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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여름 : 5
2017.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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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여름 : 5

Ⅰ. 일대기 : 인생-사계(四季)



사회생활

아름다웠던 날들 20대 초반

권민정 | 울주옹기종기 도서관_울산

 

 

사회생활 아름다웠던 날들 20대 초반
중고등학교 6년 자취생활을 청산하였다. 나이가 과년한 딸 집 밖에 둘 수
없다는 부모님의 지론이었다. 대학교를 진학하지 않았기에 내게는 취업이
라는 문을 두들겨야만 하였다. 하나의 꿈이 꺽였다고 주저앉아서 신세 한
탄만 할 수 있는 그런 때는 아니었다. 동네 친구들 중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못하고 다들 공장으로 미장원으로 일 하려가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도 부
모님에게 감사하여야 하는데 언제까지 부모님만 원망할 수는 없었다. 아
버지의 잃어버린 20년 때문에 왕자마냥 살아가는 사촌오빠와 너무나 비교
되기에 투정도 더 세게 부렸는지 모른다.
오빠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동생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나는 경
주군청에 근무하게 되었다. 공장으로 일하려 가는 것은 부모님은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에 몇 개월을 집에서 쉬었다. 어쩜 돈이라는 것을 받아만 쓰
다가 내가 벌어서 쓰는 것 이었다. 엄마에게 돈을 주어 계돈을 조금 붇고는 신발도
맞추어 신고 옷도 맞추어 입고하였다. 학교 다닐 때도 타지 않았던 통학버스를 타
고 그렇게 5년을 경주군청에 다녔다. 풋내기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하지만 주
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한 것 같다. 민원실에 근무하면서 얼굴 찡그리지 않고 웃으
면서 민원인을 맞이했다.
1894년 10월 이용의 10월의 마지막 밤을 들으면서 경주 시내를 배회하
였다. 순영이, 연숙이, 영미, 강일이 이렇게 모여 지금도 사진 찍기를 좋아
하지만 그때도 그렇게 사진 찍기를 좋아하였다. 명절이면 친구 집에 가기
를 좋아하고 우리들의 약속에 충실하며 그렇게 추억을 만들었다. 어쩜 경
주를 사랑하며 그때부터 경주를 즐겼는지 모른다. 경주역 앞에서 분황사
황룡사 절터를 지나 안압지 쪽으로 하염없이 걷는다. 안압지에 들려 박물
관을 구경하고 반월성을 지나 계림 숲을 걷는다. 첨성대를 지나 천마총 돌
담길을 돌아 쪽샘 골목 쌈밥집에 앉아 밥을 먹을 때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
던가? 그렇게 꿀맛처럼 맛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스스로 경주를 사랑하
는 사람들이며 이렇게 걸어야만 제맛 이라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겨 놀
았다.
지금도 즐겁게 놀았다. 불국사를 사진을 찍고 안압지를 찾고 예전에 즐
겨 찾던 곳 새로 생긴 곳들을 배회하며 경주사랑놀이를 아직도 열심히 하
고 있다.
여름이면 쪽샘 골목 끝자락에 있는 명륜당을 찾았다. 명심보감 명륜보감
을 배우며 유교문화를 지겨워하였지만 나도 그 일원임을 부정할 수도 없
다. “使仁人으로 各有期仁하여 行天之 大道하고 立天下地 正立하여 得
期得자는여민유지하고여 如民有之하고 不得知자는 독신기신하여 위무
에 불굴하고 빈천에 불아하며 시 대장부지 처세야라” 지금은 다 기억나지
않는 이 문구를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대청마루에 앉아 토요일 오후면 옛
날 사대부집 자제들이 하듯 글 읽기를 흉내내며 유교를 공부하였다. 여자
였지만 남자들의 세계가 더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다행이 군청에는 도서
관이 있었다. 책을 대출해서 읽었다. 공부하는 꿈은 접혔지만 자유로운 영
혼이 숨쉬기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남자 직원들이 풍수를 하며 책을 복사
하여 풍수에 대해 설명을 듣기도 하고 주역 책을 보기도 하며 동양철학에
심취하였다.
도가의 노장사상, 우리민족의 선도 등 중고등학교 때 관심을 가지지 않
