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속에 깃든 울산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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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남구도산도서관 19-06-23 15:50 조회420회 2019.06.23본문
2019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제 1차 (주제: 기녀의 삶, 저항의 삶, 자란) 강연 참여 후기- 박성학님 후기입니다.
제목: 300년 전 女人 자란(紫鸞)을 만나
자란(紫鸞), 춘향전의 실제모델 (충북대 이수봉 명예교수 주장) 울산 출신 열녀라고 하는데, 춘향은 골백번도 더 들어 보았으나 자란은 금시초문이다. 예쁘고 흔치않은 이름을 가진 300여 년 전 여인에 대해 어찌 호기심을 놓아버리겠는가?
조선 영조 때 「상체헌집」에 “기녀로 정절을 지키다 자살 했다”고 수록되어있다. 한걸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란(일명 자앵)은 영조3년(1727년) 12월 30일 울산 부(蔚山府) 아전 심대연과 부기(관기) 초경의 딸로 태어나 영조20년(1744년) 6월 14일 18세의 나이로 수절하게 된다.
3년 전 (15세 때) 울산도호부사 윤면의 애첩으로 경기도 이천으로 전근된 윤면을 따라 갔다가 신임부사 정광운이 돌아오라고 명했는데 불복하자 부모를 옥에 가두기에 이르렀다. 어쩔 도리가 없게 된 자란이 울산으로 돌아오자 부모를 석방 (1744년 5월 5일) 하였고, 부사의 거듭된 수청을 거부하다 마침내 6월 14일 “나 죽게 되면 천리 밖에 있는 윤공 묘에 부장하고, 나의 수식의물을 팔아 장비로 쓰고 남은 의 패는 윤공가에 보내주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다. 까지가 일반적 상식이다.
제 1강 〈자란전〉에 대한 문헌적 접근 / 강사 송철호 부산대 외래교수
울산 기생 자란의 비극적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신형석 대곡박물관장의 제보로 경상일보가 2007년에 최초로 발굴 보도함으로써 알려졌다.
〈자란전〉은 18세기 향촌권력의 횡포와 저항, 신분을 넘어선 애틋한 사랑, 신분갈등, 비극적 애정서사구조, 〈춘향전〉과의 관련성 등 가치가 매우 큰 작품이지만 작품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는 물론 작품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수봉등의 연구도 이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자란전〉의 저자 박민효(1672년(현종 13)~ 1747(영조 23)는 조선 후기 문인이며, 호가 상체헌 이고 시문집인 『상체헌유집』 은 5권 2책의 목판본으로 1924년 박민효의 6대손 박순하 등이 편집 간행되었다.
『상체헌유집』이 유명해진 것은 무엇보다도 기생의 딸 자란의 수절을 칭찬한 「자란전」을 싣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현재 『상체헌유집』은 연세대도서관, 계명대도서관, 울산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 2강 〈자란전〉의 비극성 / 강사 송철호 부산대 외래교수
인물전은 널리 교훈이 되고 표창할 만한 인물의 행적을 드러내는 것을 본령으로 삼는 문학 장르이다. 「자란전」은 실사에 바탕을 둔 비극적 서사이다. 전체적으로 6개의 큰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자란의 출생과 뛰어난 기녀로의 성장
2. 부리 윤면이 자란을 총애하여 기적에서 빼내어 애첩으로 삼다
3. 윤면의 죽음과 애통해하는 자란
4. 신임부사 정광운이 자란에게 수청을 강요하다
5. 곡기를 끊고 죽음을 택한 자란
6. 열녀로 칭송 받는 받는 자란
자란이 정광운 이라는 거대하고도 부당한 권력과 맞서 이길 수 없는 대결을 벌임으로써, 그로 인한 무자비한 운명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그녀는 가장 고귀하고 용감한 인간이 되었으며 그것 때문에 고결하게까지 된 것이지만, 자란의 비극은 그녀가 조선사회의 한 인간으로서 인권을 보호받기 힘든 기녀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권력의 횡포, 거대한 권력은 불법도 정당화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인 모순, 신분제의 잘못된 굴레가 주원인 일 것이며 자란 또한 태생적 비극을 안고 태어나 자기 의사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고 권력자 개인의 욕망 앞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한편 기생의 신분을 벗어나고 싶은 의지가 꺽인 것에 비극이 더해진 것이 아닌 가 사료된다.
