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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여름 : 6
2017.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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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여름 : 6
Ⅰ. 일대기 : 인생-사계(四季)


마음의 문을 열고
지니 | 전주시립완산도서관_전북


마음의 문을 열고
내 인생의 큰 역경은 부모를 떠나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다. 내 자신의 삶을
내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때부터였다. 결혼과 출산은 나에게 인생에게 가장
큰 변화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나를 정말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해
서 결혼했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그 점이 중요하다고 믿고 선택했었다. 그러
나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결혼해서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남편, 아기가 생
기면서 내가 벌어서 내 삶을 유지하는 건 물론이고 가족까지 부양하며 직장일
도 해야 하고 살림도 꾸리고 아이도 돌봐야 했다. 결혼 후에야 비로소 내가 부
모님의 노력과 희생을 먹고 자랐고 그 덕분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더 큰 시련은 남편이 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하던 일을 그만두
고 공부를 하게 하면서 시작되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그것
은 그리 쉽지 않은 길이었다. 부모 밑에서 편하게 살아온 나는 내 가족의
삶을 내 어깨에 전부 짊어지고 버텨내야 했던 시간들은 나에게 너무도 힘
들고 가혹한 시간들이었다. 정신적으로 버텨내야만 하는 많은 일들이 있
었다. 가슴 깊이 사무치는 힘겨움에 눈물로 밤을 보낸 적이 많았었다.
내가 온전히 혼자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어깨가 왜 무거운지, 어떻게 무
겁게 느껴지는 것인지 그때 알 수 있었다. 6년간의 힘겨운 세월에 나는 많
이 지치고 위축 되었다. 그 생활을 끝내고 나니 왜 일찍 끝내지 못했을까
너무 후회스러웠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똑같이 그 일을 겪으라고 한다
면 도저히 그때의 삶을 살아나갈 용기가 없다. 아마도 내 마음을 비우고 바
꾸고 살지 않는다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 그 당시, 남편을 사랑하면
서도 많이 미워하고 원망했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걱정할까봐 친정이
나 시댁 어디에도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나
는 가족과 나를 위해 그 모든 시간을 감당하고 버텨냈다. 나에게 정말 고생
많았고 수고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런 나를 꼭 안아 주고 싶다.
지금은 노쇠해진 아버지를 떠올려 본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출근하셨다가 저녁에는 술을 드시고 늦게 들어오셨다.
평상시 자식들에게 별다른 말씀을 안 하시는 그런 과묵한 분이셨다. 어쩌다
가 조금 일찍 들어오시는 날이면 거실에서 잠들어 있는 나를 바라보시면서 엄
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내 코를 가끔씩 만지셨다. 그때 나는 잠
이 깨기도 하였지만 자는 척 하곤 했다. 그때는 아빠가 왜 내 코를 자꾸 만지
시는지 몰랐다. 내가 성인이 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은 후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평상시 무뚝뚝한 아버지가 술을 드셨을 때 비로소 표현할 수 있
었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은 내 마음속에 그대
로 간직되어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뒤에서 아버지가 든든하게 지켜봐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어느 날 술을 드시고 조금 일찍 집에 들어오셔서
는 우리 형제자매 4명을 한방에 불러 모아 동그랗게 둘러 앉혀 놓고 말씀
하셨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께서 홀
로 힘든 농사일을 하시면서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중학
교도 못 갈 뻔 했지만 결국 전북대 수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
다고 하셨다. 그날, 아버지는 당신이 가지 못한 서울대를 자녀 중에 한명이
라도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지금 너희들은 편하고 좋은
환경인데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많이 속상하시다면서 눈물을 흘리셨
다. 평소 별다른 말씀도 없으시고 큰 산만 같던 분이 그날 조용히 흘리는
눈물을 보고 우리 형제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는 당뇨병으로 고생하셨던 상황이었다. 몸은 힘들지만, 식이
요법과 운동으로 이겨내시던 중이었다. 꾸준히 직장을 다니면서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사셨던 것을 알고 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가진 사
랑과 기대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소원은 이루어 드리지 못했다.
