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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가을 : 3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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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가을 : 3

 Ⅰ. 일대기 : 인생-사계(四季)



내 삶의 강줄기를 내려다보며

최해동 | 전주시립완산도서관_전북

 

 

내 삶의 강줄기를 내려다보며
힘들게 군 생활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만 삼 년이란 내 젊음의
공 백을 어떻게 보충해야 할지 갈등이 생겼다. 고등학교 선배의 애인이 여
자를 소개하여 주었다. 부산 서면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녀는
아 담한 키에 매우 청순한 이미지를 풍겼다. 전주와 부산을 오가며 우리는
점점 사랑의 감정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나 나는 바로 결혼할 수 있는 상
황이 아니기에 그녀에게 이별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 고뇌는 일평생 나를
괴롭히는 죄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이별의 이유가 너무 무책임하고
유치하며 졸렬하였다. 제대 후 남자에게 여자가 생긴다는 것은 결혼을 앞둔
다는 책임도 뒤따르기 때문에 부담이 있었다. 여자 측에서는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것을 당연시한다. 제대 후 학교 졸업이나 직장 문제, 경제적 측면에
서 백수 상태라서 결혼문제는 중압감이 되어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지금의 아내는 당시 서울 중앙 농협에서 근무하다 당시 전라북도 농협
도 지회 자재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군에 가기 전에 가끔 데이트만 하고
지 냈는데 제대 후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처가 집을 드나들면서 결혼 문제가 구체적으로 이야기되
기 시작했다. 일단 저지르고 봤다. 아무런 준비도 없는 놈이 결혼을 한다고
하자 아버지는 몹시 실망하셨다. 큰 자식 결혼 때도 무척 실망하셨는데 목
표를 세워 공부를 계속한다던 아들이 느닷없이 결혼부터 한다고 하니 그
실망 감이 무척 크셨나 보다. 이동휘 전흥교회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나의 하객들은 대개가 호남 고시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자칭 ‘호남
의 백수’들이 공짜 점심이나 먹자고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시골에서는 친
척과 아버지 친구 몇 분만이 올라오셨다. 반면 아내의 손님들이 주를 이루
었다.
일단 결혼은 했지만 생계를 위하여 아내는 계속 직장을 다녀야 했다. 나
는 공부에 집중도 못하면서 고시 낭인이 되어 이리저리 어울려 다니면서
백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큰 애가 생겨서 농협에서는 시댁이 있는 남원농
협으로 발령을 내주었다. 농협 도지회에서 근무하다 남원농협으로 와서 근
무하면서 아내는 몹시 힘들어했다. 여름 어느 날 몸이 약한 아내가 임신한
몸으로 사무실의 에어컨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시골집으로 실려 왔다. 참
으로 내 처지가 한심스럽고 난감했다. 더 이상 공부한답시고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다는 절박감은 나를 현실적으로 변화시켰다. 고시를 포기하
고 감사직과 세무직을 기웃거렸다. 과목에 적응도 잘 안된 상태에서 낙방
은 당연했다. 안전기획부 해외파견 요원 선발시험에 도전하여 1차 시험에
전라북도에서 두 명이 합격했는데 내가 속해 있었다. 이어 3차 면접까지 치
른 후 최종적인 합격자는 전주시 경찰서 수사계장 한 명이었다.
아내는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두고 인후동 셋집에서 큰 아들을 키우고 있
었다. 아내가 직장을 그만둔 6개월 후 가을, 전라북도에서 시행하는 지방
직 7 급 공채시험에 합격하였다. 60대 1의 경쟁으로 10명이 합격하였던 것
이다. 그 이듬해 1984년 7월 1일에 임실군청으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33
세의 나이였지만 현실이 급한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임실군청에
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고시를 합격한 고등학교 동창생들과 비교하
면 열등감도 생겼지만 열심히 일에 몰두하여 극복해 나갔다. 임실군에서
