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왕릉에서의 하루> 길 위의 인문학 / 서수원 도서관 - 영릉, 신륵사 (201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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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영 14-10-28 21:25 조회788회 2014.10.28본문
여주에 위치한 세종대왕릉인 영릉.
태풍 너구리가 서서히 물러나면서 강렬한 태양빛이 아침부터 작렬하던 오늘 7월 10일, 세종대왕릉인
영릉과 능침사찰인 신륵사에 다녀왔습니다. 서수원 도서관의 인문학 프로그램인 <역사의 숨결을 따라 걷다>에 신청한 덕분이지요. 왕릉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해오신 정해득 한신대 교수님과 서수원 도서관 윤경아, 김봉순 사서선생님과 이 프로그램에 신청하신 분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서수원 도서관의 길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은 강의-답사-글쓰기-북아트로 이뤄집니다.
사실 전 답사를 가기 전에는 왕릉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조선왕릉이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것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고 왕릉은 그저 내가 어렸을 때 놀러가서 미끄럼을 타던 곳, (당시 동구릉에선 미끄럼을 탈 수 있었거든요) 왕과 왕릉은 왕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시대의 유산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제 7월 9일 정해득 한신대 교수님 강의를 듣고 나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영릉을 설명하시기 전에 교수님은 조선시대 제사 제도에 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왕이 돌아가셨을 때 3년 상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27개월간 상을 치른다는 것, 장례식은 높은 관직의 사람은 3개월, 왕은 5개월간 치른다는 것, 그 이유는 일일이 지인들에게 인편으로 부고장을 보내고 부고장을 받고도 못 오는 사람들에게는 제문을 받아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 장례 기간에 석물을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효자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장례식장에서의 상주 모습과 산소였다는 것, 조선 왕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릉이 많은데 이는 고려사회의 최소 사회 구성원이 개인이라면 조선 시대 최소 사회구성원은 부부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수님 설명을 들으니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의 여성의 권위는 많이 낮아졌다고 알던 제 상식이 식민사관의 잔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세조가 왕릉 제도를 석실에서 회격으로 바꾸고 사대석(병풍석)까지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내리자 예종이 실천하면서 공사비와 사망자가 확연히 줄었다고 합니다. 왕릉을 만드는데 이리 막대한 돈이 들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돌에 깔려 죽었다는 것은 알면서 조선 왕릉 건립에 대해선 이리 무지했다는 것이 좀 창피했습니다. 문화유산으로서 왕릉을 보면 사회적 함의가 크다는 교수님 말씀이 조금씩 이해가 갔습니다. 툭툭 질문도 하시고 조근조근 답해주시던 정해득 교수님의 이야기에 금방 푹 빠져들었고 내심 답사가 너무나 기대되었습니다.
답사를 맡아주신 한신대 정해득 교수님. 왕릉을 공부하신 교수님의 강의 덕분에 답사가 더욱 풍성하고 깊이가 있었다.
드디어 답사 날! 세종대왕릉인 영릉에 도착해서 영릉 앞 재실 툇마루에서 교수님의 첫 번째 설명이 이뤄졌습니다. 무덤에 안치하기 전 5개월간 시신을 두는 곳은 궁궐 한 곳으로 이를 빈전으로 부른다는 것, 왕은 빈전 앞 움막에서 5개월간 지낸다는 것, 5개월 후에는 왕릉에 안치하고 왕실의 친척 1명과 왕을 모셨던 내관을 왕릉에 파견하여 22개월간 살게 한다는 것, 22개월 후에는 친척과 내관은 다시 복귀하고 능참봉 1명과 능관 1명이 맞교대로 근무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또한 왕릉 주변에 사는 사람들 중 적게는 80명 많게는 130명이 동원돼 왕릉 일을 한다는 것, 왕릉은 20~30만평의 땅에서 나온 소출로 살림을 꾸려간다는 것, 일년에 왕릉에서는 많으면 8번, 적으면 5번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은 80여 차례 제사를 지냈다는 것(위로 선왕들이 많아서 고종은 정말 힘들었을듯 싶어요) 현재 영릉의 재실은 마구간이 없고 우물이 없으니 잘못 지었다는 것, 제대로 잘 보존된 왕릉을 보려면 광릉(세조의 왕릉)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강의해주셨습니다.
영릉
영릉 정자각
책과 팜플렛에서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아가는 기쁨은 간간히 더위도 잊게 해줄 정도였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장정 丁(정) 모양인 정자각의 특징, 세종대왕릉인 영릉 비석이 영조 때 세워진 비화, 능을 지키는 석호(충을 상징), 석양( 효를 상징)의 의미, 불교와 유교 문화가 남아있는 석상, 불교와 유교가 공존함을 증명하는 장명등에서 제도는 중국 왕릉에서 가져왔지만 우리 식으로 해석해서 바꿔 썼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에는 맛집 탐방도 빼놓을 수 없지요. 미리 사서 선생님이 예약해놓은 메뉴는 연잎밥이었습니다. 약초 꾼의 집 대장금의 연입밥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연잎 향이 골고루 배인 밥에는 몸에 좋은 견과류와 작두콩, 대추가 들어있었고 간이 딱 맞는 정갈한 나물 반찬들과 칼칼하면서도 맛있는 우거지국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 입맛을 돋우었습니다. 나중에 가족들과 함께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 집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두 번째 장소인 여주 신륵사로 이동했습니다. 극락보전 앞에 자리한, 남한강을 바라보는 정자에서 정해득 교수님의 강의는 이어졌습니다. 신륵사는 왕릉 옆에서 왕실의 발복을 비는 능침사찰이었다고 합니다. 왕릉에서 유교식으로 제를 지낼 때, 절에서는 불교식으로 제를 지냈고 특히 신륵사에선 세종대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륵사 대웅전은 이름이 극락보전이었고 또한 이곳은 1380년에 나옹화상이 회암사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잠시 들른 신륵사에서 죽음을 맞았기에 나옹화상을 기념하는 사찰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나옹화상의 진신사리를 모신 보제전자석종(부도)),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보제전자 석등, 나옹화상의 이야기가 적힌 보제전자석비는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신륵사 대웅전의 이름은 극락보전
?신륵사 정자에 앉아 내려다본 남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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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중간에 잠시 정자에 앉아 남한강 자락을 내려다보는데 그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예전에도 강물은 그대로 흘렀을 것이고 신륵사에 들렀던 나옹화상도 나처럼 바라보았으려니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고즈넉이 울리는 풍경 소리,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 유유히 흘러가는 황포돛배.... 잠시 엄마와 부인과 딸이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로서 가졌던 시간이 어찌나 좋던지요.
영릉과 신륵사 답사를 마치고 돌아 오면서 참 좋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아래 다니느라 몸은 살짝 고단했지만 머리에는 새로운 지식이, 마음에는 활력이 가득 충전되었거든요. 동행해준 이은영님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이런 시간을 마련해주시고 모든 사람들이 답사에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신경 많이 써주신 서수원 도서관의 윤경아, 김봉순 사서 선생님께 감사 드리고요, 강의와 답사를 맡아서 너무나 재미있는 강의를 해주신 정해득 선생님께도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뜻 깊은 시간이었던 서수원 도서관의 길위의 인문학! 앞으로도 이런 프로그램이 주욱~ 계속~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