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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가을 : 2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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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가을 : 2

Ⅰ. 일대기 : 인생-사계(四季) 

 



 

나는 저 별이다

이현자 | 전주시립완산도서관_전북

나는 저 별이다
내가 56세, 남편이 58세인 때, 2003년 또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조차 없이
험난한 일을 했다. 사료 값만 해도 한 달에 몇 천 만원 들었다. 고추농장도 임
실에서 제일 먼저 비닐을 씌우는 농법으로 시작했고 수확량이 월등하게 좋
았다. 그렇게 내가 하니, 주위에 다들 내가 쓰는 방법으로 고추 농사를 짓곤
했다. 사실, 그 당시 나는 두려움이 별로 없었다. 해낸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렇게 시작하면 마침내 해내곤 했다. 나에게는 늘 용기가 있었다. 망하는 것
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인부는 모두 세 명이 있었는데 중국인도 한 명 있었
다. 그렇지만 모든 관리나 세세한 일거리는 내가 도맡아 해야 했다. 가축들
은 밤에 새끼를 많이 낳았다. 잠 한숨 못자고 새끼 낳는 것을 지켜봐야 했었
다. 하루에도 잠을 서 너 시간도 채 못 자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억척스
럽게 일을 했다.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해낸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2002년 12월 20일로 기억한다. 그 날은 대통
령 선거 다음 날이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내가 뱅글뱅글 지탱
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도는 거였다. 혼자서 터미널 근처에 있는 중앙
병원을 찾아갔다. 무조건 링거를 좀 놔달라고 사정을 했다. 초조하고 힘이
없었다. 아마도 여러 날 누적된 피로 탓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그날,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혼자서 운전해서 돌아왔다. 그리고 또 훌훌 털어
버리고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고등 검정고시를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수업을 다 마치고 학원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누군가 내 차 앞을 막
고 연락처도 남기지 않아서 나는 속절없이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시간이
많이 흐르니, 어떤 사람이 와서 차를 빼내주어서 예정보다 늦은 시간에 서
둘러서 집에 왔다. 그리고 그 날은 돼지를 출하하는 날이라서 그것에만 신
경을 쓰다 보니 벌써 하루해가 저물었다. 그렇게 어둑해져서 집에 왔는데
그 다음 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편이 맨홀 안에서 숨져 있는 것을.
그 사건 이후, 이상하게도 집이 무서워졌다. 너무나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가축농장을 하느라 애썼던 모든 것들이 거의 날려 보내
다시피 처분을 했다. 남편의 사망일은 2003년 2월 25일이다. 바로 고 노
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이었다. 나라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에 있던 그
날, 남편은 관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1988년에 했던 역학 공부
를 토대로 내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내 남편은 병술년으로 노무현 대통
령의 사주와 흡사했다.
하지만 극과 극이 통한다고, 남편은 사망했지만 노대통령은 최고의 영예
를 지니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 뒤의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말이다.
게다가 남편은 그 당시 군의원에 출마했었다. 누구나 다 남편이 될 줄 알았
다. 연설문을 작성해서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눈빛을 빛내던
남편을 기억한다. 선거 운동을 하며 도와주는 많은 분들의 말을 그대로 믿
은 게 잘못이었을까. 막상 선거일이 되자 우리 쪽 참모가 단 한명도 모이지
않았다. 다 된 것처럼 얘기하던 그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 경쟁하던
후보들 중에 예전부터 군 의원을 했던 사람이 마침내 당선이 되었다. 그것
도 불과 이십 육 표의 차이로. 남편은 그 뒤에 선거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다 찾아가서 선거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고, 그 것을 녹음하고 거기
에 일어난 비리들을 모아 법적인 대응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말렸다. 이미 그렇게 벌어진 것을 어쩌겠냐고 했다. 내가 그
게 하지 않았더라면, 남편은 분명 소송에 휘말려서 곤란을 겪었을 터였다.
그나저나 그러고 나서 십 개월 후에 돌아가신 것이다. 역학 공부를 하던 이
에게 들은 바로는 오히려 낫다는 거였다. 군의원에 낙선하고 돌아가신 것
이 다행이라는 것이다. 공무에 임해서 감투를 쓴 채 사망한다는 것보다 그
러지 않는 편이 돌아가신 분이나 남아있는 사람한테 낫다는 말로 알아들
었다.