몇 년을 근무하다가 소양 고시를 쳐서 전라북도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고시를 포기하고 공직에 뛰어들기를 잘했다는 생
각이 들었다. 당시 나와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은 지금까지 고시낭인으로
전락하여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
의 ‘사는 거야 어디서 살지’라는 작품에서 작가의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
서 평생 살았던 삶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다. 이렇게 내 삶을 글로 풀어내면
서 나 스스로 내 삶의 아픔을 보듬어 볼 수 있는 힘을 갖기를 기대해본다.
늦게 공직에 입문하였지만 관련 분야 업무를 정확히 파악하고 청렴·정
직하고 공정한 자세를 공직 수행의 기본으로 삼았다. 내가 공직에 있는 동
안 소신을 굽히지 않아 세 번의 교체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공직자로서 청
렴과 공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관계로 다시 중요 업무를 맡곤 했다.
한 예로, 임실군 상공운수계에서 개인택시 면허와 관련하여 당시 서슬
퍼런 양창식 국회의원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순위에서 가장 가까운 청웅
면 젊은이를 선정하였다. 도에서는 이를 모범사례로 시군운수담당들 교육
때 홍보하기도 했지만 나는 국회의원과 군수 부군수의 미움을 받아 그 자
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업무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또 하나의 소신이 있
었다. 어느 하찮은 업무를 맡는다 해도 최선을 다하여 그 업무를 추진한다
는 자세다. 그것이 앞으로 내 공직생활에 도움이 되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
었다. 맡은 업무마다 불평불만하지 않고 묵묵히 그 업무를 연구하고 개선
에 노력을 기울였다.
임실군 신평면 롯데부지 옆에 농공단지를 설립하여 주민 설득과 공장유
치 활동을 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도에 전입하여 감사과 조사계에서 근
무 할 때는 진안군 정천면 골짜기에서 불법 벌목을 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
고 직접 현장에 나가 확인하려고 계획했다. 이튿날 조사계 직원들과 지적
과 측량 팀을 구성하여 사흘간 불법 벌목현장을 조사하였다. 부산 동해펄
프 회사가 허가 받은 면적보다 무려 12ha의 넓은 면적을 불법 벌목하고 있
었다. 관련자들을 모두 사법기관에서 의법처리토록 조치하였음은 물론이
다. 이와 같은 감사업무 활동은 하나의 모범사례로 남았지만 그 후 피해자
들의 협박과 원망은 나를 많이 괴롭혔다. 그러던 중 청와대에서 새마을 업
무 우수사례를 발표까지 했던 한 이장이 교통사고로 죽는 일까지 일어났
다. 감사과 업무에 대한 회의가 일기도 했다
사회복지과 장애인 복지 업무 추진 시, 기존의 장애 종류별 시설 설치에
서 장애 구분 없이 통합 운영하는 시설을 전국 최초로 허가했다. 이 업무
담당자가 시설 허가에 따른 책임을 져야 했다. 기존 사례가 없는 통합 장애
인시설에 대한 허가업무였기에 나는 차 한 잔 마시지 않고 완벽하게 업무
를 추진하였다. 준비된 허가 관련 서류가 폴더 몇 개나 되었다. 그 후 중앙
부서에서도 감사를 할 때에 감사관은 내가 했던 시설 관련 허가서류를 기
준으로 시설 허가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였다고 후임자가 전해주었다.
사무관 이전까지 나는 개인택시, 주유소, 에너지, 농지전용, 사회복지시
설 등 주로 인·허가 부서에서 근무했다. 공직에 처음 발 디딜 때에 다짐했
던 맡은 업무에 대한 전문성·청렴·공정을 신조로 하였기에 내가 처리한
업무에 대한 항의 민원도 비교적 없었고 감사에 크게 지적당하는 일도 없
었다.
그 후 2000년 사무관 승진 후 남원시에서 왕정동장, 고향인 산동면장 을
하다가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 기획담당으로 다시 도에 돌아왔다. ‘2014
동계올림픽 ‘무주 유치를 위하여 불철주야 뛰었던 일, 문화예술과 에서 ‘토
요마당’확대 운영, 오지 주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하여 당시 시인이었던
양해완 차석의 아이디어로 ‘신나는 예술버스’를 기획하기도 했다. 시군 문
화 행사 날이나 오지 마을에 가서 예술 활동과 영화 상영을 하였다. 출정식
때 도지사가 가장 잘된 기획이라고 칭찬도 해주었다.
문화예술국 주무계장으로 있을 때는 국장과 함께 중앙부처에 가서 예산
활동을 하고 지역 국회의원 사무실을 방문하여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지원
활동을 요청하는 일이 많았다. 수레가 잘 굴러가려면 여·야의 수레바퀴가
두 개 있어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 지역의 대형 프로젝트 유치를 위
