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문화관도서관]3강 국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기록 <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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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숙 16-10-25 06:44 조회704회 2016.10.25본문
강화도 역사탐방을 다녀와서 세 번째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조선의 또 다른 놀라운 기록문화를 볼 수 있는 방대한 기록의 <승정원일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1.승정원일기란?
조선 정종 때 설치돼 518년 동안 왕명의 출납을 맡고 모든 국가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 비서실.(지금의 청와대 비서실)
승정원의 별칭은 후원(喉院), 후설(喉舌).. 승정원은 왕의 목구멍과 혀와 같은 존재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날마다 일자별로 기록한 것을 <승정원일기>라 합니다.
-춘방(春坊)일기(세자궁 일기), 조보(朝報.. 조선 시대 신문), 당후(堂後)일기(승정원 주서를 역임한 사람의 개인 일기) 등을 종합..
<승정원일기>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과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이전의 기록은 불 타 없어졌다고 하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 1623년(인조 1) 3월부터 1910년(융희 4)까지 288년간 작성한 국정기록이 전합니다.
앗? 영화 속에 이런 오류가..
전교하였다.
1616년(광해군 8) 2월 28일 <광해군일기>에 쓰인 "可諱之事 勿出朝報。(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광해군일기, 1616년 2월 28일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쓰여 있는 이 한 줄에서 '광해군이 감추려 했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를 두고 상상력을 발휘한 작가는
1616년(광해군 8) <승정원일기>에 15일간의 기록이 없다는 설정으로 각본을 써고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광해군 당시의 승정원일기는 이미 선조 재위 시 임진왜란 때 다 불타 없어져서 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기에
광해군 시절의 승정원일기를 거론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입니다.
그렇지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아주 흥미진진하고 그럴 듯한 팩션영화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 깊은 영화로 사랑받았습니다.
승정원일기 총 3,243책, 글자 수 2억 4,250만 자로 세계 최대의 기록물.
(1999년 4월 9일 국보 303호 지정, 2001년 9월 세계기록유산 등재)
승정원일기는 조선 건국 초부터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불타버린 승정원일기까지 합해 전량이 남았더라면 6,400여 권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왕의 사후에 생전대에 있던 여러 기록을 종합 정리한 것인데 반해,
<승정원일기>는 왕의 생전에 일어난 모든 일을 따라다니며 그대로 기록한 것이어서 당시의 조선의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승정원일기> 책들 속에는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 등이 생생하게 담겨있어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는 무한한 역사적 보물이 담긴 대단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①승정원 건물은 어디에 있었지요?
창덕궁,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 따르면, 창덕궁 인정전 옆 궐내각사 중에 <승정원>이 보입니다.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 언저리에 <승정원>이 있었나봅니다.
인정전 동쪽 대청(臺廳)과 문서고(文書庫) 사이의 <은대(銀臺)>..
1820년(순조 20)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때 작업을 지휘한 것으로 보이는 <동궐도>..
승정원에서 그날그날의 일을 아침마다 적어서 알리는 관보를 <기별(奇別)>이라 합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에서는 흥례문으로 들어서 영제교를 지나 <근정문> 가는 길 왼쪽 유화문 옆에 <기별청(奇別廳)>이 있습니다.
기별청은 <승정원>에 소속되어 있는 작은 건물로, 궁궐 안 회의실에서 고관들이 처리한 일을 아침에 <기별지>라는 문서에 적어서 널리 반포하는 일을 하였답니다.
"한양으로부터 기별이 왔느냐?"
"간에 기별도 안 간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이런 말들이 이 '기별'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②승정원일기 제목에 대하여..
시대가 변하고 비서실 기능을 하던 승정원 명칭이 바뀌면서 승정원일기 제목도 바뀝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니 이것 역시 승정원일기에 포함시킵니다.
현재 1999년 4월 9일 <국보 제303호>로 지정된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3045책, <승선원일기> 4책, <궁내부일기> 5책, <비서원일기> 115책, <전비서감일기> 8책, <후비서감일기> 33책,
<규장각일기> 33책 등등.. 3243책
2. <승정원일기>의 작성..
