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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비만을 도려내는 시/ 김지숙 글] 김수영 시인의 면도날시는 내 정신의 비만을 날카롭게 도려내 주곤 한다
201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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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비만을 도려내는 시/ 김지숙 글] 김수영 시인의 면도날시는 내 정신의 비만을 날카롭게 도려내 주곤 한다

[정신의 비만을 도려내는 시]

 

명작은 일생을 같이한다고 했던가.

아직도 김수영 시인의 면도날시는 내 정신의 비만을

날카롭게 도려내 주곤 한다.

그러면 내 몸과 마음은 마냥 가벼워지고

나의 태만을 명쾌하게 질책한다.

 

문학사상사(1999.5.20. 초판), 나를 매혹시킨 한 편의 시》 ②

[김수영<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지숙 정신의 비만을 도려내는 시’/ 123쪽에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三十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원 때문에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