그나마 공부를 제일 잘하는 언니가 약학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지금도 내
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 아마도 그날, 자식에 대
한 염려와 사랑을 담은 채 소리 없이 흘리는 아버지의 눈물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임실에서 전주로 전학을 왔다. 금암동 모래내 시장 근
처 주택에서 2년 정도 살다가 인근에 새로 지은 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
다. 새로 지은 집이라 깨끗하고 시설이 아주 좋았다. 옥상이 있고 집안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마당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는
근사한 집이었다. 마당이 있고 마당 앞쪽으로 꽤나 넓은 정원이 있었다. 지
하실도 있고 마당 한쪽 대문 쪽에는 옥외화장실이 있었다. 그 집에는 우리
집과 본채에 붙어 있는 전셋집과 단독으로 지어진 전셋집이 있었다. 한 대
문 안에 세가구의 집이 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정원에는 대추나무, 감나무
두 그루, 그 외 몇 가지 작은 나무들 그리고 화초들과 돌나물이 잘 자라고
있었다. 안방에 누워서 창문을 바라보면 대봉시가 빨갛게 익어가고 하늘
은 푸르고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그 모습을 바라 볼 때면 마음이 한
없이 편안하고 태평스럽고 좋았었다. 나는 지금도 안방에 누워서 파란 하
늘을 바라보는 그때를 떠올리면 기분이 참 좋다. 그리고 지금도 공원이든
거실이든 방이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우리 식구는 부모님과 2남 2녀의 형제자매가 살았다. 나에게는 오빠와
언니 그리고 남동생이 있다. 우리는 마당에서 두 명씩 번갈아가면서 재미
있게 배드민턴을 하곤 했다. 공을 힘껏 높이 띄우다 보면 옥외화장실 옥상
으로 공이 올라가기도 하고 담을 넘어서 옆집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여름에는 지하실에 들어가면 약간 습한 기운도 있었지만 서늘하고 시원
했다. 밤에 옥상에 올라가서 돗자리를 펴고 누워서 별도 바라보고 도란도
란 얘기도 하면서 시원한 저녁을 보냈었다. 옥상에서 보면 다른 집들 옥상
들이 잘 보였다. 그리고 다른 집들 옥상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집들이 많
아서 다른 집으로 건너 갈 수도 있었다.
나는 언니와 방을 같이 썼다. 우리 방에는 언니와 내 책상 2개가 창가 쪽으
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책상에 앉으면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
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남동생이 입학하게 되어서 어린 동생을 손을 꼭 잡고 학
교에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남동생은 말을 잘 안 듣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개구쟁이였다. 동네 내리막길
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속력을 줄이지 못하고 벽에 그대로 전속력으로 부딪쳐
서 턱이 찢어져서 봉합 수술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길을 잃어버려 경찰서에
서 짜장면을 먹고 잠을 자고 있던 동생을 찾아오기도 했었다. 오락실을 많이
다녀 엄마에서 많이 두들겨 맞곤 했던 남동생은 지금은 결혼해서 반듯한 직장
을 성실히 잘 다니고 있다. 참 대견하다.
그 집에서 열 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5년 정도를 살았다. 대문
앞에는 우리 집만의 골목도 있었다. 골목길 가운데는 시멘트였고 양쪽은
흙으로 남겨두어 케일 등 여러 가지 야채를 심어 먹기도 했고 맨드라미, 사
루비아, 꽃창포 등 예쁜 꽃들을 심어 가꾸기도 했다. 이따금 사루비아 꽃잎
을 따서 꿀을 빨아 먹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는 참으로 행복했었다. 그 집,
그 골목길, 그 동네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그 시절이 그립다.
학창시절 선생님들 중에서 6학년 담임이셨던 유영종 선생님이 가장 기
억에 남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은 30대 초반쯤 되셨던 거 같다. 그
렇다면 지금은 33년이 지났으니 아마도 정년퇴직을 하셨을 것이다. 처음
에 6학년 1반에 배정되었다가 4월초에 학급을 재편성하면서 각 반에서 대
여섯 명씩 뽑아서 6학년 11반을 새로 구성했다. 교실은 건물 제일 가장 자
리로 복도까지 교실로 사용하던 공간이 넓은 반이었다.
