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립도서관] 2015 길위의 인문학 - 고창탐방 (김순와)
페이지 정보
장숙진 15-11-10 16:29 조회399회 2015.11.10본문
「길 위의 인문학」탐방을 다녀와서
(질마재 신화 그 길을 따라서)
김 순 와
길을 떠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길 위에서 인문학을 만난다는 것 또한 설레는 일이다. 모든 것은 길로 이어지고 또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되뇌이며 길을 나선다. 차창 밖 너머로 황금물결 넘실거리는 가을 들녘의 풍요로움이 마음 안으로 가득히 들어온다. 내 마음도 저 드넓은 벌판처럼 평온하고 여유로워진다.
길을 따라서 어느덧 미당시문학관에 도착했다. 시문학관에 들어서자 마당의 왼쪽 끝에 스테인레스로 만든 커다란 자전거 한 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미당의 자화상 시구에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를 조형화한 것이라고 한다. 두 바퀴는 8자를 표현하고 또한 영원히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바람의 역동성을 꿈꾸며, 질마재 고개를 힘들게 넘어가듯 세상의 소중한 비밀을 알고자 힘써 노력하는 모든 문학 소년들의 꿈을 상징화한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있었다. 마치 예전의 소년 미당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했다.
미당의 시적 고향,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옛 선운초등학교를 개조하여 지은 미당시문학관이 이색적인 모습으로 서 있다. 회색빛으로 반듯하게 세워진 첨탑에는 담쟁이가 형형색색으로 고운 옷을 입고 가을을 더 선명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1층에 들어서면 미당의 손으로 쓴 친필의 시들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여고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애송하고 있는 ‘국화옆에서’ ‘푸르른 날’ ‘자화상’ 시를 보면서 미당을 대하는 마음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옛 스승을 찾아 뵙는 느낌이었다.
1층 전시실부터 다양한 그의 원고들과 유품을 둘러 보고,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각 층마다 평소 즐겨 신던 고무신이며, 돋보기 안경, 나비 넥타이, 담배파이프...등. 생전에 즐겨 사용했던 유품들과 원고지, 손자에게 받은 손글씨 편지들을 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이색적인 볼거리는 층마다 벽면에 붙어있는 세계 각지의 유명한 산의 사진이다. 그냥 읽기에도 어려운 산의 이름과 높이까지 빼곡히 적혀 있는데, 그 이유는 치매예방을 위해서 였다고 한다. 습관처럼 산의 이름과, 해발 높이를 항상 외웠다는 애피소드를 알 수 있었다. 늘 나태하지 않는 부지런함과 맑은 영혼과 건강을 위하여 철저히 자기 자신을 관리를 했다는 것도 새로운 사실이었다. 층층이 오르다 보면 비로소 만나게 되는 6층 전망대! 미당시문학관에서 가장 상징적인 곳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질마재와 선운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왼편에는 미당의 생가가, 오른쪽 산자락 아래에는 미당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가을이라서 노오란 국화꽃이 만발해서 멀리서 보아도 미당의 무덤이 한 눈에 들어왔다. 햇빛에 반사된 노란 국화꽃들은 마치 미당 시인의 모습처럼 더 빛나고 눈이 부셨다. 숙연한 마음으로 경배를 올렸다.
미당의 생가는 시문학관 옆에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생가 마당에도 누님같이 생긴 국화는 노오란 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는 시구를 자화상에서도 썼듯이 미당이 자라고 문학의 꿈을 꾸었던 생가에서 미당의 체취와 시와 영혼을 만났다. 생가 벽에 새겨진 ‘동천(冬天)’ ‘선운사 동구(洞口)’를 낭송했다. 소리에 민감한 미당의 시는 외워서 입으로 소리 내어 읊어야 비로소 그 깊은 맛과 청각적 이미지의 동적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우리 일행은 질마재를 걸어서 넘어가기로 했다. 가을볕은 따가웠다. 마치 국토순례단처럼 긴 거리를 걸었다. 아스팔트로 포장 된 길을 덤프트럭들이 풀풀 먼지를 날리며 질주했다. 그 옛날 질마재의 정서와는 사뭇 달라서 다소 실망을 했지만 그래도 4㎢ 남짓 되는 질마재를 언제 또 넘어 볼 것인가! 버스로 휘익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우리 일행들은 미당의 질마재 신화를 읊조리면서 함께 걸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탐방이었다. 아마도 일행들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자리할 것이다.
질마재! 고개 모양이 길마(소의 등에 안장같이 얹는 제구)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으며, 길마가 구개음화 되어서 질마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정겹고 훈훈한 느낌과 질곡의 세월을 말해 주고 있는 듯 했다. ‘질마재 고개를 힘들게 넘어가듯...’ 하는 시구절처럼 우리도 힘들게 질마재를 넘었다.
지금으로부터 오래전에 질마재 너머 아낙네들이 빨래터에서 떠는 수다를 곧잘 따라하는 사내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사내 아이는 집 근처 외가에 자주 놀러를 다녔고 외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옛날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으며 재미있게 들었다고 한다. 외할머니 무릎에 누워 사내아이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임경업 장군처럼 오랑캐를 무찌르고 춘향이랑 애절한 사랑도 나눴을지도 모른다. 또 노오란 국화꽃을 가슴속에서 피워 올렸을지도 모른다. 사내 아이의 이름은 정주(廷柱). 한학을 배운 아버지 서광현씨가 나라의 기둥이 되라고 장남인 미당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그 사내 아이가 자라서 미당 서정주라는 대한민국 문단에 길이 남을 큰 별이 되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생전에 1,000편이 넘는 시를 썼고 15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는 그 15권의 시집 어느 곳에도 자신의 친일적인 성향을 들어낸 시를 수록하지 안않다고 한다. 미당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려는 의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 시들은 자의에 의해 쓰여진 자신의 문학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가혹한 환경에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쓰게 된 5편의 시를 가지고 우리들에게 수 없이 많은 아름다운 서정시를 남겨준 위대한 시인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 말 몇 편의 친일 작품을 썼던 일과 군부 정권에 협력한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또 젊은 시절에는 「바다」,「조국」,「애비는 종이로소이다」같은 애국시를 절절이 쓰기도 했다. 아무튼 친일이라는 오명은 우리 역사에서 지워지기는 힘들 것 같아서 씁쓸하다.
목포시립도서관에서 주관하는「길 위의 인문학」을 통하여 미당 서정주의 주옥같은 시의 세계와 문학관과 또 질마재 신화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인간의 역사는 길의 역사이고, 인간의 문명은 길의 문명이며, 인간의 모든 것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는 유익하고 의미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끝)
첨부파일
관련링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