①승정원의 직체는요..
-승정원일기 편찬: 승사(承史)라 불리는 도승지 이하 정 3품 승지 6명과 7품의 주서(注書) 2명이 공동으로 담당.
-최종기록: 승정원일기 쓰는 것은 주서가 도맡아 작성합니다.
<주서>가 된 사람은 "웅문속필(雄文速筆-문장력이 뛰어나면서 글도 빨라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속기와 동시통역에 뛰어난 사람. 말은 우리말로 하고 쓰기는 한자로 썼어야 했으니 대단한 능력자..
-주서는요.. (두 명이 써서 서로 비교하여 최종 기록을 정리하였다 함)
㈀춘추관 기사관을 겸함
㈁국내외 각종 기록들을 두루 검토, 정리하는 임무를 수행
㈂반드시 학문과 문장이 검증된 문관 임용(승지-무관도 임명 가능)
㈃승정원의 사관
주서가 기록한 매일의 일기는 왕에게 올리기 전 유출을 엄격히 금지했답니다.
한 달분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공식문서이므로 당연히 내용 기록 전에 매일 담당 승지와 주서 등 승정원 관리들의 실명을 적었습니다. 철저한 실명제!!
병이나 사고가 나서 출석하지 못한 상황까지 병, 재외(在外=밖에 있음), 식가(式暇=휴가) 등의 표현으로 기록.
②승정원일기를 보기까지..(2449책)
-승정원일기 원본 1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초서(草書)로 기록되어 해독이 쉽지 않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61년 탈초(脫草).. 정자체로 바꾸는 작업을 시행.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제공(정보화사업).. 현재 500여 책까지 되어있다고 합니다.
-민족문화추진(현제: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94년부터 고종대 승정원일기를 시작으로 국역 사업 단계적 추진.
-인조시대와 영조시대의 승정원일기 국역(일부)
-2억 4,250만 자로 워낙 방대한 승정원일기인지라 예산과 인력부족으로 완역까지는 아직도 50~100년 넘게 시간이 걸릴 것이랍니다.
현종때 주서 이담명(1646-1701)이 작성한 <승정원사초>가 광주 이씨 집안에 전해져 와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승정원사초>는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원고격인 사초랍니다.
이런 초서를 번역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3.승정원일기 자료적 가치..
①세계 최대 역사기록물로서 인조대 이후 조선 후기 역사를 총람하는데 필수적인 자료입니다.
②매일 쓰고 있어 하루, 한달, 일 년의 정치 흐름을 알아볼 수 있는데 정치의 주요 현안, 상소문 원문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습니다.
③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승정원일기는 늘 국왕의 모든 것을 담고 있기에 왕이 정무를 보던 장소가 어디인지도 나와 있어 왕의 행동 반경과 시간대별 동선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④왕의 건강 상태와 심리상태, 기분까지 다 기록되어 있어 어떤 스타일의 왕이었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이처럼 왕에 대한 일상이며 성격, 감정, 차림 모습 등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다 담아내어 왕의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록)
⑤왕이 신하들과 주고 받은 대화를 다 기록하고 있어 정치의 미세한 부분까지 다 드러납니다. (정기 조회와 경연의 시행여부 등등)
⑥승정원일기는 왕의 사후에 작성되는 왕의 실록 편찬에 가장 기본적인 자료의 하나로 활용되어 조선왕조실록과 서로 보완됩니다.
⑦승정원일기는 일반 일기처럼 맨 앞에 연월일과 간지를 쓰고, 그날의 날씨를 빠짐없이 기록합니다.
-청(晴맑음),음(陰흐림),우(雨비),설(雪눈) 등
-오전청오후설(午前晴午後雪오전은 맑고 오후에 눈) 등 하루 중 일기의 변화까지 기록
-비가 내린 경우 측우기로 수위 측적 결과도 적음
-전통시대 기후 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전통시대 날씨 연구의 예)- 강의 내용은 아닙니다만..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이라는 작품을 보고 이 그림이 언제 그려졌는지 <승정원일기>를 통해 맞춰보겠습니다.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
왼쪽 담에 쓰여진 글귀와 그림 속 달의 모양이 흔히 보는 초승달 모습이 아니라 엎어져 있는 모양인 것을 보고 몇 년 전
충남대 천문우주과학과 이태형 교수님이 천문학적으로 분석하여 그림이 그려진 시간을 추정하였답니다.