선생님은 보이스카우트 지도 선생님으로 보통 남자들 보다 약간 긴 헤어
스타일을 하고 다니셨고 아주 진한 눈썹에 강한 인상을 주는 분이셨다. 선
생님은 자주 활짝 웃으셨다. 가르치시는 실력이 매우 뛰어나시고 욕심도
많으셔서 우리 반은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과목 중에 특히 수학을 굉장
히 중요시하셨고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최선을 다해 자기능력을 발휘해
서 최고로 성장하기를 바라셨던 분이셨다.
나는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반에서 그럭저럭 공부하면서 성적
은 중간 정도 따라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 시절에 책상
을 두 줄씩 붙여서 4개 분단으로 배치하여 아이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성
적순으로 자리에 앉게 하셨다. 자리 배치만 가지고도 아이들의 성적을 알
수 있는 교실 형태로 수업을 하셨다. 공부 잘하는 2개의 분단 아이들은 공
부를 못하는 나머지 2개 분단 아이들보다 우대해주면서 구별하여 지도하
셨다. 나는 그때부터 선생님이 무서워서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게 되었다.
수업 시간에는 물론 하교 후에 인근 시립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
히 하다보니 의외로 공부가 재미있기도 했다. 노력에 따라 성적이 잘 나왔
을 때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자신의 가치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반에서 1,2등으로 성적이 향상 되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이 제일 중요
시하는 수학 과목이 재미있고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선생님 때문에 상처 받은 아이들이 많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나마 잘해서 혼날 일이 거의 없었지만 많은 아
이들이 선생님의 막대기 봉으로 머리를 맞곤 했었다. 그리고 복도 끝에 간
이 그물 침대에 누워 쉬시면서 흰머리도 뽑게 하셨던 일들이 기억난다. 선
생님은 그런 특이한 분이셨지만 정말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열정을 쏟
아 부으시는 마음 따뜻한 그런 분이셨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지난번보다 성적이 떨어진 학생을 남겨서 두 명
씩 짝을 지어서 서로의 뺨을 때리게 하는 거였다. 내가 때리는 것도 상대방이
나를 때리는 것도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그때는 체벌이 당연하
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체벌의 효과가 좋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당시 우
리에게는 너무나 가혹했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선생님 덕분에 내 안에 숨어
있는 열정과 노력을 발견하고 계발할 수 있는 전환의 계기가 된 시기였다.
지금 내가 이런 모습으로 여기까지 온 것도 그때 내가 가지게 되었던 공
부에 대한 계기와 열정이 바탕이 되어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선생님
생신 때 몇몇의 아이들과 댁으로 찾아간 적이 있다. 선물을 드리고 사모님
도 뵙고 왔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의 방식은 물론, 잘못 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 당시 많은 아이
들에게 성실과 열정의 불을 지피게 했다. 살아가다가 잠시 쉬어가고 있는
요즘에 나는 선생님을 떠올려 본다. 매사에 열정의 불꽃을 피어 올리게 했
던 선생님이 내게 흐뭇한 미소를 보내오고 있는 듯하다.
대학을 진학하고 참으로 여유롭고 자유로운 시간이 내게 주워졌다. 하루
에 수업 4시간 정도면 받으면 되고 나머지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동아리
도 가고 커피숍에서도 가면서 수다 떨고 놀았다.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몸이 피곤하면 집에 일찍 와서 쉬기도 했다. 한창 때여
서, 몸이 고단하고 아프다가도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금방 나아졌다.
대학 1, 2학년 시절에는 걱정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었다. 참으로 인생의
휴식기이면서 자유로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이성에 대해서 첫
사랑이라는 감정도 느껴보고 그리워 해보고 또, 가슴 아프기도 했다. 순수
하고 풋풋한 시기였다.
