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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립도서관]월봉서원, 필암서원에서 호남도학 정신을 만나다.후기 -김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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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숙진 16-06-10 13:19 조회330회 201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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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립도서관]월봉서원, 필암서원에서 호남도학 정신을 만나다.후기 -김순의

길 위의 인문학 답사를 다녀와서

월봉서원, 필암서원에서 호남도학 정신을 만나다.

 

도서관 길위의 인문학1차 목포시립도서관

기 간 : 2016.5.18/25/26(3일간)                           

 

소풍 날 받아놓고 설레는 것은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두 번에 걸쳐 탐방지에 대해 공부를 했는데도 인터넷으로 사전 답사를 하느라고 잠을 설쳤다. 계란찜과 찌개를 끓여놓고 도서관을 향해 달렸다. 꽃처럼 화사하게 차린 일행들이 삼삼오오 버스에 오른다. 하늘은 맑고 햇빛은 따사롭다. 얼마 전까지 연녹색 이파리들이 변주를 하던 산은 초록이 완연히 짙어졌다. 산과 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원근법이 잘 표현된 한 폭의 수묵화다. 도로변에는 금계국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모내기를 앞둔 들녘엔 군데군데 보리밭도 보인다. 갑자기 누런 보리밭에 엄마 얼굴이 겹친다. 엄마는 이즈음을 보리누름이라고 했다. 보리가 익어갈 무렵이라는 뜻 일거다. 요즘 들어 불쑥불쑥 엄마가 자주 쓰던 말들이 튀어나온다.

 

오늘 내 짝은 승정 씨다. “거꾸로 읽으면 정승이네!” 했더니 그런 말 자주 듣는단다. 얘기를 해보니 솔직하고 따뜻하다. 신앙과 삶을 나누다 보니 장성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문불여(文不如)장성이라,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단다.

 

첫 번째로 필암서원을 둘러봤다. 입구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우릴 맞는다. 홍살문과 하마석을 넘어 서원에 들어서자 마당을 중심으로 고풍스런 건물들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들어서 있다. 서원 철폐의 거센 바람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말을 들으니 문득 용궁에 갔다 온 토끼가 생각났다. 조선중기의 유학자였던 하서 김인후 선생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문인들이 세운 서원으로 선생과, 제자 양자징의 위패가 있다. 인종의 스승이었던 하서는 인종이 즉위하자 선정을 펼칠 것을 기대했으나 갑작스런 승하에 충격을 받아 관직을 사양하고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강당역할을 했던 청절당(凊節當)에서는 지금도 어르신들이 모여 공부를 하는지 마당에까지 소리가 들린다. 동제와 서제는 기숙사였다는데 그 시절에도 양반 자제들은 특별대우를 받았던 모양이다. 그들이 거처했던 동제는 마루도 있고 넓은데 평민 자녀들의 숙소인 서제는 좁은 데다 수도 많았다고 한다. 선비라면 모름지기 학식과 덕을 갖춘 사람이 아닌가? 적어도 하서 선생이라면 기숙사를 차별 없이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 신분차이의 벽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도 결코 즐겁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원 앞 개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바로 옆 밭에는 만수국이 주황 물결을 이루고 있다. 유물전시관에서 선생의 자취를 더듬어보고 담양으로 향했다.

 

백화등이 하얗게 불을 밝힌 식당 앞에 버스가 섰다. 담양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떡갈비와 대통밥이 예약되어 있단다. 문을 열자 장성의 맛이 코끝으로 밀려온다. 다들 시장했는지 샐러드를 몇 접시씩 비운다. 홍어와 게장, 명이 장아찌에 생선구이까지 상이 푸짐하다. 삶은 완두콩까지 한 접시 더 먹었더니 위장이 불편하다. “이 주체할 수 없는 식욕을 어째야쓰까!” 탄식했더니 옆에 있던 분이 아따, 낼부터 빼면 되제 뭔 걱정이요?”하며 한방에 걱정을 날려버린다.

 

가까운 곳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으로 향했다. 조선시대의 선비 양산보가 조성한 정원으로 스승인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 숨어들었다. 자신의 호를 따서 소쇄원이라 이름 지었다. 맑고 깨끗하다는 것은 인품과 지조를 고고하게 하라는 뜻일 게다.

입구 냇물에서 청둥오리 한 쌍이 한가롭게 노닌다. 정원을 조성할 때 양산보를 이끌어 길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오리의 후손인가 보다. 소쇄원의 5월은 초록 입자들이 팔랑거리며 떠다니는 것처럼 푸른빛이 가득하다. 전에는 건성으로 둘러봤는데 사전 강의를 들어서인지 나무 한 그루, 나지막한 돌담까지 달리 보인다. 길을 따라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를 보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대숲에 코를 대고 단전 호흡하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봉황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손님을 기다렸다는 대봉대에 앉으니 마치 양산보가 기다리는 귀한 사람이라도 된 듯 마음가짐이 숙연해 진다. 바로 앞 오동나무에 봉황이 날아드는 상상을 하며 잠시 다리를 쉬었다.