비극은 자신의 의지가 실현되지 못한 때 발생한다 하지 않은가?
「자란전」은 비극의 요소를 제대로 갖춘 작품이다.
탐방 〈자란전〉 저자 박민효의 흔적을 찾아서
일정: 6/21 13:00 ~ 18:00 / 인솔자 강사 송철호 부산대 외래교수
언양 읍성
언양읍 동부동 ~ 서부동에 위치한 석성(石城).
해자(海子)로 성벽 외곽을 방어한 네모반듯한 평지성으로 둘레1559.7m 최고높이 4.85m이며 동서남북 성벽 중앙에 옹성을 두른 성문을 배치했다. 성문좌우, 꺽이는 모서리마다 돌출시킨 치성이 있고, 고려 공양왕2년(1390)에 토성으로 쌓은 것을 연산군 6년(1520) 현감 이담용이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반구대
언양읍 대곡리 산 234-1에 위치하며 국보 제285호 암각화가 있다.
산세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으로 마치 거북 한 마리가 넙죽 업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반구대라 하였다 한다. 암각화는 선사시대 유물이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주변 환경은 신라 때 화랑들이 훈련, 야영 하던 곳이며 고려 말 정몽주, 조선 초기 이언적, 정구 등이 명시를 남기고 향민들을 교화 시켰다 한다. 반구대 아래 포은대에는 반고서원 유허비와 포은대 영모비가 있고, 숙종 38년(1712) 삼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반고서원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있다.
암각화는 주변 사연 댐 축조로 수중으로 침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작괘천
울주군 상북면 신불산 홍류 폭포에서 발원하여 삼남면 신화리에서 삼동천으로 유입하는 지방하천이다. 하천바위가 지속적인 물살에 파인 모양이 술잔을 걸어둔 것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다.
고려 말 정몽주가 인근에 유배 왔다가 작천정에서 경치를 보고 시를 읊었다. 일제 강점기 언양읍 3.1운동의 중심지이며 물이 맑고 풍경이 뛰어나 지방의 위안처로서 이름나있다.
작천정: 세종 20년 지방 학자들이 세종을 생각하며 지은 정자이며, 주변의 절경과 우람 기괴한 암석, 깨끗한 물은 선경지대라 불렸으며 시인 묵객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 곳이다.
울산지역에 전해오는 유사한 전설과 관련성
- 돋질산 도깨비 전설 -
울산항과 태화강 하류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돋질산(돗질산, 저두산 이라고도 불림. 89.2M) 도깨비 전설을 요약하면,
옛날 (시기미상) 관기의 딸 ‘월앵’이라는 재색을 겸비한 어린기생이 있었는데 뭇 풍류 남 들이 군침을 흘렸으나 소꿉친구인 주호동과 장례를 언약했다. 호동과 월앵이 사는 고을에 신임 사또가 부임하여 월앵에게 수청 들기를 강요했고 ‘호동이 과거에 급제하여 패륜의 수령방백들을 주살 하겠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또가 호동을 죽이려 하자 월앵은 호동을 멀리 피신시켜 이별한다. 전라도 남원으로 피신한 호동은 농악 패와 어울려 꽹과리 치는 법을 배웠다. 이후 월앵은 수청 들기를 거절하다 자결했고 월앵의 혼백은 도깨비에게 찾아가 호동과 만나게 해 달라 애원한다. 남원에서 돋질산 나루터엘 돌아온 호동은 월앵의 죽음을 알고 주막집에서 자살한다. 그날 밤 돋질산에서 호동의 꽹과리 소리가 나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함께 풍악을 울렸고 월앵과 호동은 이승에서 맺지 못한 연분을 저승에서 맺었다 한다.
