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교육문화관] 제2차, 햇볕에 바래고 달빛에 물들다 by 최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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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15-11-11 10:48 조회681회 2015.11.11본문
「길 위의 인문학」을 통하여 강원도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는다.
최 영 일 -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길위의 인문학」강좌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길위의 인문학」이라...‘인문학’이라는 주제와‘길 위의…’라는 제시어가 궁금증을 자아내게 되어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문학?’정도로 이해하고 강좌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내가 접하게 된 강좌는 홍인희 교수님께서 강의하신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라는 주제로 주로 강원도의 산하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낸 역사 강좌였다. 역사 속에서 우리가 모르고 지나왔거나 소홀히 알던 사실들을 실증적 사료들을 제시하면서 알기 쉽게 이야기를 재구성하시는 교수님의 탁월한 말솜씨에 또 한 번 탄복하게 된다.
이번 강의는 주로 삼척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진행되었는데 죽서루와 죽죽선녀의 이야기, 준경묘와 이성계의 5대조(익조 이양무 장군) 그리고 조선 창업 신화의 비화, 공양왕릉의 진실과 현재적 해석, 그리고 육향산의 「동해척추비」에 숨은 비화 등이 소개되었다.
먼저 죽서루와 관련된 교수님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결이 50여 차례 구비 쳐 오십천을 만들고 그 한 구비의 기암절벽위에는 신묘한 모습의 죽서루가 자리하게 되었다. 조선중기 문장가 송강 정철은 여기에 올라 ‘진주관 죽서루 아래 오십천 흐르는 물이 /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 가니 / 차라리 그 그림자를 한양의 목멱(남산)에 대고 싶구나’라고 감탄한 싯귀가 지금도 죽서루 편액에 걸려 있다. 또한 빼어난 비경을 증명이나 하듯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해 수많은 명사들의 시문과 글이 즐비하다. 관동지방에서 으뜸이라는 ‘관동제일루’, 내를 끼고 있는 누각 중 가장 뛰어나다는 ‘제일계정’등의 편액이 그 명성을 웅변한다. 그리고 숨은 비화 하나 더,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와 죽죽선녀의 사랑이야기가 이곳 죽서루를 배경으로 전개되었다고 하니 죽서루가 한층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죽서루 앞에 엑스포 공원이 조성되고 회색 빛 콘크리트 건물 들이 들어서면서 대나무 숲으로 이어졌던 녹색 스카인 라인을 훼손하여 죽서루의 예전 운치를 앗아간 듯 하여 씁쓸한 마음이 든다.
역시 개발 논리와 환경 보전이라는 가치를 두고 결국 인간이 택하는 것은 탐욕스런 개발가치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 하는 아쉬움 같은 것이 때늦게 전해 온다.
죽서루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 문화탐방단 일행은 「준경묘」를 향했다. 삼척지역에 살면서도 그 동안 “준경묘”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준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이며 목조(穆祖)의 아버지인 이양무 장군의 묘로서 이양무 장군은 본디 전라도 전주에 거주하였는데 이곳으로 170여호의 식솔과 함께 이주하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수호군을 두어 관리했던 곳으로 삼척지방을 선대의 묘가 있는 곳이라 하여 현(縣)에서 부(府)로 승격시켰다 한다.
준경묘 일대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 자리이며, 목조가 한 도승이 시키는 대로 이곳에 선친을 안장하니 5대에 이르러 이성계가 탄생하여 조선을 건국했다고 하는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또한 주변 일대의 금강송 군락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소나무 군락지로 황장목이라 불리 우며 숭례문 복원 공사 때에도 여기에서 자란 소나무를 목재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미인송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하늘을 향해 고고하게 서있다.
그 다음 우리 문화 탐방단 일행은 궁촌 지역에 자리 잡은 공양왕릉을 향했다. 실질적으로 고려를 최후까지 지키려했던 마지막 임금이 “공양왕”이다. 기울어져가는 고려의 사직을 세우려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이미 기울어 진 역사의 시계추는 막을 수가 없어 비운의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왕이 공양왕이다.
홍인희 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궁촌(宮村)이라는 지명도 임금이 거처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사릿재도 공양왕 살해(殺害)와 관련 있는 듯하다는 말씀이었다. 그러고 보니 무심코 지나쳐 버린 지명 하나하나에도 역사적인 근거와 이야기가 서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공양왕의 능이 이곳 궁촌지역 외에도 경기도 파주, 강원도 간성지방에도 있다는 것이다. 각각 주장하는 논거가 다르고 각 지역에서 각자의 기준으로 고증을 하고 있으니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어찌됐든 공양왕릉을 내려오면서 권력무상, 인생무상 같은 허무감 같은 것이 뇌리를 스쳤다. 한 나라의 왕이었음에도 왕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비운의 한 인간상(像)이 60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흐릿하게 그려졌다.
우리 일행의 마지막 탐방지는 육향산 일대와「척주동해비」이다.
“척주동해비”와 관련된 일화로는 미수 허목(許穆)선생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허목은 삼척부사로 재임하던 중 백성들이 수시로 높은 풍랑으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는 것을 목격한다. 이에 자신의 도학적 역량과 동방 제일 이라는 전서체를 동원하여 해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동해송」을 짓고 이를 비각으로 세운다. 그후 거짓말같이 바다가 잠잠해지고 평온을 되찾으니, 세인들은 이 비를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불렀다 한다.
지금도 상당수 삼척시민들에는 신령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으며, 비문이 해일을 비롯한 각종 재난을 막아 주는 부적으로 효험이 있다고 믿는 주민들이 탁본을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 그만큼 의미있는 것이므로 미수 허목과 그와 관련된 「동해척주비」의 이야기를 단순한 주술적 의미로서 뿐만 아니라 허목 선생의 삼척부사로서 애민정신을 함께 고양하고 기려야 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행복해진다’라는 말이 있다. 실로 공감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강원의 역사를 접하면서 강원의 내밀한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음이 자꾸 부끄럽게 여겨지는 일정이었으며, 역사를 보는 안목 없음에 또 허탈해 진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반면 끊임없이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이야기가 있는 강원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는 홍인희 교수님의 혜안과 안목에 다시금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길 위의 인문학’ 강좌를 통하여 그동안 우리 강원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었음을 실감하게 되었고,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면서 느끼는 희열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올 여름과 함께 시작된 ‘길 위의 인문학’은 나에게는 또 한걸음 우리 강원의 내밀한 이야기 속으로 걸어가는 계기가 되었고 알게 되는 만큼 더 행복해지는 시간이 되었다.
끝으로 ‘길 위의 인문학’강좌를 기획하고 집행하여 주신 삼척교육문화관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내가 가지는 ‘행복감’을 다음 기회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마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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