남편이 그렇게 허무하게 가 버린 이후, 나는 그 집에서 도통 잠을 잘 수
없었다. 두렵고 무서운 느낌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무
슨 변괴라도 당할 것만 같았다. 일단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
음이 편한 게 제일이지, 돈은 다 필요 없었다.
2005년에 농장을 다 처분하고 정리했다. 황급하게 팔다보니 손해가 이
만저만이 아니었지만, 할 수 없었다. 땅까지 다 처분한 뒤 나는 전주로 주
거지를 옮겼다. 예정대로라면 사흘 후 검정고시를 치러야 하는 날인데, 남
편이 그 날 돌아가셨기 때문에 시험을 치지 못 했다.
그 뒤, 검정고시를 쳐서 합격했다. 나는 원래 시골의 땅을 활용해서 사회
사업을 하려고 했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지어서 소외된 계층과 더불어
살고 싶었다. 물론, 터전을 사라졌지만 그런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기
에 대학의 문을 두드릴 때, 자연스럽게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동안 배우지 못했던 탓에 지녔던 한을 풀고 싶었다. 배우는 게 그렇게 재
미있고 감사했다.
내가 잘 따라가지 못해서 더듬거리더라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
았다.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던 서러움은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하나 둘
씩 내 힘으로 극복해가게 되었다. 그동안 일 구덩이 속에서 빠져 살았다.
나 자신을 그 구덩이에 처박아 놓았던 거였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에서
나는 스스로 나를 칭찬하고 싶다. 그 무수한 어렵고 힘든 일을 다 해내면서
살아왔던 거였다. 공부에 대한 잠자고 있던 열정이 되살아나게 된 것은 아
마도 1985년, 이박 삼일로 산업공단에서 하는 새마을 연수교육에 참가하
면서 부터였을 것이다. 그때, 강의실 의자에 앉 아있으면서 나는 내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다함께 집단 토의를 했을 때도 나는 주도적으로 대화
에 참가해서 집단을 이끌었다. 뭔가를 배우고 행한다는 것의 재미를 느끼
기 시작한 거였다.
그 이후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것이 내 삶의 신조가 되었다. 아니, 내
삶의 유일한 보람이었다. 그 힘든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나에게 주는 큰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서해대학의 문
을 두드렸다. 2005년, 내 나이 58세였다. 학교생활을 할 때는 학교 아래 방
을 얻어 살았다. 나이는 들었지만, 어엿한 대학생이었다.
나는 학교를 무척 즐겁게 다녔고, 신나게 공부했 다. 결국 2007년 2월 13
일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였다. 동시에 케어복지사 1급과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졸업식에는 주위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오겠다고 했지
만, 다들 시간이 맞지 않는다며 애만 태우다가 결국 나 혼자서 졸업식에 참
석했다. 휴대폰으로 몇 장의 사진은 찍었지만, 휴대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기껏 몇 장 찍은 사진조차 사라졌다. 그렇게 원하고 원하던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생의 못 다 이루고 있었던 과제 같은 것을 제대로 해
낸 기분이었다.
졸업한 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전주로 이사를 왔다. 그러니까 2007년부
터 지금까지 이 집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는 쌍다리 천
변이 있다. 오십 미터 올라가면 어은교가 있고 중화산을 넘어가는 굴다리
도 보인다. 다리 밑에는 깨끗한 물에만 산다는 쉐리가 살고 천변으로는 갈
대숲이 하늘거리며 운치를 더해준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물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물에 오리와 물새들이 자주 놀러온다.
나는 여행을 즐기지만, 자주 떠나지는 못했다. 2003년 음력 4월 27일이
기억난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하여 비행기를 타고 언니와 함께 제주도를 갔
다. 산과 들이 내려다보이는 창공에서는 강줄기만 보였고 바다를 지나갈
때 드문드문 섬들이 보였다. 남편을 보내고 나서 너무나 울적해있던 나를
달래기 위해 기분 전환으로 언니가 마련한 여행이다. 제주도에 도착해 해
변 가에 걸으며 느꼈던 시원한 바람은 영원히 잊지 못할 바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젊은 시절 동안 지긋지긋하게 일을 했다. 고생이 이만 저만
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생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남편은 일
만 저지르고 내가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늘 바빴다. 한 번은 전염병이 돌아
서 새끼들이 죽어갔다. 그런 일을 두 번 정도 당하기도 했다. 역학을 공부
했던 것은 1988년인데, 누구의 권유도 없이 혼자서 찾아갔다. 국립역학 학
원인데, 서울의 용산에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간절하게 나를 알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역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나를 알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생각이 든 것은,