- 다음 시(詩)는 이 전설을 듣고 지은 미발표 자작시다-
돋질산
동해 뱃길 따라 울산포구 들어서면
애기기생 젓 가슴 마냥 붕긋 솟아
새 색시 삽짝너머 훔쳐보듯 고개 내민
돋질산
옛날 옛적
사또수청 거절하고 자진한 월앵
소꿉동무 호동이 뒤따르자
못 이룬 연분 억울한 혼백 달려 주려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판 벌려
날마다 혼인 잔치했던 도깨비 나라
돋질산
천년이은 전설
도깨비 불되어 울산야경 수놓고
공장 굴뚝 우뚝 세워
차 나와라 뚝닥 배 나와라 뚝닥
밤 낮 없는 방망이 질
현대판 도깨비 지켜보는
돋질산
자란전과 도깨비 전설의 공통점으로 아버지가 사대부이고 어머니가 기녀라는 점 (관기의 어린 딸), 총명하고 기예에 뛰어나다는 점, 정인과의 이별, 신임고을 수령으로부터 수청을 강요받는다는 점, 수청 거부 후 수절(자살) 등 을 들 수 있고 자란(자앵) - 월앵 이라는 이름으로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보이는 것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 이라고 사료된다.
이와 같이 자란을 만나 보았더니 300여년이 지난 오늘, 요즘 세간에 회자되는 고(故) 장자연 (여배우, 1980. 1/25~ 2009. 3/7)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정황] 사례가 보인다 하고 장자연이 사망 전 작성한 유서엔 “성 상납, 술 접대 강요...“가 들어 있다 한다.
자란(자앵) - 월앵 – 자연, 과연 누가 그녀들을 죽였나?
수신을 못한 소위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사람들!
다양한 독서나 인문, 사회, 철학 강연 수강 등을 통해 인성과 정서를 키우지 못한 그들은 인간 존엄가치를 무시한 가슴 삭막한 시험공부에만 매달려 합격을 위해 머리만 키우고 가슴을 키우지 못했기에 그들이 벌린 파탄 행위는 사회적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이고 몰락의 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지옥의 세월 뿐 임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제 1차 (주제: 기녀의 삶, 저항의 삶, 자란) 강연 참여 후기- 박성학님 후기입니다.
제목: 300년 전 女人 자란(紫鸞)을 만나
자란(紫鸞), 춘향전의 실제모델 (충북대 이수봉 명예교수 주장) 울산 출신 열녀라고 하는데, 춘향은 골백번도 더 들어 보았으나 자란은 금시초문이다. 예쁘고 흔치않은 이름을 가진 300여 년 전 여인에 대해 어찌 호기심을 놓아버리겠는가?
조선 영조 때 「상체헌집」에 “기녀로 정절을 지키다 자살 했다”고 수록되어있다. 한걸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란(일명 자앵)은 영조3년(1727년) 12월 30일 울산 부(蔚山府) 아전 심대연과 부기(관기) 초경의 딸로 태어나 영조20년(1744년) 6월 14일 18세의 나이로 수절하게 된다.
3년 전 (15세 때) 울산도호부사 윤면의 애첩으로 경기도 이천으로 전근된 윤면을 따라 갔다가 신임부사 정광운이 돌아오라고 명했는데 불복하자 부모를 옥에 가두기에 이르렀다. 어쩔 도리가 없게 된 자란이 울산으로 돌아오자 부모를 석방 (1744년 5월 5일) 하였고, 부사의 거듭된 수청을 거부하다 마침내 6월 14일 “나 죽게 되면 천리 밖에 있는 윤공 묘에 부장하고, 나의 수식의물을 팔아 장비로 쓰고 남은 의 패는 윤공가에 보내주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다. 까지가 일반적 상식이다.
제 1강 〈자란전〉에 대한 문헌적 접근 / 강사 송철호 부산대 외래교수
울산 기생 자란의 비극적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신형석 대곡박물관장의 제보로 경상일보가 2007년에 최초로 발굴 보도함으로써 알려졌다.
