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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십리도서관] 손에 닿는 인문학 2차 -만해로 이해하는 인문학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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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15-10-18 11:35 조회724회 201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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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십리도서관] 손에 닿는 인문학 2차 -만해로 이해하는 인문학 탐방

2015.10.17.토요일 답십리도서관 손에 닿는 인문학 청량사와 만해기념관으로 경험하는 인문학 후기 

 


시간상 일행보다 먼저 청량사에 도착해서 잠깐 구경했는데, 절이 참 아담하니 예뻤다.

큰 나무들이 많아서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음.

드디어 교수님이 오시고!!  설명을 시작해주셨다!


12세기부터 있었던 청량사는 삼각산의 줄기로 청량리의 이름이 유래된 이유도 청량사 때문이었다.
비구니 스님들의 절로 보문사, 숭인동 청룡사, 한강변의 어떤 절과 석관동의 어떤 절도 비구니 스님들 절이었고, 이 석관동의 절이 없어지면서 청량사와 합쳐짐.

엄마랑 일찍와서 대웅전에 갔었는데 그쪽 옆 생활관쪽에 어쩐지 여자 분들만 잔뜩 앉아있었다.
이유가 비구니 스님 절이라서 였음.

여자분들이 관리해서 그런지 곳곳이 아기자기하니 예뻤다.
일제시대에 집회장소로 유명했다고 함. 서울과기대 전학교에서 학생들이 독립운동하러 자주 모였다고함.

청량사의 현판은 박한영 스님께서 지으셨다고 한다.

마니주(구스리) - 흐린 샘물에 넣으면 물을 정화해준다함.


무량수전 - 아미타불을 모심 (낙오 없게 문열고 끝사람까지 기다려주는 부처님)
(cf - 극락전은 지장보살님)

여기 심우도가 있었는데 (소찾기) - 마음찾기 그림이라하고 통상 10단계로 그려져 있음. 의식없이 행할수 있는 단계까지 가야하는 것이라고.
소는 본성 - 농경 신성한 존재(불교의 시작은 인도 황태자였던 석가모니부터니까 소는 신성한것!)

그리고 심우장 가는 길 - 성북구에서 더 많이 설비를 갖추었음. 예전과는 심우장 가는 길목이 달라진 모습이 많이 보였다.


설명중인 우리 교수님.


심우도에서 따온 심우장.

재혼한 만해선생을 위해 친구들이 돈을 많이 모아 집을 지어주었다고.

언덕방향 자체가 남향으로 집을 짓기는 좋지않은 방향이라 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너에 있는 집은 남향으로 집을 지었음.)



돌아가셔서도 취재 당하는 만해선생님.

심우장에 앉아 바라보면 성북동 아랫녘이 한눈에 보인다.
저 이상한 대자보가 없어야 더 잘보이는데!!!

심우장 입구.

길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답십리 도서관에서 간것이었는데,
심우장 가는 길목이 정말로 길위의 인문학이더라.



아래부터는 서대문 형무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고.
오로지 우리나라 사람을 가두기 위해 일제가 지은 것이고.
초기에는 의병들을 가둘 목적으로.
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해 가두었다함.

제2차 세계대전에 찌들수록 우리나라 사람을 많이 가두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형무소 모형.
가운데서 한몪에 지키려고 방사형으로 제작함.
간수 1명이 3개복도를 지키게끔.

전국 형무소 배치도.
어마무시함.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한 지팡이 칼.
보기에는 지팡이인데 분리하면 칼로 사용.


이건 도망가지 못하게 달아두었던 족쇄와 요(5kg) - 요는 허리에 다는 것이라 함.

건강진단표는 왜?? 고문하려고??

독립운동가가 누구인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씌웠다고 함.


독립운동가이신 이재명 의사.
잘생기셔서 찍어봄 ;;;

3.1운동 시절에 다량의 태극기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목각.
초기 태극기는 정사각형이었나보다.

한용운 선생님.
솔직히 무섭다 ㅠㅠ

전시관 내에 방 한칸을 전부 독립운동가분들 사진으로 도배해둠.
저곳에 있는 분들이 일부의 일부라니;;; 어린 학생이나 앳띤 모습의 독립운동가도 많았다.

안창호 선생님의 모습.
얼마나 방에를 자주 들락거리셨으면 시기별로 사진이 보관되있음 ㅠㅠ
고문떄문이었을까, 많이 고생하신 모습이 마지막 사진에 보인다.

아래 고문 전시실도 보았는데 시간이 없어 사진은 못찍었음.
예전에도 간적이 있는데 이 아래만 오면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전시실 내에는 태형, 물고문, 주리틀기, 송곳찍기 등만 전시되었는데
설마 그정도만 있었겠나. 태형 물고문 주리틀기는 다 조선시대때도 있던거다.

고교때 배울때는 몸전체를 묶어 실을 조이면서 살이 비집어 나온곳만 도려내기도 했다던데.
박물관에서 공개를 안하는건가. 잘 모르겠음.

사형장도 시간이 없어 보질 못했다.
거길 봤어야 했는데. 시구문도 못보고 ㅠㅠ

좋은 기회가 있어 다시한번 식미지였던 조선의 현실을 보고 왔음.
다음에 시간내서 한번 더 가봐야겠다.



좋은 기회를 주신 답십리 사서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후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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