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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인연]
한 작품이 한 비평가에 의해 세 번이나 글 가운데서
다루어지고 그것에 대한 평가가 그 시인의 시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면 그 작품과
그 비평가와의 관계는 설사 그것이 공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보통의 관계는 아니다. 그러니
나와 이 작품과의 관계는 특별하다고 할 만도 하다.
문학사상사(2001.7.25. 초판),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④
[박성룡, <처서기(處暑記)>|김종길 ‘아주 특별한 인연’ 77쪽에서]
<처서기(處暑記)>
박성룡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뢰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까재깍 녹슨 가윗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밀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 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은 깨어 있다가
저 우뢰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