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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립도서관] 역사적으로 살펴본 순창 여성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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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01 16:14 조회789회 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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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군립도서관] 역사적으로 살펴본 순창 여성의 힘
진정으로 함께하는 삶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군립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 순창 유적에 얽힌 여성 기행기 

                                                                                ---전지현 다문화가족지원센터 한국어 강사--- 

 

깔끔하고 아담한 도서관이 집 가까이에 있고,
문학기행을 위한 이론 강의를 토대로
현장을 답사하는 문학기행,
이 움직이는 도서관 속에 내가 있다.
참 멋진 일,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순창을 점점 사랑하게 되는가 싶다.

  
▲군립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기행에 나선 문학인들. 가장 먼저 찾은 귀래정에서 한 컷.

오늘은 군내에 있는 유적을 탐방하는 날. 아침 날씨는 왠지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배우며 익히는 즐거움을 아는 문학인들은 총총 모였고 우선 담양의 면앙정을 능가할 것이라는 귀래정에 올랐다.
1첩 16폭의 병풍으로 된 권선문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여걸,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의 아내, 귀래정의 꽃이자 순창 여성의 상징인 설씨 부인의 소개를 들었다. 신사임당에 뒤지지 않는 실력가란다. 고개 들어 순창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인지 순창 호반 대표 성씨는 신씨, 설씨 그리고 양씨란다, 순창에 사는 사람들은 신ㆍ설ㆍ양, 소위 이 양반들과 혼인하기를 소원했을 만큼 대단했었나 보다. 서로의 공감과 소통을 중요시하는 현대사회, 따스한 가슴으로 거듭나는 의식 있는 사람이 양반이라 할 수 있는 요즘, 순창의 대표 성씨로써의 신ㆍ설ㆍ양 이 무늬만이 아닌 진정 의식 있는 신ㆍ설ㆍ양 이기를 기대하고 싶었다. 귀래정 정상에 오르니 순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큼지막한 시비가 앞을 막고 서 있다. 깔끔한 서체에 깔끔한 시비였지만 어울리지 않는 “○○에 진주목걸이 같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발길을 옮겨 목포 문단을 주도했었다는 순창 출신 권일송 시인의 아름다운 시비를 둘러보고 내려왔다.
한 남자만을 애틋하게 사랑했던 관비 간아지에 대한 스토리를 나름 로맨틱하게 해석을 해 보며, 슬픈 전설 한 토막 전해지는 가마탑,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하는 이곳에 누군가가 소원을 빈 흔적도 보였다. 지리적으로 북쪽이 터져 있는 순창에 악귀와 질병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는 석장승이 읍사무소 뒤 새로 조성된 공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북쪽을 향해 보고 있어야 할 순화리, 남계리 두 개의 석장승이 서로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었다. 원래의 석장승이 세워진 이유와는 다른 것이 좀 아쉬웠다.
적성에서 점심을 먹고 안내를 해 주신 최훈 이장님은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늘 ‘왕 무덤’이라고 하는 말을 의아하게 생각해왔단다. 이장님의 끈질긴 노력 끝에 왕 무덤 발굴에 대한 성공담을 들었다. 왕 무덤을 답사한 후 다랑이 논길을 따라 배산임수로서의 풍수적 위치가 잘 어우러진 쌍용사지 절터, 이들이 혹여나 왕 무덤의 주인공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는 이장님의 표정이 싱그러웠다.
“매미가 부화하기까지 견뎌야 하는 인고의 세월이 선비의 정신과 같다”는 매미의 특징을 인용한 설이 있는 명창 이화중선이 살았고 공옥진이 들락거렸다는 임동마을의 매미터, 이름 모를 투기꾼들이 순창의 이런 집들을 사놓았단다. 바짝 아쉬워지는 맘을 여며가며 이씨 할머니 무덤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씨는 고려 말 남편이 최영 장군과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후 남편 고향인 남원으로 내려와 당시 남원이었다는 동계 구미에

  
▲순창읍 각시탑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둥지를 틀고 남원양씨의 대를 잇게 한 여인이다. 어쩌면 여성의 절개보다는 자손의 대를 중요시했던 그녀가 택한 땅 구미, 이곳에서 과거 급제한 후손 30여명이 배출되었으니 이 곳에서 하루 밤만 자면 시험에 붙는 행운도 있었다는 말도 전해진다고 했다.
구미마을 입구에서부터 여성들의 태고가 적힌 문패, 거북의 형상 그림 및 예사롭지 않은 벽화가 눈에 띈다. 남원 양씨 집성촌으로 600년 넘게 이어온 마을로 300호가 넘는 가구가 살던 이곳에 있었던 구미초등학교는 전국에서 유일한 씨족학교였다고 했다.
이러한 특별한 순창의 전통을 발굴 유지해 공공적인 차원에서 살아있는 순창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무언의 바램, 가슴 조여지는 아쉬움이 답사하는 내내 꿈틀꿈틀 거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늘을 이어갈 그날을 무언으로 기약하면서 차에 올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문화를 알고 바라보는 것과 그저 풍문으로 보는 것은 많이 달랐다. 권력으로보다는 진정으로 함께하는 삶이 무엇보다 중요하겠다는 것, 나누고 포용하며 공감하는 아름다움을 위해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
내가 사는 고장을 이해하고 그곳을 알아간다는 것이 큰 기쁨이라는 것, 오늘을 사랑하며 공감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행복이었다. 순창의 지기(地氣)를 내 안에 심어 순창의 여성으로 살고 싶은 욕망은 내가 살아있다는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순창지역신문 열린순창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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