해서는 산·학 협의체를 구성하고 중앙부처를 설득하는데 행정과 협의체
의 공동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예산 활동을 위해서는 낙후지역 발전 지원이
라는 정치논리보다 예산주기 3년 사이클과 연계한 사업추진 3년 계획을 수
립하여 관련 절차 준비와 예비타당성조사를 위한 지원 대책을 철저히 세워
야 한다. 지역 도의원들이 머리띠 두르고 서울까지 마라톤을 한다든지 국
회 앞에서 농성하기 보다는 사업계획에 대한 근본적 접근이 필요하다.
도청 인사방침은 사무관 승진하면 일단 시군에 나가서 근무를 하다가 들
어오도록 되어 있었다. 나도 2000년 밀레니엄 사무관이 되면서 남원시로
내려갔다. 왕정동장을 거쳐 고향 면인 산동면장으로 근무한 지 십개월이
지났을 때, 도 인사 계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팀
에 발탁되었다고 했다. 고향 면장으로 좀 더 재직하여 고향발전을 위한 일
을 하면서 퇴직 후 일을 고려하면서 면민들과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다고
거절했으나 도에서는 박수칠 때 떠나는 게 좋다고 인사발령을 낸다고 하
였다. 도 인사 발령에 따라 3년여 만에 도로 돌아왔다.
처음 신설되는 기구라서 직원도 사무실도 없었다. 체육지원과 옆에 사무
실을 마련하고 직원이 배치될 때까지 나 혼자 있었다. 일주일 내로 직원을
배치해 주겠다던 인사과장의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까지는 한 달 가
량 의 시간이 걸렸다. 직원이 한 명 두 명 배치될 때 종자 씨앗보다 더 귀하
게 느껴졌다.
무척 힘들었던 초창기의 생활에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자 ‘2014
동계올림픽 유치 위원회’를 구성하여 법인체로 만들고 사무실도 구 경찰
청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한계수 정무부지사를 정점으로 2개과 30여 명
의 직원이 유치위원회 실무를 맡았다.
무주에서 90년대 동계 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한 경험을 살려 2010년도에
유치를 시도하였으나 강원도가 뛰어든 바람에 2014년에는 전북이 유치를
추진한다는 각서를 받고 강원도에 양보하였다. 그런데 강원도는 결국
2010 동계올림픽유치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전북도 강현욱 지사가 다
시 2014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는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나는 기획운영팀장을 맡아 동계올림픽 유치관련 업무계획, 예산지원, 의
회보고 등 지원업무를 맡게 되었다. 올림픽 관련 기구에는 국제올림픽위
원회(IOC)가 있고 국내에는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가 있다. 이 두 기구
를 상대로 유치활동을 벌여야 했다. 올림픽 유치를 위한 일은 세계 각국이
유치경쟁을 벌이는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강원도와 전라북도
가 서로 유치를 위하여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강원도
는 2010년 때 각서를 써 주었지만 시설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두 도간 올
림픽 시설 설치문제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며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각
서 내용도 전북의 시설이 조건을 충족할 때라고 주장했다. 각서를 받을 당
시 전북도의 2010년 유치위원회 책임자의 무능과 각서 속에 숨어있는 강
원도의 책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덥석 각서를 받아온 전북도의 행태가 한
없이 원망 스러웠다.
무주 김세웅 군수의 무주에서 강원 도청 정문까지 도보 행군은 강원도 에
대한 일종의 시위였다. 국가 올림픽 위원들의 애경사나 행사가 있을 때는 선
물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을 오갔다. 하루에도 두 번씩 갔다 와야 하는 일도
많았다. 서울에서 밤늦게 올 때 앞좌석에서 졸다가 눈을 떠보면 시속 160km
로 달리고 있었다. 이러다가 내가 도로에서 죽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강원도에서는 전북 무주의 남자 활강 코스를 계속 물고 늘어졌다. 결국
국가올림픽위원회의 중재로 두 지역에 대한 시설을 다시 점검하기로 했다.
전북은 무주 덕유산의 남자활강코스 부지를 다시 찾아야 했다. 남덕유산
정상에서 활강 코스를 찾았으나 국제 심사위원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현지
에서 내려서 정상에서부터 산을 걸어 내려오면서 예상지역을 면밀히 점검