1994년 대학 졸업한 내 나이 23살에도 나는 여전히 시험 준비를 하고 있
었다.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대학 친구 2명은 이미 4학년 때 지방공무
원 시험에 합격해서 졸업 후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학교도서관, 시립도서
관, 독서실 어디를 가든 졸업생과 대학생들이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모
두 나와 같은 공부를 하는 경쟁자들뿐이었다. 그때 나는 그래도 자존심이
있어서 7급은 못하더라도 9급 지방직은 가기 싫었다. 적어도 9급 국가직
공무원은 해야 한다고 생각 했었다. 내가 치를 시험의 경쟁률은 전라남북
도 광주권으로 경쟁률이 217:1 이었고 선발인원은 20명이었다. 주위에 온
통 그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인데 20명안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상
상도 안 되고 숨도 턱하니 막혔다. 졸업을 하고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도 시
험을 포기하고 적당한데 취업을 하면서 하나 둘 떠나갔다. 같이 공부할 친
구가 있었을 때는 의지도 되고 잠깐 쉴 때 이야기도 하고 점심도 같이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나는 홀로 시험 준비를 하면서 너무도 불안하고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견디면서 공부를 해야 했다.
드디어 시험 당일이 되었다. 시험은 7과목 과목당 20문제로 1문제당 50
초, 2시간 안에 풀어야 했다. 지금까지의 투자한 모든 노력과 시간이 2시
간에 평가되어 내 인생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단순하게
겨우 140문제 가지고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
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성의 없이 사람을 결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도 더 많고 시간도 더 많이 들여 인재를 제대로 뽑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험에 투자한 내 열정과 노력이 두 시간 안
에 평가받는 것은 너무나 씁쓸한 노릇이었다.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시험
을 마치고 나오는 그 순간에는 허탈하기만 하였다.
2달 정도를 기다린 끝에 드디어 1차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다. 새벽 0
시 자정이 되는 시간에 ARS자동응답기에서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전
화를 들고 버튼으로 내 수험번호를 누르고 멘트를 기다리는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멘트가 흘러나올지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축하합니다”라
고 할 것일지 아니면 “죄송합니다.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멘트가 나
올지 숨이 막혔다. 마침내 전화기에서는 경쾌한 음악소리와 함께 ‘축하합
니다’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정말 세상을다 가진 듯
기쁘고 눈물이 날 정도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때 그 순간을 어찌 말
도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가 21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수 많은 경쟁자
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합격했다니, 정말 세상이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합격으로 인해 그 동안의 모든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은 매순간 모두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시간으로 변해 있었다. 또 석 달 정도를 기다려야 2차 면접
이 있었다. 시험은 4월에, 최종합격자는 10월 정도에 발표했던 것 같다. 장
장 6개월 정도의 시간을 들여야 끝이 나는 것이었다. 1차 합격자 발표 후 2
차 면접을 기다리면서 풍남여중에서 한 달 남짓 기간제교사로 일하기도 하
였다. 전공을 살리자면 임용고시를 보아서 교사가 되어야 하지만 전북에서
는 뽑지도 않고 경기도 권에서 겨우 몇 명 뽑는 식이어서 일찌감치 포기했
었다. 훌륭한 교사가 된다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공무원으로 취
업준비를 했던 것이었다. 호남권 20명 모집에 1차에서 동점자가 6명이 나
와 25명이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면접에서 5명이 탈락되는 것이
었다. 면접에 관한 책도 사보고 면접 준비를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다.
엄마와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까지 가서 면접을 보았다. 면접시험장
에는 5명 정도 되는 시험관이 돌아가면서 개인적인 의견 같은 것을 포함해
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나는 소신 있고 자신감 있게 면접에 임했다. 어쩐
지면접관들은 나에게 자꾸 내 생각이 틀렸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거였다. 10
분 정도 면접을 봤는데, 나는 기진맥진해서 시험장을 나왔다. 내가 나온 뒤
2~3분도 채 되지 않아 내 뒤 번호의 한 남자가 면접을 끝내고 나오는 거였
다. 그 남자는 “면접관들이 나보고 근무 잘하라고 했어”라며 활짝 웃었다. 그
때 나는 ‘내가 떨어졌구나. 이미 어떤 조건에 의해서 동점자 중에서 합격자
가 결정되어 있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너무 허탈했고 심하게 낙담했다.