<승정원일기> 제1719책에 '7월 병오(丙午·15)일 밤 2경에서 4경까지 월식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실제 1793년(정조 17) 8월 21일(음력 7월 15일) 오후에 비가 내리다 그쳐 밤에 월식 관측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비의 양을 측우기로 수위 측적한 결과도 적혀 있습니다.
雨/ 申時, 灑雨下雨, 測雨器水深三分。
夜自二更至四更, 月食。 (승정원기록, 1793년 7월 15일 병오)
월식 때 달이 엎어져 있는 듯한 이 모습이 부분월식 과정으로 보이며 달의 모양과 위치 등을 분석하여 이 그림은
1793년 8월 21일 밤 11시50분께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답니다.
당시 서울에서 신윤복이 26세가 되던 1784년(정조 9) 8월 30일과 35세가 되던 1793년(정조 18) 8월 21일에
부분월식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내어 유추해본 것인데, 날짜를 맞춰보니 1793년이 알맞으며 글귀 속에 '夜三更(야삼경)'은
밤 12시 전후의 '자시(子時)'를 뜻하니 신윤복은 위의 부분월식 때 엎어져 있는 신비스러운 달의 모습을 그렸을 거라는 것.
<승정원일기>를 통해 구성해본 천문관계 추리가 참 그럴듯하지요?
⑧<승정원일기>는 우리 근대사 자료의 보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손으로 집필되어 정사로서의 정통성이 부족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지 못하였습니다.
분명 우리의 역사가 존재했는데 실록이 제구실을 못하니 대신 <승정원일기>가 대체 자료(1차 사료)로서 쓰이게 되었답니다.
-1894년 이후 <승정원>은 명칭이 바뀌어 <승선원일기>.<궁내부일기>,<비서감일기>,<비서원일기> 등 198책은 황제의 결재를 요하는
주요 정치적 사건과 궁중 비화 등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서구 열강과의 외교관계며,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는 왕실의 모습 등 한말 대외관계사 연구 필수자료)
"영조임금이 한 달에 11번이나 건강검진을 받았다고? 어떻게 알지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나요?"
이 모든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승정원일기>에 나온 내용이라 합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영조는 건강관리가 철저하였으며 내의원 의원들을 불러 한달에 11번 건강검진을 받았다는 기록도 나오며
66세 때 15세 정순왕후를 신부로 맞이하면서 영조는 머리가 다시 검어졌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합니다.
또한 본인이 술을 싫어하여 금주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4.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비교..
영조는 태종 때 처음 인공하천 청계천을 준설한 이래 대대적으로 청계천 준설공사를 하게 하며 청계천에 큰 애정을 보입니다.
<영조실록>에는 1760년(영조 36) 2월 23일 에 영조 호조판서 홍봉한이 성 밖의 물길을 잡는 방법에 대해 아뢰자
이를 윤허한 내용과 3월 16일 청계천 준설공사 완료, 준천사실 책자 완성 등의 내용이 간략하게 실렸습니다.
이에 반해, <승정원일기>에는 이 시기에 영조가 청계천 공사에 임하는 심정과 함께 구체적 공사 과정에 대해 어영대장 홍봉한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과 준천문제를 깊이 논의하고 나눈 깊이 있는 대화들이 매우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1758년(영조 34) 5월 2일
영조: 저번에 광충교를 보니 전년에 비해 더욱 흙이 빠져 막혀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천변 인가는 반드시 표류하거나 없어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승정원일기>1760년(영조 36) 2월 23일
영조: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에 있다... 다섯칸 수문의 역사는 매우 힘들다고 했는데 6일 내에 마치니 신기하다.
영조의 청계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준천과정이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라는 그림으로도 남아있습니다.