〈자란전〉은 18세기 향촌권력의 횡포와 저항, 신분을 넘어선 애틋한 사랑, 신분갈등, 비극적 애정서사구조, 〈춘향전〉과의 관련성 등 가치가 매우 큰 작품이지만 작품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는 물론 작품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수봉등의 연구도 이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자란전〉의 저자 박민효(1672년(현종 13)~ 1747(영조 23)는 조선 후기 문인이며, 호가 상체헌 이고 시문집인 『상체헌유집』 은 5권 2책의 목판본으로 1924년 박민효의 6대손 박순하 등이 편집 간행되었다.
『상체헌유집』이 유명해진 것은 무엇보다도 기생의 딸 자란의 수절을 칭찬한 「자란전」을 싣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현재 『상체헌유집』은 연세대도서관, 계명대도서관, 울산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 2강 〈자란전〉의 비극성 / 강사 송철호 부산대 외래교수
인물전은 널리 교훈이 되고 표창할 만한 인물의 행적을 드러내는 것을 본령으로 삼는 문학 장르이다. 「자란전」은 실사에 바탕을 둔 비극적 서사이다. 전체적으로 6개의 큰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자란의 출생과 뛰어난 기녀로의 성장
2. 부리 윤면이 자란을 총애하여 기적에서 빼내어 애첩으로 삼다
3. 윤면의 죽음과 애통해하는 자란
4. 신임부사 정광운이 자란에게 수청을 강요하다
5. 곡기를 끊고 죽음을 택한 자란
6. 열녀로 칭송 받는 받는 자란
자란이 정광운 이라는 거대하고도 부당한 권력과 맞서 이길 수 없는 대결을 벌임으로써, 그로 인한 무자비한 운명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그녀는 가장 고귀하고 용감한 인간이 되었으며 그것 때문에 고결하게까지 된 것이지만, 자란의 비극은 그녀가 조선사회의 한 인간으로서 인권을 보호받기 힘든 기녀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권력의 횡포, 거대한 권력은 불법도 정당화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인 모순, 신분제의 잘못된 굴레가 주원인 일 것이며 자란 또한 태생적 비극을 안고 태어나 자기 의사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고 권력자 개인의 욕망 앞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한편 기생의 신분을 벗어나고 싶은 의지가 꺽인 것에 비극이 더해진 것이 아닌 가 사료된다.
비극은 자신의 의지가 실현되지 못한 때 발생한다 하지 않은가?
「자란전」은 비극의 요소를 제대로 갖춘 작품이다.
탐방 〈자란전〉 저자 박민효의 흔적을 찾아서
일정: 6/21 13:00 ~ 18:00 / 인솔자 강사 송철호 부산대 외래교수
언양 읍성
언양읍 동부동 ~ 서부동에 위치한 석성(石城).
해자(海子)로 성벽 외곽을 방어한 네모반듯한 평지성으로 둘레1559.7m 최고높이 4.85m이며 동서남북 성벽 중앙에 옹성을 두른 성문을 배치했다. 성문좌우, 꺽이는 모서리마다 돌출시킨 치성이 있고, 고려 공양왕2년(1390)에 토성으로 쌓은 것을 연산군 6년(1520) 현감 이담용이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반구대
언양읍 대곡리 산 234-1에 위치하며 국보 제285호 암각화가 있다.
산세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으로 마치 거북 한 마리가 넙죽 업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반구대라 하였다 한다. 암각화는 선사시대 유물이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주변 환경은 신라 때 화랑들이 훈련, 야영 하던 곳이며 고려 말 정몽주, 조선 초기 이언적, 정구 등이 명시를 남기고 향민들을 교화 시켰다 한다. 반구대 아래 포은대에는 반고서원 유허비와 포은대 영모비가 있고, 숙종 38년(1712) 삼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반고서원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있다.
암각화는 주변 사연 댐 축조로 수중으로 침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작괘천
울주군 상북면 신불산 홍류 폭포에서 발원하여 삼남면 신화리에서 삼동천으로 유입하는 지방하천이다. 하천바위가 지속적인 물살에 파인 모양이 술잔을 걸어둔 것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다.
