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립도서관]길위의 인문학 - 우리고장의 인문적 정체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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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구 13-09-26 21:00 조회1,950회 2013.09.26본문
원주, '왕비의 고장'
지난 9월 13일 원주는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긴 하지만 탐방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기에 취소가 되지 않는 한 떠나야 했다.
우산을 안쓰고 우비를 걸쳤다. 약간의 중식을 지참하고 집을 나섰다. 전 따뚜경기장
주차장에 집결하여 전세버스로 출발하였다.
출발한 인원은 남녀 포함 30여명쯤 되고 오늘 안내할 원주시립도서관 김해영님이 동승
하여 작가 선생님은 현장에 미리 가있다고 한다.
30여분을 빗속을 달려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이며 의민공
(懿民公) 김제남(金悌男) 고택에 도착을 했다. 지금은 15대 후손 김일주(金一柱)가
살고 있다.
15대 후손 김일주와 그의 부인이며 15대 종부 김가련(金佳蓮) 여사
명문 사대부의 종부가 외국 여자라는 것이 특이했다. 가련 여사의 미국명은 카렌 이며,
미국 오하이주 의 조그만 도시가 고향이라고 한다. 이들의 로맨스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고 의민공 김제남의 둘째딸이 선조 임금의 후비로 간택되니 이분이 바로 인목왕후
또는 인목대비가 된다. 영창대군을 비롯해 공주등을 났으나 선조의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질곡을 겪는 비운의 왕비가 된다.
공빈 김씨(이분도 원주 출신이다)가 낳은 광해를 세자로 책봉을 했다가 인목왕후가 영창
대군을 낳자 선조의 마음이 변해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광해를 왕으
로 삼으려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소북파의 싸움이 결국은 피바람을 일으
키는 권력싸움으로 번져 선조가 죽자 광해가 왕이 되면서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고 영창
대군은 강화도로 귀양을 보내 증살(쪄 죽임)을 시키고 일족을 멸했으나 김제남의 손자 둘이
난을 피해 살아 남으면서 현재까지 연암 김씨 일족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한다.
연흥부원군 김제남 고택과 의민공사를 둘러 탐방하는 탐방단
홍인희 작가에게 설명을 듣는 탐방단들
의민공사(懿民公祀)를 둘러보는 탐방단들
영화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를 보면 인목대비가 상당히 표독한 여인으로 나오고 허균
이 도승지로 나오는데 인목대비가 그렇게 표독한 여인이 못 되며 광해가 왕위에 오르도록
어쇄를 찍어준 이가 인목대비이며 광해 때 허균이 병조판서를 했을 망정 도승지는 한 사실
이 없으므로 이는 역사를 왜곡하였음이다. 도승지는 지금으로 말하면 비서실장이며 승지는
비서 판서는 장관직임을 모두 아는 사실이니 사극을 쓰는 작가들이나 제작진의 시청율을 의
식하여 흥미위주로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연흥부원군 김제남 묘소 앞에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홍인희 작가
특이하게도 상석이 여느 상석과 빛깔이 다르다. 현석(玄石)이다. 즉 까만색이다.
상석을 다른 상석과 같이 일반 대리석을 썼으나 질곡의 세월을 보내느라 속이타
까맣게 된 게 아닐까 라고 홍작가님은 말씀하시며 쓸쓸한 미소를 지우시는 표정에서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었다.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의 합수머리 옜날 흥원창으로 번창하던 곳
다산 정약용은 강폭이 넓은 곳을 은섬포라 명명하며 그 경치를
찬탄하였다 함.
위의 사진에서 보면 오른쪽에서 섬강이 흘러들어 남한강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간다.
앞에 넓은 강물을 다산 정약용은 은섬포(銀蟾浦)라 일컬으며 경치를 찬탄했다하며 섬(蟾)은
두꺼비 섬 자로 중국에서는 달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두꺼비 섬자를 달로 상징하는 데는
월궁항아(月宮姮娥)라는 전설이 있으나 그 전설을 여기서 다 풀 수는 없으나 아름다움을 뜻
한다해서 궁녀들을 항아님으로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하니 다산 정약용이 처가인
원주 부론을 드나들며 보던 흥원창 경치가 월궁항아 모양 아름다워 은섬포라 칭했으며 강원
도 관찰사로 부임하던 정철도 얼마나 경치가 아름다웠으면 "한수를 돌아드니 섬강이 어드메
뇨 치악이 여긔로다"라 했을까.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에 있는 느티나무 단종 유배길에 쉬었다 함.
남한강을 건너면 바로 닿는 충북 충주시 앙성면이 코앞에 있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에는
수령이 600년된 느티나무가 하나 서있다. 이 느티나무에는 단종에 얽힌 애사(哀史) 한토막
이 있으니 이는 수양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월로 유배를 떠나는 단종은 한강에서 배를
타고 이포 나루에서 육로로 양평을 지나 강원도 땅으로 들어 서며 뜨거운 6월을 맞는다.
부론땅으로 들어서며 뜨거운 날씨와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하였으나 형졸들은 물을 주지않
는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눈물겨웠으며 얼마나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을까 형졸들도 덥고 목
마르기는 마찬가지, 길가 느티나무 밑에 가마를 세우고 잠시 쉬어가는데 단종이 나무밑에
나와 앉자 마을 노인네들이 몰려와 부복하며 대성통곡을 하는데 어린 단종이 물을 달라고
하자 깨끗한 물을 길어 바치니 단종은 물을 마치 꿀인듯 마셨다 한다. 이때는 형졸들도 모
른척 외면했다고 한다. 느티나무는 페교된 단강초교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교되어 더욱
쓸쓸해 보인다.
손곡 이달의시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서 태어난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출생과 함께 신분이 정해지던 시
절, 이달은 양반인 아버지 이수함(李秀咸)과 홍주 관기 사이에 서출로 태어났다 한다.
서출은 과거도 볼 수 없었던 시절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며 김삿갓 모양 방랑의 길을
떠 다니다가 죽은 문장가이며 시인이다.
허균의 형 허봉과 동문수학한 막역한 사이였던 이달은 허봉으로부터 그의 동생 허균과 허난
설헌의 교육을 맡게 된다. 후일 허균의 "홍길동전"은 모티브가 이달이었다는 설이 분분하다.
임경업 장군 추모비
임경업 장군도 부론 손곡리 출신이며 어려서 병정놀이하다가 잘못해서 친구를 죽이는 바람
에 충주로 피신하여 살다가 세월이 흘러 다시 손곡리로 돌아와 살았다고 하는데 임경업 장
군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생략하여 끝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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