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립서강도서관] 미술관으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3차 후기 (기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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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15-08-11 19:03 조회686회 2015.08.11본문
페르난도 보테로전 ? 뚱뚱함이란?
뚱뚱한 사람들이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중앙에 몰린 작은 눈, 코, 입이 넓은 볼과 턱살로 이루어진 얼굴 면적에 비해 턱없이 작다. 육중한 어깨와 가슴, 엉덩이는 작은 손의 반지와 시계, 작은 발의 하이힐과 대조되어 더욱 육중하다. 그들의 중량감이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그런데, 똑같이 뚱뚱하지만 소재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뚱뚱함의 다양성이랄까.
내 시선을 가장 오래 붙든 작품은 '욕실 (1989년 작)'이다. 젊은 여자가 알몸으로 욕실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파티에서 돌아와 목욕을 하려는 모양이다. 손에 든 빨간 드레스, 빨간 머리띠, 빨간 하이힐이 파티가 열정적이고 신났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육체는 젊고 육감적이다. 탱탱한 엉덩이는 손가락 끝으로 누르면 바로 튕겨 나올 것 같다. 하지만 작은 발에 신은 하이힐은 육중한 몸을 감당하기에 작아 보인다. 변기와 욕조 또한 그녀가 사용하기에는 작다. 변기에 앉은 그녀, 상상해보라. 젊을 날의 터질 듯한 욕망이 그녀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예수와 성직자들의 뚱뚱함은 위선과 탐욕이다. 뚱뚱한 예수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대신했을 리 없다. 십자가에 못 박혀 면류관을 쓴 예수의 모습은 뚱보 코미디언이 알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우스꽝스럽다. '그리스도 (2000년 작)'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이다. '바티칸의 욕실 (2006)'의 교황은 성장을 한 채 욕조에 누워있다. 욕조 옆에 난쟁이 같은 사제가 수건을 들고 부동자세로 서 있다. '잠자는 추기경(2004년 작)'에서 추기경은 침대 주위에 촛불을 켜고 옷을 갖춰 입고 자고 있다. 침대 아래로 묵주를 늘어뜨린 채 노곤히 자고 있는 그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콜롬비아는 카톨릭이 생활화된 나라이다. 보테로는 성직자들의 위선과 탐욕을 고발하고 싶었을까?
이런 위선의 모습은 '원예클럽 (1997년 작)'에서도 보인다. 드레스를 입고, 반지에 목걸이에 귀걸이에 하이힐을 갖춰 입은 중년의 여인네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원예에 필요한 호미와 갈퀴와 수도 호스이다. 부조화롭다.
보통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뚱뚱함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습들 같아 친숙하다. '음악가들 (2001)' '바느질 작업장 (2000)' '댄서들 (2002)' '거리 (2000)' '음악가들 (2006)' 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면사포를 둘러 쓴 신부와 손을 마주잡은 신랑을 그린 알몸의 남녀가 있다. '결혼 (2010 작)'이다. 귀걸이, 시계, 반지 등 장신구들이 화려하다. 반면 여자의 젖가슴이나 남자의 성기는 작고 쪼그라들었다. 벗겨놓고 보면 돈 많은 놈이나 없는 놈이나, 잘난 놈이나 아니나, 뚱뚱하나 날씬하나, 너나 나나 다 보잘것없기는 매한가지다. 한 꺼풀 벗기면 그냥 하찮은 몸뚱이일 뿐이다.
뚱뚱함이 슬픔으로도 다가온다. '미망인 (1997 작)'의 과부는 세 아이를 키우고 있다. 좁은 방에 빨래가 널려있다. 그녀는 남의 집 빨래와 다림질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녀 눈에 눈물이 흐른다. 요즘 사회에서 뚱뚱함은 가난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건강한 음식, 적당한 운동과 휴식 대신 정크 푸드와 과도한 노동의 결과물이다. '술 마시는 세여인 (2006)'과 '술 마시는 남자들 (2011)'의 바닥에 떨어진 수많은 담배꽁초에서 이들의 고단한 삶을 볼 수 있다.
'발레리나(2001)'와 '죽마 탄 광대들 (2007)에서는 다른 종류의 슬픔이 느껴진다. 뚱뚱한 발레리나라니, 요즘 같은 몸짱 시대에. 먼저 웃음이 빵 터지지만, 뒤따르는 감정은 씁쓸함과 슬픔이다. 광대를 보면 매번 그러듯이.
뚱뚱함이 이렇게 다양한 느낌으로 다가올 줄 몰랐다. 아마 각각의 감정들을 그때그때 따로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뚱뚱한 군상들을 한 자리에 마주하니, 각각의 감정들이 뚱뚱함이라는 하나의 주제어아래 모아진다. 흥미로운 경험이다.
전시를 보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90점 회화는 작품이 제작된 시기가 80년대부터 최근까지 대략 30년에 걸쳐있다. 그런데 그림의 스타일이 변화 없이 대동소이하다. 보테로는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주제나 소재가 아니라 표현 방식, 즉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좀 너무한 감이 있다. 뚱뚱한 남녀 인형 두 개를 제작해두고, 계속 옷만 바꿔 입힌 느낌이다. 그래서 지루했다. 굳이 90점까지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소재의 변주로 흥미를 줄 작정이면, 20점? 아니 30점 정도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비슷한 연계 상에서 보테로의 초기작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가 어떤 단계를 걸쳐 대중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킬 지금의 스타일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면 단조로운 전시가 조금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았을까 기대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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