고려 말 정몽주가 인근에 유배 왔다가 작천정에서 경치를 보고 시를 읊었다. 일제 강점기 언양읍 3.1운동의 중심지이며 물이 맑고 풍경이 뛰어나 지방의 위안처로서 이름나있다.
작천정: 세종 20년 지방 학자들이 세종을 생각하며 지은 정자이며, 주변의 절경과 우람 기괴한 암석, 깨끗한 물은 선경지대라 불렸으며 시인 묵객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 곳이다.
울산지역에 전해오는 유사한 전설과 관련성
- 돋질산 도깨비 전설 -
울산항과 태화강 하류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돋질산(돗질산, 저두산 이라고도 불림. 89.2M) 도깨비 전설을 요약하면,
옛날 (시기미상) 관기의 딸 ‘월앵’이라는 재색을 겸비한 어린기생이 있었는데 뭇 풍류 남 들이 군침을 흘렸으나 소꿉친구인 주호동과 장례를 언약했다. 호동과 월앵이 사는 고을에 신임 사또가 부임하여 월앵에게 수청 들기를 강요했고 ‘호동이 과거에 급제하여 패륜의 수령방백들을 주살 하겠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또가 호동을 죽이려 하자 월앵은 호동을 멀리 피신시켜 이별한다. 전라도 남원으로 피신한 호동은 농악 패와 어울려 꽹과리 치는 법을 배웠다. 이후 월앵은 수청 들기를 거절하다 자결했고 월앵의 혼백은 도깨비에게 찾아가 호동과 만나게 해 달라 애원한다. 남원에서 돋질산 나루터엘 돌아온 호동은 월앵의 죽음을 알고 주막집에서 자살한다. 그날 밤 돋질산에서 호동의 꽹과리 소리가 나자 도깨비들이 몰려와 함께 풍악을 울렸고 월앵과 호동은 이승에서 맺지 못한 연분을 저승에서 맺었다 한다.
- 다음 시(詩)는 이 전설을 듣고 지은 미발표 자작시다-
돋질산
동해 뱃길 따라 울산포구 들어서면
애기기생 젓 가슴 마냥 붕긋 솟아
새 색시 삽짝너머 훔쳐보듯 고개 내민
돋질산
옛날 옛적
사또수청 거절하고 자진한 월앵
소꿉동무 호동이 뒤따르자
못 이룬 연분 억울한 혼백 달려 주려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판 벌려
날마다 혼인 잔치했던 도깨비 나라
돋질산
천년이은 전설
도깨비 불되어 울산야경 수놓고
공장 굴뚝 우뚝 세워
차 나와라 뚝닥 배 나와라 뚝닥
밤 낮 없는 방망이 질
현대판 도깨비 지켜보는
돋질산
자란전과 도깨비 전설의 공통점으로 아버지가 사대부이고 어머니가 기녀라는 점 (관기의 어린 딸), 총명하고 기예에 뛰어나다는 점, 정인과의 이별, 신임고을 수령으로부터 수청을 강요받는다는 점, 수청 거부 후 수절(자살) 등 을 들 수 있고 자란(자앵) - 월앵 이라는 이름으로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보이는 것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 이라고 사료된다.
이와 같이 자란을 만나 보았더니 300여년이 지난 오늘, 요즘 세간에 회자되는 고(故) 장자연 (여배우, 1980. 1/25~ 2009. 3/7)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정황] 사례가 보인다 하고 장자연이 사망 전 작성한 유서엔 “성 상납, 술 접대 강요...“가 들어 있다 한다.
자란(자앵) - 월앵 – 자연, 과연 누가 그녀들을 죽였나?
수신을 못한 소위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사람들!
다양한 독서나 인문, 사회, 철학 강연 수강 등을 통해 인성과 정서를 키우지 못한 그들은 인간 존엄가치를 무시한 가슴 삭막한 시험공부에만 매달려 합격을 위해 머리만 키우고 가슴을 키우지 못했기에 그들이 벌린 파탄 행위는 사회적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이고 몰락의 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지옥의 세월 뿐 임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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