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너머 새로운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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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희 16-10-27 18:01 조회504회 2016.10.27본문
지평선 너머 새로운 길을 찾는다
서서희
30여 년을 직장생활에 매여 있던 내게 어느날 자유가 주어졌다. 간병휴직이라는 타이틀이었지만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할지 몰라 한동안 헤매고 다녔다. 처음에는 시어머님과 친정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느라 바빴다. 그러다 병원 가는 횟수가 잦아들면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라는 보고 싶던 영화를 조조로 보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을 봐 가족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허전했다.
병원에 가지 않는 날은 아침에 집안일을 다 하고 출근하듯이 집을 나왔다. 저녁 전까지 마음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었다. 집 옆에 도서관이 있어 참 좋았다. 4층에서 책도 빌려 읽고, 3층에 가서 영화도 봤다. 영화 DVD가 무척 많았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 DVD ‘미생’을 며칠에 걸쳐 보았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수준이 높아진 것에 대해 감탄하면서 다른 영화도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원하는 영화를 쉽게 찾게끔 목록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불편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기 쉽도록 정리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한 13,000개 정도의 영화 목록 정리 작업을 6개월쯤 걸려 마무리했다. 뭔가 ‘뜻있는’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DVD 목록 정리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도서관 앞에 세워진 배너에 <길 위의 인문학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자전소설 쓰기>라는 홍보 문구를 보았다.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어렴풋이’ 있던 나에게 적당한 강좌인 것 같아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고 1번으로 신청을 했다. 강사님의 소설책 두 권을 읽으면서 강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의왕 분이시구나, 전공이 국문과가 아닌데도 소설을 쓰셨네.’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강좌가 시작되었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첫 시간은 강의 내내 내 얼굴이 굳어져 있는 것을 나 스스로도 느꼈다. 낮 시간에 도서관에서 강좌를 듣고 있는 내가 생소하고 어색했다. 처음에는 강의만 듣고 오후에 ‘알바’가 있어 바로 집으로 갔다. 그러다가 ‘알바’ 시간을 조정하고 뒤풀이에 참석했다.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연스레 회원들과 친해졌다. 뒤풀이 시간이면 끝까지 남아 좋은 얘기를 들려주시는 강사님의 열정적인 모습에 다들 감탄했다.
그 시간에 배운 것이 참 많다. 포일리에서 30여 년을 살았지만 집과 직장만 다니느라 싸고 좋은 음식점, 분위기 좋은 커피집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고 살았다. 밥과 차만이 아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글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다 수준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정겨운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쓸지 고민이 많았다. 써 온 글을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고민하고 쓴 글이지만 발표하면 다른 사람들이 흉보지 않을까 고민도 많이 했다. 내가 쓴 글을 발표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다른 사람이 읽는 글을 듣는 것이 더 좋았다. ‘아, 이 주제를 저렇게 쓸 수도 있구나. 저 분은 글을 참 맛깔나게 잘 쓰네. 나는 언제 저렇게 잘 쓸 수 있을까?’ 등을 생각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았다. ‘옛날 사진에 얽힌 이야기’, ‘가장 후회되는 일’, ‘맛 혹은 요리의 기억학’ 등 같은 주제라도 나이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들을 쓰고, 들을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길 위의 인문학’은 우리들 마음을 ‘힐링’시키는 시간이 되었다. ‘자전’이다 보니 개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경험이 담긴 글을 읽으면서 목이 메이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듣는 사람들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서로를 안아주고, 토닥여주면서 ‘진정한 의미의 힐링’을 경험했다. 쓴 글을 읽으면서, 읽는 글을 들으면서 너,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마음의 ‘힐링’을 경험했다. 그 귀한 시간이 내게 주어졌음에 감사한다.
또 ‘길 위의 인문학’은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집살이, 직장생활까지의 어려움을 글로 토해냈다. 주로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토해내고 나니 내 얼굴이 환해졌음을 느낀다. 미움과 분노를 밀어내고 사랑과 여유와 따스한 미소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길 위의 인문학’이 미움으로 가득찬 나를 치유해 주었다.
돌아보면 ‘한밤중 태어난 쥐띠’인 나는 울퉁불퉁한 산길을 땅만 보면서 힘겹게 오르기만 했다. 이제 ‘길 위의 인문학’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눈을 들어보니 멋있는 경치가 보인다. 산세는 험하지만 아름답다. 산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나무도 보인다. 휘어지고 구부러졌지만 늠름한 자태로 서 있다. 그리고 내가 걷던 길이 울퉁불퉁한 산길이 아니라 호젓한 오솔길이었음을 본다. 땀을 흘린 후라 바람도 시원하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었는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왔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5개월 동안 미움과 분노를 글로 토해 낸 내가 이제 새로운 길로 들어서려고 한다. 정을 담고 웃음을 담고 기쁨을 담아 소박한 수채화 한 편을 그리고 싶다. 평범한 ‘이경희’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글을 쓰는 소설가 ‘서서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길 위의 인문학’은 지평선 너머 새로운 세상을 내게 보여주었고, 나는 이제 그 곳을 향해 날아가려고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한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신 내손도서관과 5개월 동안 고생해 주신 김우남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