1985년 한국산업진흥원에서 열린 새마을 국민정신교육 때였다. 이박 삼
일의 일정으로 교육이 끝난 날에는 주제 발표 노래자랑 장기자랑 만담 등
의 경연이 있었는데 우리 방에 18명이 전부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
으로 참여했다. 우리 팀원들과 함께 방에서 좌담회를 했는데, 발표를 하면
서 강하게 내 머리를 치는 것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운명 같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를 알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
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열리는 법이다. 어느 날, 우연히 식사하러 온 손
님 중에 남녀 두 분이 식탁에서 열심히 무엇을 쓰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음식을 다 드신 뒤에 혹시 철학 공부하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디에서 공부를 배울 수 있냐며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메모를 해
두고, 뒤에 시간이 났을 때 찾아가 공부했다.
내 생에 이런 좋은 공부를 하게 된 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좋은 공
부는 천운이 있어야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중하고 행복하다. 역
학은 음, 양, 오행의 학문이다. 우주 공부이며, 인간 공부이고, 자연 공부이
며 수리 공부이기도 하고 과학 공부다. 세상 보는 안목이 밝아지고 넓어지
고 응용 학문이라 지식이 생긴다. 무엇보다 내가 성숙해진다. 새로운 관심
이 생겼고 지금도 문득 깨달음으로 연결 되는 것이 많다. 제일 먼저 나부터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이 밝아지며 내 자신이 귀하다
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다른 사람도 아끼며 도우려는 생각이 동시에 일어
나게 되었다. 내가 안전해야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항상 내
마음에 진실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나를 알아야 다른 사람도 자연히 알게 된다는 이치를 마음에 새기게 되
었다. 그렇게 초급, 중급, 고급반까지 총 12개월을 다녔다. 그렇게 사주명
리를 십 개월, 주역과 관상을 이 개월 공부했었다. 참 잘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대한 사명감을 알게 되었으며 폭넓은 인생길을 가보겠다 다
짐하게 했던 공부였다. 처음 시작할 때 명리학문을 배우려면 한문을 공부
해야 했다. 한문학원에 등록하고 열심히 하면서 양쪽으로 다니다보니 자
신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동기생들과 나란히 가야하는 길을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거였다. 그때 같이 공부한 동기생 중에 변호사가 있었
는데, 자신은 법 공부가 쉽지 역학이 이렇게 어려운 공부인줄 몰랐다고 했
다. 도대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난 이해력은 있
어서 조금씩 따라갔다. 운명적 굴레에 걸쳐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공부
에 기쁨을 느꼈다. 공부를 하고 나 자신을 깨닫는 순간에는 몇 시간 을 멈
추지 않고 울기도 했다. 묵었던 마음의 벽을 크게 허물어 버렸었다.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쯤은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니 그 당시 공부를 하
겠다는 결심을 잘 했던 것 같다. 단순히 급급한 대로 자식이 필요하다 고
마음을 동동 굴려가면서 병원이나 쫓아다니느라 마냥 시간을 보냈다면, 지
금의 나는 생각해볼 수가 없을 것이다.
공부는 언제나 내게 큰 힘을 주었다. 내가 글을 쓰는 방법도 모르는 상태
로 지금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럽지만 희망찬 길로 가고 있는 용기
를 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면서 내가 자랑스러운 그날
까지 홍익인간이 되고자 꿈꾸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기와
애국가를 사랑한다. 아침 4시 50분이면 텔레비전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
를 듣는다. 그렇게 하루의 시작을 애국가와 함께 한다. 그런데 국경일에 보
면, 특히 아파트에 태극기를 달린 집을 못 봤다. 국민의식이 애국하는 마음
으로 바뀌게 되기를 기원한다.
나는 그동안 세상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 거기에 눈을 뜰 뿐만아니라 미
래까지 내다보게 되었다. 홍익인간 사상과 단군의 역사를 접하면서 민족
애를 고취시킬 수 있었다. 국가관과 민족관이 새롭게 생기기 시작했다. 게
다가 내 인생을 스스로 존중하고 감사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큰 사람, 성인(聖人)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갈고 닦는 공부였다. 그 이후
기 공부를 했다. 금산사 앞에 기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을 찾아가서 배웠
다. 그것도 우연히 미용실에 가서 잡지책을 보다가 눈에 띄어서 연락하고
찾아가 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무엇인가 배우고 싶으면, 길이 멀다하지 않고 쫓아가서 배
웠다. 기 공부를 하면서 무엇보다 주위의 종교들을 훑어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함께하는 수련생들 중에서 내가 가장 빨랐다. 삼 일 정도
