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나래 도서관] 길 위에서 형성되는 사람중심의 문학을 만나다 - 방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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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세영 15-11-01 01:45 조회530회 2015.11.01본문
길 위에서 형성되는 사람중심의 문학을 만나다
인천 남구 학나래 도서관
방세영
학나래 도서관의 도서모임에서 만난 김 정화 선생님께서 기획하신 '길 위의 인문학 '
공공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길 위의 사람중심의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
인천의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은 인천의 근 현대건축물과 마을을 찾아 대학교수, 문학박사, 건축평론가를 비롯한 인천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함께 걸으며 찾아가는 사람중심의 문학이라 결과적으로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자유공원을 오르니 초록 잎사귀들 사이로 비춰지는 햇살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입구에 들어서니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니 참여하기를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떡 까페를 운영 중이라는 시인이며 자원봉사가로 인천의 역사를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정답고 편안한 모습으로 인천의 모습을 폭넓게 소개해 준 이 종복 선생님과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건축물과 역사에 대해 아이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친근한 모습으로 소개해주신 연세대학 학부대학 교수인 이 연경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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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의 중심지였던 인천의 역사 변천사를 비롯하여 건축물들의 양식과 특징,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지역의 특색 등을 설명해주셔서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수봉산을 비롯하여 개항장에 대해 설명해 주셨는데 장소가 폭 넓어서 흐름을 설명해주셨으며 일행 또한 그 흐름을 이해하고자 정말 열심히 들었다. 인천 상륙작전 및 월남 6.25 참전용사였던 분들이 자유공원을 자주 찾는다며 곳곳에 보이는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바로 그 분들이라며 소개해주셨다. 현 시점에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폐여부의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 외국과 처음으로 국교를 체결한 곳이 인천이며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인천 제물포 화도진 언덕에서 이루어졌고, 차이나타운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계획으로 만들어진 곳이며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위해 일본과 청 그리고 러시아 등 12개국의 조계지가 제물포 지대에 세워졌다고 하니 내가 알던 인천이라는 도시가 새롭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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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공원아래 위치한 제물포 구락부역시 12개국 조계지의 사교클럽으로 한국인은 출입할 수 없던 곳이라 한다. 제물포 내부를 살펴보고 구락부 내에서 잠시 더위를 피하며 이 종복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시간도 가졌다.
‘ 사바친 ’이라는 인물이 인천의 자유공원을 비롯하여 한반도의 주요 건축물인 독립문과 덕수궁의 정관헌, 중명전 등을 건축하고 주한러시아공관을 건축하는 등, 구한말 역사의 장소들을 손수 설계했으며 황실과 가까이 지내면서 조선의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고종이 1년간 묵었던 러시아공관 역시 그의 작품이라고 하니 건축학과에서 낙제를 받고 쫓겨났던 그가 우연히 중국을 여행하다 묄도르프를 만나 한반도에 와서 많은 작품들을 남기게 된 사실은 놀라울 뿐이었다.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에서 일본 극우파들의 손에 명성황후가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기도 하다니 사바친이 바라본 우리나라는 어떠했는지 그가 남긴 글이 있다면 접하고 싶어진다. 12개국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고 인천 역사를 다큐 프로그램으로 TV를 통해 보여지고 들려지는 역사관으로 이용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한참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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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락부에서 나와 자유공원아래에 있는 홍예문을 위에서 바라보았다.
인천항이 한눈에 보이는 풍경이란 정말 경이로웠다. 이 지대 전부가 일본이 식민지화하려고 매립하여 만든 인공지대라는 말을 들으니 왠지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대단하단 생각도 들고..인공지대라는 말에서 실감되지 않았다.
제물포지대가 12개국의 조계지였기에 산 아래로 구멍을 뚫어 홍예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왕래를 할 수 있도록 한 고종의 백성에 대한 마음과 배려가 돋보이기도 하지만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문이라고 하니 그 시대의 아픔이 내게도 느껴졌다.
홍예문은 ‘혈문‘이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공사를 진행할 때 거대한 암석이 있어서 공사기간이 오래 걸렸다고 하여 ‘혈문‘이라고도 불렸다고 하지만 붉은 홍이 아닌 무지개 홍을 써서 무지개처럼 둥근 아치형태의 문을 뜻한다고 이 연경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다.
한국에 최초로 건립된 성공회 성당인 내동 성공회 성당은 코르페 주교가 선교 통역자들과 랜디스와 함께 선교활동을 위해 들어와서 병원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랜디스는 인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약대인이라 칭송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선교활동을 하러 왔지만 누구보다 한국을 존중하고 인천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핀 랜디스는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다 병들어 삶을 마쳤다고 하니 고인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성공회 성당은 한 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러일 전쟁시 적십자병원으로 사용이 되면서 국내에 적십자가 설립이 된 기반이 되었다고 하니 인천에서 많은 역사가 존재하였음에 놀라울 뿐이었다.
인천 개항장 누리길 양쪽으로 과거 일본강점기 시절의 건물이 많이 보여졌다. 인천 개항 박물관 항중문화관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모두 한자리에 있었다.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은 원래 일본 18은행이었던 건물로 이곳 주변에는 작고 특색 있는 예쁜 까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다음에 이 곳에 온다면 예쁜 까페에서 차 한잔과 함께 여유롭게 둘러보리라!
인천 개항장 근대 건축전시관으로 운영중인 구 일본 18은행은 둘러보고 싶었으나 내부를 볼 수 없어서 아들과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58은행도 가까이 있어서 외부만을 살펴보는 시간도 가졌었는데 이국적인 건축물로 인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일본이 한국 금융계를 일본 식민지화 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하니 왠지 씁쓸해지는 현실에 마음이 아려왔다.
시청과 청 일 조계지 쉼터 공간을 지나 아트 플랫폼으로 향하면서 아들이 고생해주신 교수님들께도 감사드린다며 인사를 드리는 모습에 나도 현재 남아있는 우리가 어떠한 역사를 남겨야 좋을지,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역사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는 친구와 함께 간다며 타협과 반 강제적으로 함께 참여를 하였는데 아이가 인천에 대해 이모저모 알게되어 기쁘게 생각하고 유익하고 재미있었던 시간들이었다며 다음에도 ‘길 위의 인문학’에 꼭 참여하겠다고 하니 인문학의 편견을 깨게 되는 계기가 되고 인천이라는 도시와 역사 속에서 삶의 의미가 깊어지는 ‘길 위의 인문학’ 이었다.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독립 운동가를 비롯한 그 외 후원해주시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인문학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백년, 새로운 천년을 위한 기반이 되기를 꿈꾸어본다.
내 년에도 기대되는 길위의 인문학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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