했다. 그 결과 전북의 대체 코스가 남자 활강코스로 부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유치를 위한 전북도와 강원도의 싸움의 승패가 결정되고 말았다.
강원도에 스키장을 운영하고 있는 대기업들과 강원도의 로비가 느껴졌다.
2014년의 동계올림픽이 무산되고 전북은 세계 태권도 공원을 무주에 조
성하기로 했으나 배후도시가 없는 산속에 태권도 공원을 조성하는 일이 쉬
운 일은 아니었다.
지역의 경쟁력이 세계의 경쟁력이 된 오늘날 지자체는 각종 국제행사를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다. 행사 유치를 위해서는 좋은 인력이 배치되고 그
에 대한 예산지원도 원활히 지원되어야 한다는 점을 느꼈다. 유치업무가
힘드니 기존 부서에서 일하는 유능한 인재들이 오기를 꺼린다. 따라서 시
군에서 도로 전입하는 공무원이나 중앙 부서에서 내려오는 인사를 유치팀
에 배치시키고 있는데 이는 실패를 전제로 미리 웅크리는 짓이라고 생각한
다. 2014 동계올림픽 유치 조직을 강원도와 비교해 보면 대학생과 초등학
교 학생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인사는 만사다. 지역발전을 위한 경
쟁에서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던 전라북도의 한계를 여러 곳에서 느꼈다.
2009년 11월, 내 나이 57세 때, 나는 사무관에서 서기관급으로 승진했다.
그 당시 경쟁이 무척 치열했다. 각국에서 한 명 정도 승진시키려고 국장이
인사위원회에서 고성이 오가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일도 많았다. 자기 국
에서 승진 하나 시키지 못하면 그 국장에 대한 무능한 이미지와 그에 따라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는 인사 래프팅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문화예술과국 주무계장으로 있었다. 아마 도 역사상 국 주무
계장을 두 번을 하고도 승진을 못 한다면 이 또한 도 인사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같은 과에서 나와 승진 대상이 되었던 계장 한 사람은 언론사 사
장의 처남이었다. 인사 로비에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두 명 모두 승진 서
열 5위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하였다. 당시 도의회에는 교육복
지 전문위원이 공석이었다. 도의회에서는 집행부의 인사 견제를 받지 않
는 별정 4급 공무원으로 임용을 원하였다. 별정 4급 전문위원은 집행부의
감사나 인사권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집행부 눈치를 보는 일 없이 소신
껏 집행부 견제를 할 수 있었다. 의회에서 집행부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인사조치 당하는 일이 없어서 4급 승진 대상 공무원들이나 고
참 공무원들이 선호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 자리는 도의회 의장이 원하
는 인물이 아니면 갈 수 없는 자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경쟁자를 제치고 의회 의장의 승인이 떨어져 당시 명칭으
로 교육복지 전문위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교육복지 위원장도 의장의 결
정에 선선히 응하였다. 그 후 의회에 교육복지위원회가 새로 설치되어 교육
청 소관은 교육복지 위원회로 이관되었다. 그에 따라 명칭도 ‘환경복지위원
회’로 변경되었다. 내가 교육복지전문위원으로 왔을 때 위원회 소관 집행부
분야는 교육청, 복지국, 환경국 및 국 소관 사업소가 대상이었다. 예산 심의
및 관련 분야 조례 개정, 제정, 업무보고 및 감사가 주된 업무였다.
의회 전문위원은 해당 상임위원장의 업무보조와 집행부에서 제출한 모
든 공적 문서에 대한 검토 후 검토보고서를 작성하여 상임위원회에서 발
표하도록 되어 있다. 집행부에서는 의회에 제출한 예산안이나 각종 조례
안 등에 대한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가 나올 때를 기다려 의회 의원들의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 준비에 들어간다.
전문위원 시절 집행부의 각종 문서를 검토할 때 공무원들이 국어 어법사
용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국어 공부와 글쓰기 연습의 중요성을
느꼈다. 집행부 시절 지사의 각종 인사말이나 기획안을 작성하였지만 제
대로 된 문장을 쓰고 싶었다.
2012년 6월 30일. 드디어 정년을 맞이했다. 자유인이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이 비로소 보였다.  


▶ 이 글은 최해동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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