하는데 기가 내 몸에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부드럽게 쉬는 호흡이 중요
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 당시는 농장을 하느라 배운 대로 잘 행하지는 못했
다. 하지만 두 가지는 늘 지켰다. 입을 벌리고 호흡하지 않고, 코로만 호흡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분히 상식적인 호흡법이지만, 진리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코로
호흡하는 것은 건강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말을 안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부터 그렇게 했던 말이지만, 부정적인 말
이 결국 좋지 않은 기를 흐르게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죽겠
다, 지친다”는 말 대신 그냥 견뎌왔던 숱한 나날들이 있었다. 그래서 크게
아프지 않고 버텨왔던 것 같다. 이왕이면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을 가지려
고 한다.
지금도 나는 공부를 하고 있고, 또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 언제까지
더 이런 마음이 들게 될 것인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앞으로는 미술도 하
고 서예도 하고 싶다. 그러면서 내 마음을 가다듬고 싶다. 그래서 무릎이
아파도 무서워하면서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아픔을 즐기면서 여러 인문학
강좌 에 다니고 있다. 스스로 터득하는 용기로 상황을 이겨내고 있다. 그래
야 용기가 솟는다. 한 사 년 전쯤에 무릎이 심하게 꺾인 적이 있었다.
찻길을 건너다가 꺾인 것이다. 그 다음부터 아픔이 시작되었다. 병원에
가지 않다가 최근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았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니 연
골이 닳았다고 했다. 그동안 일을 많이 한 결과였다. 무릎의 통증이 심하기
에 내 생각에는 관절염이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였다. 오래 걷지 않도록 주
의를 들었는데도 나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
다. 아직 수술까지 권유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해서 안심이 되었다. 이제는
슬슬 내 몸을 아끼고 다스려가며 살려고 한다. 일 년 전에 수지침을 일 년
간 배웠다. 지부에서 시험을 쳐서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수지침을 배우기
까지는 이런 일이 있었다.
1989년, 기사년에 일어났던 일이다. 600평 땅에 배추를 심어 출하를 할
때이다. 무게가 나가는 배추들을 직접 들어다가 나르는 일을 하루 종일 했
다. 지나친 과로가 쌓인 채 저녁에 쉬어야 하는데 쉬지도 못했다. 긴 시간
동안 집에 온 손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갔다. 찾아온 손님 세 명을
데려다 준다고 남편은 집을 나갔던 시간이었다. 다른 손님은 다가고, 나와
띠 동갑인 연하의 한 여자만 남았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견디지 못
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응접실로 나와서는 그만 의식 잃고 말았다.
얼마 뒤에 내가 들어오지 않아 손님이 나와서 보니 진열장에 상체만 기
댄 채 고관절 밑으로 하체가 완전히 마비가 되어 뒤로 꺾어져 있는 나를 발
견 했던 것이다. 나는 아예 움직이지를 못하고 그 여자 손님더러 방의 서랍
속에 바늘이 있으니 찾아 달라 부탁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어서 시
어머니하고 둘이서 등을 뒤고 당기며 발을 앞으로 돌려 서서히 바늘을 찔
렀다. 마비가 된 상태라 아픈 줄 모르고 마구 찔렀다. 왼쪽은 십육 분쯤 지
나니 살아났다. 그러고 있으니 남편이 돌아왔다. 병원에 가자는 것을 놔두
라고 했다. 나를 방에 들여서 눕혀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청심환을 사오라
고 했다. 그것을 먹고서 누웠다 일어났다 하면서 바늘을 계속 찔렀다. 어지
럽기는 했지만, 병원에 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견뎌냈다. 오른쪽 발은 한 시간 반쯤 지나면서 살아나기 시작했
다. 손가락 끝에도 계속 찔러 댔다. 날이 밝아 임실에 있는 한의원에 나를 데
리고 가달라고 했다. 내 증세를 자세하게 하고 약을 지어달라고 해서 삼일
을 달여 먹고 쉬었다. 그렇게 현기증과 마비 증상은 끝이 났다. 참, 신기한
것은 그 당시 나는 침을 배우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바늘로 내 몸의 부분부
분을 찌를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때 내가 찔렀던 곳은 나중에 알고 보니 경
혈자리였다. 전문가가 들으면 놀라면서 만류하겠지만, 그 당시 나는 절박한
상황에서 내 몸을 스스로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내도
모르는 잠재되어 있는 치유의 힘이 솟아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
뒤에 당장 수지침을 배우고 싶었지만 양돈 사업을 시작한 뒤라 바빠서 시
간을 낼 수가 없어서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로부터 26년 만
인, 2015년 서금요법사 자격증과 수지침사 자격증 두 가지를 습득했다. 


▶ 이 글은 이현자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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