 

오곡문이라 써진 담장을 따라 걷다 보니 물길을 막지 않기 위해 쌓은 돌담이 특이하다. 물이 다섯 번 돌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수량이 적어 물의 흐름을 느끼지 못해 아쉽다. 돌기둥 사이로 냇물이 흐른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물의 미학을 보는 것 같다. 숲과 동산, 나무 한 그루까지 그대로 두고 비탈을 이용해 살며시 그 품에 안겼다. 마구잡이로 자연을 훼손하는 요즘의 건축 형태와 대조적이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냇물이 순리를 역행하면 안 된다고, 자연은 후대에게 물려 줄 유산이라고 뼈아픈 일침을 가하는 것 같다. 볕이 잘 든다는 애양단 모퉁이에는 동백 한 그루가 터줏대감인양 자리를 잡고 있다.

제월당(霽月堂)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주인장이 거처했던 공간이다. 광풍각과 대봉대가 내려다보이고 대나무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당의 매화나무는 튼실한 매실을 졸랑졸랑 달고, 목백일홍은 꽃 필 준비를 하느라 가지를 벌려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처마 밑에 서니 뜨거운 날씨와 상관없이 서늘한 기운이 돈다. 반대로 겨울에는 따뜻하단다. 양산보는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풍류를 즐겼다. 어쩌면 그는 고립이나 은둔이 아닌 자유와 평화를 누렸던 게 아닐까? 한편 입신양명을 효도의 으뜸으로 치던 시대에 그가 느꼈을 절망과 괴리감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비 갠 하늘에 떠 오른 달빛을 보려면 아무래도 날 잡아서 다시 와야 할 모양이다.

 

광풍각(光風閣)은 사랑채다. 소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배롱나무, 동백, 오동나무 매화나무가 빙 둘러 있다. 계곡 건너편 연못에서 흐르는 물이 폭포수가 되어 떨어지고 그 옆에는 노란 창포가 흐드러졌다. 마루에 앉으니 대숲을 건너 온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고, 비 오는 날 청량하게 부는 바람이라는 현판의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 바람, 달과 별, 계곡 물소리, 꽃과 나무, 계절 따라 바뀌는 풍경을 보며 뜻이 통하는 지인들과 담소하며 시를 읊었을까. 자유 낙하하는 폭포수에 야욕도 원망도 흘려보내고 숨어 사는 즐거움을 누렸던가 보다. 김인후, 기대승, 정철, 송시열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담소하는 장면을 떠 올리다보니 며칠 묵으면서 그들이 느꼈을 새소리 바람소리에 취해보고 싶었다. 자연이 알아서 가꿔가는 집에서 맑은 공기 실컷 마시다보면 덕지덕지 붙은 삶의 찌꺼기들이 조금 떨어지지 않을까? 자주 찾아 와서 소쇄원의 사계를 오롯이 느끼며 영혼이 자유로웠던 그들의 흔적을 만나고 싶은 욕심이 든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본 만큼 알게 된다더니 왜 소쇄원을 정자문화의 백미라고 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다음은 월봉서원이다. 고봉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서원이다. 마을 입구에 내려 토담 길을 따라 오르자, 웅장한 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뒤에는 백우산이 호위하듯 서 있고 앞으로는 황룡강이 흘러 배산임수의 지형을 잘 갖췄다. 너브실 마을은 기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단다. 입구에 자리한 강수당에서는 지금도 고봉의 정신세계를 만나기 위한 체험 프로그램이 정기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기대승은 퇴계 이황과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에 대해 토론했다. 퇴계는 쉰여덟, 고봉은 서른두 살이었지만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교류했다. 당시 선비들이 그 편지를 필사해서 공부했다니 학문의 깊이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주강당인 빙월당의 현판은, 고봉의 맑고 고결한 성품을 비유해 정조가 하사했다고 한다.

 

서원 왼쪽으로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서서히 오르니 숲속에서 고봉의 시비가 우리를 맞는다.

 

호화롭고 부귀키야 신릉군만 할가마는

백년도 못 지나서 무덤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다른 이들을 말해 무엇 하리요

 

신릉군이 누군지 궁금해 검색했더니 삼천 식객을 거느렸다는 옛 위나라 소왕의 아들이란다. 그런 사람의 무덤도 밭이 되는데 보통 사람이야 말 할 필요 없다는 뜻이리라. 이렇게 인생무상을 일찍 깨달아 초야에 묻혀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던가 보다. 개망초의 안내를 받으며 십분 쯤 올랐을까? 산 중턱에 자리한 고봉과 그 부인의 묘의 묘소가 나온다. 고봉의 기개를 닮은 굵은 적송이 빙 둘러 섰고, 잔디 사이에서는 키 작은 엉겅퀴가 분홍색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김덕균 교수님께 고봉의 삶에 대해 듣고 내려오는데 길 양쪽에 씀바귀가 지천이다. 씀바귀를 보자 나도 모르게 동요 한 소절이 튀어 나왔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 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 냉이 씀바귀 모두 캐보자/ 종달이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초등학교 때였으니 반백년 전에 불렀던 노래인데 가사도 버벅거리지 않고 줄줄 나온다. 나이가 들수록 옛날 일이 선명하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목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이슬비가 내린다. 우산이 없어 걱정했는데 빠른 걸음으로 빗방울이 굵어지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자유로운 영혼들의 흔적을 돌아보다 그 정신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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