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을 참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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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립마동도서관 15-11-22 13:13 조회1,242회 2015.11.22본문
길 위의 인문학을 참가하고
김길자
사람은 살아가면서 때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또한 그로 인한 전혀 뜻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새로운 만남을 갖게 되기도 한다. 올해 전통문화역사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처음 그 곳에 마음과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마동도서관에서 시행한 길위의 인문학과의 만남으로까지 이어지는 일이 바로 그렇다. “문학에 역사를 담다” 제3차시 길위의 인문학 테마에서부터 이 가을에 색색이 물들어가는 나뭇잎과 같은 절절한 그리움으로 마음마저 곱게 물들어갔다. 탐방에 앞서 “옛사람들의 교육”을 제목으로 탐방지에 관계되는 특강을 전주문화원장님이신 나종우 선생님으로부터 2시간 듣게 되었다. 관련되는 책도 먼저 읽고 또 교육도 받고 탐방을 가는 아주 유익한 시간들이었다.
드디어 10월28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까운 전주로의 탐방일!
문학을 사랑하고, 역사를 사랑하고, 우리 지역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을햇살만큼이나 따사로운 사람들이 동행하는 여로이기에 더 기대되고 행복한 날이다.
전주로 향하는 버스에 승차하고서 도착할 때까지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곧 우리의 발길이 닿게 될 탐방지에 관한 스토리를 쉴새없이 재미있고 유쾌하게 풀어주시던 박경옥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과 애정어린 신념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같다.
전주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지방기념물 16호로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오목대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황산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주에 들려 오목대에서 일가친지를 불러모아놓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으로,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대풍가로 읊었다는데 그 대풍가가 적힌 현판을 정자에 올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무르익어가는 가을임을 알려주는 떨어지는 마른 낙엽을 밟고 서 있는 탐방객들에게 해박한 지식을 잘 풀어주시며 해설을 잘해주신 나종우 선생님 덕분이다. 한옥마을 지붕이 지척에 내려다보이고 전주 시내가 모두 보이는 이 곳에서 이성계는 웅장한 포부를 꿈꾸었나 보다. 오목대의 뜰 한편엔 대한제국 광무4년에 비각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고종 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굳게 닫혀진 비각의 문 틈 사이로 보이는 비석의 글씨를 한자 한자 읽어가며 지나간 역사의 숨결을 가까히 느껴보았다. 오목대와 비각사이에 사방 풍경이 다채로운 색깔의 낙엽들이 뒹굴고 묵묵히 오목대를 지키며 나눠줄 것 다 나눠주는 착한 나무들과 오목대의 정경이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어 그 곳에서 같이 간 일행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운치있는 나무계단을 따라서 향교로 향하였다. 서걱이는 낙엽 밟으며 역사와 문학의 공간 안으로 들어서는 말 그대로의 길 위의 인문학을 체감하는 뜻깊은 시간들이었다. 한옥마을 안쪽으로 들어서서 이정표 따라 걷다가 한옥마을 게스트 하우스촌을 가로질러 생각보다 꽤 많이 걸었다.
