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도서관] 길을 따라 걷는 박경리 소설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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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혜 15-10-18 22:00 조회860회 2015.10.18본문
통영 이야기-
길을 따라 걷는 박경리 소설의 현장
한국 소설의 대모, 박경리를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레이지 않을 수 없다.
10월 15일 오전 9시.
성산도서관 앞에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다. 거의 빈자리가 없을 만큼 대형버스를 꽉 채운 길 위의 인문학 탐방객들은 뭔가 들떠 있는 듯 밝고 환한 표정들이었다. 창원 시내를 빠져 나간 버스는 마창대교를 지나 진동과 고성을 거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통영 시내로 진입했다.
통영은 문화 예술의 고장이다. 청마 유치환과 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중섭과 전혁림, 소설가 박경리 등 예술인들이 예술 혼을 길렀던 땅이다. 특히 작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지인 장소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에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으랴.
김은영 교수의 안내에 따라 1606년에 세워졌다는 충렬사로 들어섰다. 청명한 가을 날씨 속에서 수령 삼백 년이 넘은 동백나무가 우리를 맞이했다. 중심사당인 이 사당에서 매년 봄과 가을 이순신 장군의 제사를 올린다는 교수님의 설명은 외모만큼 차분했다. 외산문과 내산문 기둥에 새겨진 해태상도 인상적이었다. 사당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을 때 서재가 눈에 들어왔다. 제례용 음식을 장만하고 제구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1670년 김경 통제사 때 팠다는 명정골 새미 (정당샘)를 찾았다. 당시에는 주변에 민가가 없어 이 샘물을 충렬사에서 전용했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 이곳 주민들의 식수원이 되어 왔었다는 샘엔 아직도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충렬사 맞은편 경사진 골목에 박경리가 살았던 집터가 있었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지인 골목길은 소설과 닮아 있었다. 그만큼 변한 것이 없는 듯 옹색했다. 서문고개를 올라 뚝지먼당 (서포루)에 도착했다. 각자 준비해온 점심을 먹고 세병관으로 향했다.
세병관은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통제영이 의전과 연회를 행했던 상징적 건물이다. 조선시대의 단일 면적 목조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유일하게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소설 속에서 용빈과 홍섭이 이별을 했던 장소지만, 일제시대 때는 학교 교사로 사용됐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서 공부한 박경리는 2004년도 통영을 찾았을 때 제일 그리웠던 곳이 세병관이라고 했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홍섭에게 결별 통보를 받은 용빈이 마음의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 찾던 곳. 충무교회는 1905년 호주 선교사가 세운 통영 최초의 교회다. 주인공은 답답할 때마다 이 교회 여자선교사와 만나 깊은 심정을 토로했다. ‘김약국의 딸들’은 일제 강점기 통영에 사는 한 선주 집안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신식 교육을 받은 딸과 각각의 불행으로 살게 되는 세 명의 딸. 그리고 헌신적인 어머니와 몰락한 선주인 아버지가 겪게 되는 불행을 그린 소설이다.
플라토닉 사랑으로 유명한 중앙우체국. 청마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이십 년 동안 오천 통의 편지를 보내던 중앙우체국은 낭만적인 거리가 아니라 시장골목이었다. 우체국 앞 가게는 이영도가 경영했던 수예점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1947년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영도에게 편지를 보낸 유치환의 사랑. -사랑 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 하였네-라는 시구를 떠올리며 나는 우체국 앞 간이 의자에 앉아 일행을 태울 버스를 기다렸다.
예술적 감성에 푹 젖어 있는 동안 버스는 박경리 기념관에 도착했다.
-사고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이다- 2003년 ‘현대문학’에서.
기념관으로 들어서자 박경리가 집필한 책과 작품에 관한 논문과 사용되었던 도구. 친필 등을 모아 놓은 자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작가의 일생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게 잘 정리해 놓았다. 박경리는 1962년에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하면서 이 작품으로 ‘제 2회 여성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마지막 행이 묘지 입구에서 참배객을 맞이했다. 가슴이 울컥했다. 그러나 박경리가 애착을 가진 물건 세 가지는 재봉틀과 국어사전, 통영 소목장이다. 재봉틀은 그의 생활이었으며 국어사전은 그의 문학이었다. 소목장은 예술적 발로였다. 척박한 땅 곳곳에 구절초가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마디가 아홉 번이나 꺾어지며 피운다는 꽃. 그 신산한 삶이 약용효과를 빚어낸다니. 일렁이는 바람에 몸을 흔드는 가냘픈 저 구절초는 지금 생의 몇 마디가 꺾이고 있는 것일까. 박경리 역시 그 신산했던 삶이 아니었더라면 현대 문학사의 획을 그은 그 많은 소설들이 과연 나올 수 있었을까.
남해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 미륵산 자락에 자리 잡은 묘역은 그 자체가 문학적 풍경이었다. 그의 묘소는 참배하는 것보다 호수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미륵산의 품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장소 같았다.
예향의 도시이며 미학적 감성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던 곳, 통영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신 성산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관계자들과, 열정을 다해 설명을 해주신 김은영 교수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이런 유익한 프로그램이 더 많이 활성화되어 전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날로 향상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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