면서 산책과 명상을 함께 할 수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장소였다. 김남극 시인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에게 다소 생소했던 허균과 허난설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느끼게 되어 다소 짧은 시간의 탐방이었지만 보고 들은 많은 것을 잊지 못할 것 같다.
2. 주제 : 전설의 바닷길을 찾아서... |
두번째 강연는 5월31일(토) 오전9시부터 ‘전설의 바닷길을 찾아서’란 주제로 이승철 한중대 교수의 강의로 진행되었다. 동해안 어촌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동해안 어촌의 바닷길을 따라 구비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를 찾아 이러한 이야기가 어떻게 마을 공동체의 삶에 투영되고 있는지, 마을 사람들과의 상관성을 살펴보는 강의로 진지한 수업이 이루어 졌으며 전승되고 있는 설화에 대하여 직접 탐방에 나섰다.
첫 탐방지인 동해안 쪽빛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지고 송림으로 둘러쌓인 강릉 해랑당(안인진 소재)앞에서 강사의 진지한 설명이 이어졌다. 옛날, 동쪽바닷가 안인진 어촌에 한 어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과년한 딸 하나가 있었다. 그 처녀가 어느날 바닷가에 나갔다가 한 아름다운 청년을 본 후에 그 처녀는 날이 갈수록 그 청년을 그리워하는 사모의 정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처녀는 바닷가에서 일하고 있는 그 청년에게 청혼을 하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하지만, 이튿날 처녀가 갔을 때 청년은 벌써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향하여 떠나고 있었다. 그런 후로는 그 청년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자 과년한 처녀는 병들어 죽고 말았다. 그 처녀가 죽은 후 이 어촌에는 큰 야단이 났으니 그것은 고기가 조금도 잡히지 않고 재앙이 많은 것이었다. 어느 날 그 어촌 사람들의 꿈에 그 처녀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시집 한 번 가보지 못하여 이렇게 원혼이 되었소. 내일부터라도 이 마을 높은 곳에다 나를 위하여 사당을 짓고 남자의 남근을 만들어 걸어 주시오. 그러면 고기도 많이 잡히게 될 것이오”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어촌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여 꿈에 그 처녀가 말하던 대로 사당을 짓고 오리목나무로 남자의 남근을 만들어 걸어 빌었더니, 그 이튿날부터 고기가 많이 잡히므로 어촌 사람들이 그 후로는 그것을 많이 만들어 걸게 되었다는 설명을 마친 후. 다음 탐방장소인 심곡마을 서낭당(강릉시 심곡소재)으로 향하였다. 서낭당에서는 여서낭 세 분이 모셔져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바닷가에 나가 보라고 해서 나가 보았더니 여서낭 세분이 그려진 그림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낭당을 짓고 거기에 모시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그림의 색깔이 변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서낭신이 몹시 영험이 있다고 믿어 왔으며, 마을에 중대한 일이 있으면 꼭 가서 고한다는 해설을 마치고, 동해시 노고바위 설화(동해시 어달동 소재)탐방을 위해 차에 올랐다.
옛날 이 고장 바닷가 노봉 마을에는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처녀는 늙은 노부모를 모시고 살았으며, 부모를 모시는데 지극정성을 다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효녀라고 칭찬이 자자 했다. 처녀에 대한 소문은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졌고, 마침내 이 소문을 동해바다에 살고 있는 용왕님도 듣게 되었다. 하루는 동해바다 용왕이 육지로 나와서 이 처녀를 만났는데 처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마음씨에 매료되어 매일같이 이 곳 바닷가에서 남몰래 처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점점 깊어져 가던 어느 날, 용왕이 처녀를 용궁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처녀의 손을 잡고 동해바다로 들어갔는데, 이 광경을 본 노부부는 처녀가 용궁으로 가지 못하게 처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벼락이 쳐서 노부부는 바위로 변했고 처녀는 동해용왕과 함께 용궁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그 후 이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처녀의 부모가 바위로 변한 노고바위에 와서 동해용왕님께 제사를 지냈으며, 특히 가뭄이 들면 인근 마을에서까지 이곳에 와서 소를 잡아 큰 제례를 지냈다고 전한다. 이 전설이 전해오는 노고바위는 현재 대진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500m지점의 해변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 고장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나 모르고 있던 전승되는 설화를 체험한 좋은 기회를 가진 후, 다음 행선지인 삼척 해신당 공원으로 출발 하였다.
마지막 탐방지인 해신당 공원에 도착하여 주위의 바다경치를 구경하고 난 후 애바위 설화에 대해 강사의 해설이 이어졌다.
이 마을에 사는 처녀 총각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처녀는 매일 바다에 나가서 해초를 뜯어 왔는데 그 때마다 총각이 뗏목으로 애바위까지 태워주곤 하였다. 총각이 육지에 돌아와 있는 동안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가 거세게 일어나 처녀가 휩싸여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바위를 애바위라고 하는데 이후에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마을 어부의 꿈에 처녀 귀신이 바다 속에서 나타나기에 그 곳에 가니 처녀의 시체가 물에 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육지에서 장사를 지내 주었더니 풍어가 되었다고 한다. 처녀의 시체를 건진 해변가 근처에 향나무가 있으므로 이 나무에 처녀신을 모셔 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다가 해신당을 짓고 제사를 올렸다. 처녀의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 처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남자가 필요하므로 남자의 상징인 남근을 깍아 바치는 것이 중요한 의례가 되었다는 해설을 끝으로 일정도 마무리 되었다.
3. 주제 : 관동팔경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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