드디어 도착한 전주향교는 일월문을 지나 좌우로 역사만큼 거대한 은행나무들이 서있다. 전주향교에는 다섯 그루의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향교내 서문 앞 은행나무 수령이 500년이나 되었다. 이렇게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은 뜻은 은행나무 열매의 강한 냄새로 벌레를 타지 않듯 유생들도 청렴하고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 즉, 탐관오리같은 벼슬아치가 되지 말라는 뜻이 담겼다는 것도 산수유나무들 밑의 편평한 돌들에 옹기종기 앉아 마치 야외 학습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들은 해설을 듣고 알게 된 것이다. 또하나 알게 된것은 가을이면 예쁘게 물든 은행잎을 책장 사이사이 끼워넣는 것을 가을을 만끽하는 낭만적인 행위라고 생각해왔는데 마른 은행나뭇잎이 책의 곰팡이를 방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듣고 일리도 있고 재미있어서 많이 웃었다. 향교는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관학으로 강학과 배향기능을 수행하였다. 일월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의 동무와 서무로 구성된 배향공간으로 구성되었는데 대성전에는 서울 성균관과 같이 공자를 중심으로 4성인과 10철학자, 송나라의 6현인을 모시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로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성전 뒷담을 넘어 명륜당이 있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그 양편이 동재와 서재로 구성된 강학공간인데 동재와 서재는 기숙사였고, 지금 이 명륜당은 일요학교, 전통문화학교 등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향교내 건물의 배치는 평지일때는 앞이 대성전, 뒤가 명륜당이고, 경사진 곳일때는 뒤쪽에 대성전, 앞쪽이 명륜당이 위치하게 되는데 전주향교의 특징은 대성전이 앞에 있다는 것이 일반향교와 다른 점이다. 예전에 이 곳 한옥마을에 올때면 향교에 들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향교에 관한 강의를 먼저 듣고 직접 해설과 함께 향교를 방문하여 전체적인 향교를 눈에 담으니 이젠 확실하게 향교가 하는 일과 그 구조를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게 된 것 또한 길 위의 인문학이 내게 안겨준 값진 선물이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은 전주천의 가을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맑게 흐르는 시냇물 사이사이 징검다리를 해맑은 미소로 이 가을에 함께하는 사람들과 건너본다는 것이 마냥 좋았다. 길 위의 인문학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분이 계시는데 78세의 이순옥 할머니이시다. 너무나 소녀같으셔서 맑은 감성이 시가 되어 절로 우러나오시는 분! 그 분 또한 징검다리를 건너시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을 때 내 나이가 그 분의 나이가 되어도 이런 길 위의 인문학의 기회가 주어질 때 참가할 수 있는 맑디맑은 순한 마음과 용기를 간직하고 싶어 그 분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징검다리와 이순옥할머니를 내 마음에 담았다. 식당에서 한바탕 웃지못할 예상밖의 에피소드가 벌어져 출입문 바로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던 우리 일행들이 본메뉴는 먹어보지 못하는 초유의 사건을 맞기도 했는데 그것 또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으로 자리할 것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천변에 갈대와 억새가 어우러져 완연한 전주천의 아름다운 가을을 맘껏 향유하며 거니는 즐거운 길이 되었다.
그 이름도 생소한 완판본 문화관!
완판본은 전라도의 수도였던 전주와 그 일대에서 출판한 옛 책과 그 판본을 말한다. 전라도의 중심 전주의 옛 명칭을 완산이라고 하였는데 그 때문에 전주에서 출판된 서적을 완판본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목판으로 인쇄를 하였는데 서울에서 출판된 책을 경판, 경기도 안성에서 출판된 책을 안성판, 대구에서 출판된 책을 달성판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완판본이 판본의 종류나 출판 규모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나종우선생님으로부터 이처럼 전주에서 출판문화가 발달한 이유를 듣게 되었다. 완판본이 전주에서 활성화된것은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던 전라감영의 출판물이 많았고, 책에 대한 수요층이 증가하여 서적 시장이 활성화되었으며, 책을 제작하기 위한 한지가 대량 생산되었고, 목판을 제작하기 위한 목재와 기술력이 우수한 각수들이 많았으며, 판소리의 소설화 요구와 한글 소설을 통한 한글 대중화 교육이 활성화되었으며, 근현대 지식인의 지적 욕구 증가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고 전시관을 둘러보니 완판본 책들이 신선하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전시실에는 고서를 주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완판본문화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흔히 생각하는 고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완판본의 흐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어 감명 깊었다. 전시실 한쪽에는 용비어천가와 글자도 등 관광객의 호기심을 이끌어 낼만한 다양한 목판을 준비해 두고 있었고 저렴한 체험비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목판 인쇄 체험을 할 수있게 마련해놨는데 일정에 쫒겨 목판 인쇄 체험을 할 수 없어 아쉬웠다.
이제 다음 탐방지는 경기전!
