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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멀고 그리고 쓸쓸한/ 정끝별 글] 하늘은 오히려... 외롭고 쓸쓸한 운명을 부여함으로써 ...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
2017.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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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맑고 멀고 그리고 쓸쓸한/ 정끝별 글] 하늘은 오히려... 외롭고 쓸쓸한 운명을 부여함으로써 ...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

[맑고 멀고 그리고 쓸쓸한]

 

외롭고 쓸쓸한 것은 모두 그렇게 정해진 운명 때문에

불가해(不可解)한 것이지만, 하늘은 오히려

사랑하고 귀해하는 것들에게 외롭고 쓸쓸한 운명을

부여함으로써 사랑과 슬픔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사상사(2001.7.25. 초판),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④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정끝별 맑고 멀고 그리고 쓸쓸한’ 221쪽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