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공지
반송도서관 : 동양고전 함께 읽기- 고려의 지식인과 한시편
2017.07.27
1,046

본문

반송도서관 : 동양고전 함께 읽기- 고려의 지식인과 한시편

한시와 함께 읽는 현대시 

 

김상미 

 

나는 대국의 황제. 태어날 때부터 신성한 몸이라 아무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직접 대면하지도 못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 황제이므로 모두에게서 고립되어 지냈다.

 

꽃피는 봄날에는 동쪽 궁궐에서 푸른색 비단옷을 입고 밀전병과 양고기를 먹었으며, 뜨거운 여름날과 시원한 가을날에는 남쪽 궁궐에서 흰 바단옷을 입고 개고기와 보이차를 마셨으며, 춥고 싸늘한 겨울날에는 북쪽 궁궐에서 검은 비단옷을 입고 돼지고기와 제비집 요리를 먹었다.

 

내가 거주하는 곳은 내가 입은 옷 색깔과 똑같고, 내가 타고 다니는 가마의 색깔과도 같았다. 그러나 누구도 나를 직접 대면하거나 나와 눈 맞추지 못했으며 눈 맞추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황제가 아니라 인간이 되고 싶고, 인간으로 살고 싶었으나

모두가 나를 신처럼 우러러보았다.

나는 한 번도 인간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무엇이든 전능하여

내가 백성들을 생각하면 백성들은 더욱 강건해지고

내가 전쟁을 생각하면 모든 병사들은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대국의 시인이라는 그 한 사람만은 감히 나를 황제가 아니라 인간으로 맞섰다. 나를 우러러보지도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그런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나는 그 눈을 통해 궁궐 밖의 눈 덮인 산야와 봄날의 강과 들꽃들, 그리고 환한 여름 달빛과 색색의 단풍잎들과 봄이면 연분홍색으로 물드는 도화나무 아래서 황홀하게 머리를 빗는 여인들과 술잔 하나로 황혼의 슬픔을 달래는 백성들의 처연한 노랫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토록 그리웠던 인간들의 세계를 그 눈에서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처럼 내 가슴에도 분노와 슬픔, 기쁨과 절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워했다.

 

천단(天壇)의 크고 작은 수많은 양초들처럼 나 역시 미세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일개 인간이라는 것에 흡족해하며 크게 웃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대국의 황제로만 살아야 하는 내 가혹한 운명을 그는 한순간에 자유롭게 해발시켜주었다. 나를 황제가 아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경지로 끌어내려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황제가 아닌 인간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리고 대신들이 입 모아,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그를 단칼에 내려쳐야 한다고 말했으나, 나는 그의 목을 치지도 그를 벌하지도 않았다.

 

그는 대국의 시인, 나는 대국의 황제.

우리는 단번에 서로를 알라보고 서로를 이해했다.

 

나는 황제로, 그는 시인으로 죽을 때까지 첩첩산중우로 둘러싸인, 뼈저린 고독 속에서 홀로 살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모두에게서 고립된 하나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독립국가라는 것을!

(* 백석의 시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