완판본 문화관에서 경기전까지 걸어가는 도중엔 예전에 보지 못한 진풍경들이 많았다. 한복체험으로 저마다 독특하고 개성있는 한복을 입고 한옥마을을 투어하는 많은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는데 눈이 즐거운 볼거리가 되었고 관광자원으로 개발한 기발한 발상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뜻의 경기전!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가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곳으로 태종 때 창건되었다.
경기전에 들어가기 전 암수 두 마리의 동물이 비를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하마비가 서있다. 비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경기전에 들어갈때는 계급의 높고 낮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들어서면 어진을 모신 정전이 나온다. 경기전 정전은 보물1578호로 태조의 어진을 모신 건물은 모두 다섯 곳에 있었다. 경기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경기전 역시 정유재란 때 소실된 이후 광해군때 다시 세웠다.
태조 어진(국보317호)은 원래 20점 넘게 있었는데 현재는 경기전에 봉안된 어진만 남아있다. 다른 임금들의 어진이 모두 홍룡포를 입고 있는 것과는 달리 태조 어진은 청룡포 차림이다. 현재 경기전에 봉안돼 있는 어진은 고종9년(1872년)에 새로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경기전 정전까지 자세한 해설을 담당해 주시던 나종우 선생님께서 아쉽게도 경기전 문화해설사에게 바톤을 넘겨주시고 퇴장하신다.
전주사고와 어진박물관은 담당 문화해설사에게 그 해설을 듣게 되었다. 전주사고가 바로 눈앞에 있고 바로 오른쪽에는 누워서 잠을 자는 등 굽은 매화나무가 우리를 맞이하는 뜰에 서서 전주사고에 관한 해설을 들었다. 전주사고는 조선 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25대 472년 동안 조선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방대한 역사책 『조선왕조실록(888책 1893권, 국보 제151호)』의 보관 장소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 전주사고에 보관 된 실록만이 전북 사람들의 노력으로 유일하게 보존됐고, 조선 후기에는 무주 적상산 사고가 설치돼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냈다. 자칫 단절될 뻔한 조선의 역사가 전라도의 기운으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전주사고 또한 일정상 직접 사고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해설만 들은 채 어진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꽉 짜여진 일정은 많은 제약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진박물관은 태조어진 전주봉안 600주년을 맞이해 2010년 11월 6일 개관했다고 한다. 지상1층, 지하1층의 목조건물이다. 지상1층 전시실에는 어진실이고 지하1층 전시실에는 태조어진을 봉안할 때의 행렬과 당시 사용했던 각종 가마에 대한 내용을 담은 가마실과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이래 현재까지의 경기전 역사 이야기를 담은 역사실로 구성되어있다. 우리는 지하에는 내려가보질 못하고 지상 전시실에서만 어진에 대한 재미있는 해설을 듣고 모셔진 어진들을 관람하는 시간을 가졌다.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임금의 초상화 중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어진 뿐이라고 한다. 그 외의 어진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습과 후손들의 골격을 토대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곳 어진실에는 순종, 고종, 철종 ,영조어진 모사본과 세종과 정조 표준영정을 모시고 있다. 우리가 성군으로 존경하는 세종과 정조의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용안을 알 수 없어 현재 두 분의 어진은 근래에 추정하여 그린 상상도로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니 안타깝기도 하고 실제의 모습과 어진에 차이가 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어진 제작은 도사, 추사, 모사의 3종류로 나눠진다. 도사는 왕 생존시에 그린 것이며, 추사는 왕이 돌아가신 후에 그리는 경우이고, 모사는 기존의 어진을 본떠 그리는 것을 말한다. 해설사님이 퀴즈로 문제를 내셨는데 어진실에 있는 어진은 ① 도사 ② 추사 ③ 모사 몇 번일까요? 라고 하셨다. 답은 ③번 모사이다.
유일한 태조의 어진 진본은 태조어진 전용 수장고가 있어 1년에 1~2차례 특별한 날에만 일반인에게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진실에 있는 어진들은 다 모사라고 보면 된다. '+location_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