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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수원도서관[철학의 눈, 미술] 철학적 관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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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 19-06-30 19:57 조회308회 20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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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제 강사님의 강의는 기본적으로 fine art 작품을 철학의 눈으로 관찰하고 작가의 고뇌와 숨겨진 철학적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때문에 미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강의가 시작되지만 어느새 하이데거, 샤르트르 소크라테스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철학이론으로 넘어 가면서 심도 있는 철학사상에 접근했다가 조금 어려워질 듯 한 순간에 다시 미술작품의 주제로 돌아오는 아주 멋진 강의력을 발휘하신다. 매 강의마다 기존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개념을 제시하셔서 매번 새로운 사고에 대한 충격을 받는다. 다만 나의 철학적 기초 지식이 부족해서 강사님의 깊은 철학적 개념과 사고를 다 못 받아들이는 것이 매번 아쉽기만 하다. 
이번 강의는 에곤 쉴레의 [죽음과 소녀], 피카소의[게르니카], 하르멘 스텐비크의 [죽음의 알레고리] 등의 작품을 통해 ‘죽음‘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확장시키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물학적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경험해서 알 수 도 없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극도의 불안감을 야기하고 불안감을 극복하기위해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이기에 인간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총동원하여 내세의 개념을 만들고 현세의 자아가 내세로 이어져 현세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편하게 살기를 바란다.
강사님은 철학적 관점으로 죽음을 생물학적 죽음 외에 사회적 죽음과 인격적 죽음으로 확대하셨다.
사회적 죽음은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가치가 빛을 발하고 인정을 받으려는 사회적 생명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인격적 죽음이란 공조와 공향유를 지향하는 문화적 생명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적, 인격적 생명 모두 ‘차별’을 기본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 차별의 주체는 자신을 남과 차별하면서 자신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한다. 단순히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이용한 차별을 넘어 극심한 차별은 당하는 자를 사회적으로 죽음으로 몰아가고 심각하게는 생물학적 죽음의 상황을 야기하기도 한다.
때문에 ‘차별’과 사회적 죽음을 동일 시 할 수 있다는 강의에 ‘차별’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면서 나의 개념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내 사고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인간들은 생물학적인 죽음 외에도 사회적, 인격적 죽음조차 아예 없앨 수도 없고 피할 수 도 없다. 이에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방법은 ‘불멸’이라고 하셨다.
불멸이란 산자들이 죽은자의 삶의 업적이나, 그들이 남긴 작품들의 가치를 평가해서 영원히 기리는 것이다. 즉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 문화적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어떤 삶으로 불멸의 생명을 얻을 것인가?
강사님은 “서로가 서로를 통해서 불멸의 ‘무엇인가’를 만들고 주고 받으며 불멸의 공동성으로 죽음을 넘어 설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불멸의 ‘무엇인가’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우주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개념이라 했다. 그렇다면 양심에 따라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름다움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양심에 따라 사는 삶은 적어도 타자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런 삶이 서로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면 그 또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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