영조의 청계천 사랑이 드러나있는 승정원일기 기록 영상(클릭해서 꼭 보시길..)
5.조선시대의 일기 문화..
조선 시대 선비는 뭔가를 기록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어 기록문화가 보편적이었으며 임진왜란, 유배 중에 또는 개인적으로
꾸준히 쓴 개인의 일기가 전해옵니다.
①임진왜란 중 쓰인 일기
㈀난중잡록(亂中雜錄)- 조경남 의병장(1570~1641)이 엮은 일기이자 야사.
남원 출신 의병장 조경남 장군이 1582년(선조 15) 12월 1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까지 57년 동안
방대한 국내 중요 사실을 일기 형식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서책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효란, 병자호란 등 직접 전쟁을 체험한 의병장으로서 당시 전쟁기록과 풍속, 민간생활 등을
상세하게 적어놓아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는데 1649년(인조 27) 선조실록을 수정할 때 실록수정청에서 이 책을 빌려다가 8년이나 참고사료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용사잡록(龍蛇雜錄)>-조선 중기의 문신 정탁(1526∼1605)의 개인기록 (보물 제494-4호)
1책으로 되어있으며, 임진왜란 중에 신하들이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과 외교관련 문서 등을 모아 친필로 옮겨 적고 자신의 의견을 기록한 책입니다.
㈂<쇄미록(鎖尾錄)>-조선 중기의 학자 오희문(1539~1613)이 왜란을 겪은 상황을 쓴 일기 (보물 제1096호)
오희문이 임진왜란 때 가족을 이끌고 홍주·임천·아산·평강 등지를 피난하면서 전란 상황과 사회상을 적은 일기입니다.
1591년 11월부터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면서 지내던 일을 기록했습니다.
㈃고대일록(孤臺日錄)- 조선 중기 의병 정경운(1556-?)의 일기
북인의 영수 의병장 정인홍의 제자로 경상우도인 함양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고대(孤臺) 정경운(1556-?)의 일기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 4월부터 1609년(광해군 즉위년)까지 19년 동안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참혹한 전쟁 상황과
백성들의 고초를 생생하게 기록해두었습니다. 1986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②유배지에서 쓰인 일기
<미암일기(眉巖日記)>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춘(1513∼1577)의 일기
유희춘은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19년간 유배.
선조가 왕이 되기 전 스승으로 선조가 왕 위에 오른 뒤 두루 벼슬에 기용된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꿈, 질병, 지방의 풍속 등 저자의 일상사를 기록해두었는데 16세기 생활사연구에 도움이 되는 귀중한 책입니다.
③기타 개인일기
<흠영(欽英)> -유만주 일기모음집
조선 말기 문신 유만주가 21~3세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144권의 일기 모음집으로 최근 <일기를 쓰다>1,2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서문에는 사건, 대화, 문장, 생각 등 일기에 꼭 들어가야 할 것이 써있고 서양문물, 생활사에 관한 기록 정리가 되어 있어
18세기 학문적 수준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되는 자투리 문화 상식..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 목록(13건)-홀수 년도에 지정
①훈민정음(1997.10)
②조선왕조실록(1997.10)
③불조직지심체요절(2001.9)
④승정원일기(2001.9)
⑤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諸) 경판(2007.6)
⑥의궤(조선왕조 의궤)(2007.6)
⑦동의보감(2009.7)
⑧일성록(2011.5)
⑨5.18민주화운동기록물(2011.5)
⑩난중일기(2013.6)
⑪새마을운동 기록물(2013.6)
⑫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생방송(2015.10)
⑬한국의 유교책판(2015.10)
"역사를 알고 나면 미래를 향해 나아갈 힘이 생깁니다.
오늘날 기록물 홍수시대에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를 알고 싶으면 현장을 꼭 가보십시오.
길 위에 진정한 인문학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관하여 3번의 강의와 역사탐방을 끝으로 신병주 교수님과 함께 한 시간이 모두 끝났습니다.
물 흐르듯 술술 흘러나오는 역사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들었던 행복한 강의였습니다.
(2016.10.1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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