그 뒤 나는 더 열심히 공부하여 다시 한 번 더 도전했다. 커트라인이 조
금 올라갔는데 나는 지난해와 똑같은 점수를 받았고, 낙방하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2, 3개월 공부를 해서 닥치는 대로 시험을 봤지만 줄곧 떨어졌
다. 너무나 낙심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는 시험과목이 바뀌게 되었고 국가 직에 세 번째 도전하기 위해서는
생소한 행정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고시학원에 다녀야만 했다. 그러다가 전
에는 눈에도 들어오기 않았던 다른 직종에 시험을 봤다. 학원생 중에 몇 안되
는 사람이 합격을 했고 내 명단도 그곳에 있었다. 학원에서는 축하를 기념하
는 플랜카드도 걸어주었다. 나는 사실 하나도 기쁘지 않았지만 마음은 조금
놓였다. 그렇게 합격한 뒤 연수를 받고 결국 이것이 나의 기나긴 인생길인 직
장이 된 것이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오게 된 직장이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장을 19년 동안, 정말 충실하게 다녔다. 국가 직
에 최종 합격하지 못해 다른 길로 오게 되었지만 첫 합격 때 내가 느꼈던 성
취감과 기쁨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때의 그 가슴 벅차오름을
잊을 수가 없다. 나에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갚진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취직 시험에 합격하여 발령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다니던 영어회화 학원
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다. 1996년 10월이었다. 그 때 남편은 대학교 3학년
생이었다. 수업 중에 둘 씩 파트너가 되어 영어회화를 하던 중 탁구를 좋아
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게 인연이 되어 밖에서 따로 만나서 탁구를
치게 되면서 사귀게 되었다.
처음으로 남편을 본 것은 그 전이었다. 학원에서 스쳐가듯 봤는데, 문에
기댄 채 외국인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첫눈에 호감 가는 스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날수록 남편의 장점이 돋보였다. 웃는 얼굴이 아
주 밝고 환했다. 매사에 긍정적이며 낙천적인 면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
다도 나에게 칭찬을 많이 해줘서 나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1997년에 발령을 받아서 첫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4월인 내 생일
날이었다. 그러니까 만난 지 6개월쯤 되던 날이었다. 한 살 연하이고, 학생
인 남편과 직장인인 내가 어설프게 데이트를 시작하고 있었다. 남편은 대
학교 4학년이었는데, 아르바이트로 막노동을 했다. 그렇게 번 돈을 마련하
여 시내 보석가게에서 내 마음에 드는 목걸이를 사주었다.
진한 청색 다섯 장의 꽃잎 모양의 목걸이다. 지금도 이것만큼 마음에 드
는 목걸이는 없다.
꽃잎 모양의 목걸이는 20년 전 당시에 십 만원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
다. 직장을 다니는 나에게는 아주 큰돈은 아니었겠지만, 당시 학생인 남편
입장에서는 달랐을 거였다. 나에게 꽤나 비싼 선물을 해 준 것이었다.
나는 보석에 그리 많은 관심과 욕심을 갖는 성향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도 모르겠지만, 이십여 년 동안 거의 청 꽃잎 목걸이만 주로 하고 다녔다.
결혼 때 받은 예물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값은 덜 나가지만, 남편이 나를
소중하게 여겨줬던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정이 많이 가고 좋다. 아마도
내가 죽는 날까지 즐겨하고 다닐 것 같다.
작년에 남편과 딸아이가 함께 돈을 모아서 내 생일 때 순금 2돈의 목걸
이를 선물해 주었다. 순금이라 더 값나가고 색깔도 훨씬 예쁘게 빛나지만,
나는 여전히 청 꽃잎 목걸이가 더 마음에 든다.
생각해보면, 남편은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 주었다. 한창 연애 하던 시절
에 남편은 그저 평범한 나를 진심으로 소중하고 예쁘고 한없이 귀한 존재
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 시절에 나의 행복감과 자존감은 내 인생에서 최대
치였던 것 같다. 청 꽃잎 목걸이는 바로, 남편으로 인해 느꼈던 한결같은,
무한한 사랑의 의미이다.
남편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꾸준하게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주고 아
끼고 사랑한다. 그동안 속도 많이 썩게 하고 마음고생도 시키기도 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리고 또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있지만, 여전히 나만 변함
없이 사랑해 주는 남편이 한없이 고맙다.


▶ 이 글은 지니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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