았던 분야에 열을 올렸다. 내 마음속에 숨은 열정 살림 살아가는 아낙의 길
이 아닌 선비의 도를 배우고 익혔다. 백부님은 좋아하셨다. 오빠들은 관심
이 없는 유교에 대해 공부하고 배우고와서 얘기하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지
금도 눈에 선하다. 길이 아니면 행하지를 말고 내 말이 뱉어지면 바로 실행
에 옮기며 남의 말을 하지 않았다.
아녀자가 되기보다는 대장부의 처세술에 더 열중하였는지 모른다. 허난
설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나인지도 모른다.
24살 되던해의 가을 군청의 여직원 12명이 강원도에 있는 노인봉과 소
금강을 종주하는 산행을 갔다. 내가 총무였는데 나이 많은 언니들은 가지
를 않아서 내가 통솔하여야했다. 강릉까지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노인
봉으로 향하는 길은 순조로웠다. 숙소에서 잠을 자고 아침 9시부터 길을
걸었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평탄한 오르막길이라 12명의 청춘은 즐겁기만
하였다. 하지만 여행 준비되지 않은 산행 즐거움은 끝나가고 있었다. 소금
강으로 내려가는 경사가 심하고 길이 험하였다.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이름
은 기억나지 않는 언니가 소금강 계곡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같이 떠난 여행
함께 하산을 하여야 했다. 포항에서 산행 온 남자 분들에게 부탁을 하였다.
20kg도 넘는 등산 배낭을 대신 내가 지고 쓰려진 일행을 산 아래까지 좀
내려달라고 같은 고향사람들이라고 승낙을 하여주었다. 내 배낭만 해도 짐
이 버거운데 텐트까지 넣은 남자의 무거운 배낭이 힘에 버거웠다. 하지만
져야만 했다. 9시 밤 열차표를 예매해 놓았는데 그 시간은 맞출 수가 없었
다. 아마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고 또 걸어서 저
녁 10시가 다되어 강릉역에 도착을 하였다. 표는 환불받았지만 70%만 환
불 받을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떠나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강릉에 살고
있는 이모 집에 전화를 하였다. 마침 이모 집 식구는 주문진에 가고 열쇠
있는 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일행 12명과 우리 때문에 기차를 놓친
포항에서 온 두 분의 남자 등 14명은 이모 집에서 지친 몸을 쉬었다. 경비
를 넉넉하게 가져가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렇게 이모 집에 민폐를 끼치고 입석기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오는 길
우리는 정말이지 앉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앉아서 눈을 붙이며 집으로 돌
아 올 수 있었다. 내가 나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내 몸속에는 강인하고도
강한 열정과 책임감이 있음을 몸소 체험한 여행이었다.
공무원생활이란 민원인을 대하는 것이지 일을 창조적으로 하고 책임감
을 느끼는 그런 것은 아니다. 을지훈련을 하는 여름이며 매년 을지훈련을
하고 해마다 같은 계절 작년에 제출한 통계를 보고 올해 또 맞추어 내면 되
고 내 맘속에 존재하는 열정을 태우고 성취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데
미안, 실락원 복락원, 독서는 잡식을 하였다. 어느 날은 세익스피를 읽고
어느 날은 정신분석학 어느 날은 만화책 탐정소설 하이틴 소설 무협지 가
리는 것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글귀는 어느 구도자의 노래
청산은 나를 보고 묵묵히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욕심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내가 좋아하는 글귀였기에 인쇄소에 가서 메모지 마다 프린터 한 나만의
낙서 장을 가지고 있었다. 읽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쓰는 것을 좋아하였다.
3권의 책은 되었음직 한데 지금은 하나도 가진 것이 없다.
그러던 내게도 변화가 왔다. 26살 결혼을 하라고 했다. 결혼 배우자의 조
건 아무리 가문이 좋아도 맏이면 되지를 않았다. 지차이고 사람 야무지고
직장이 든든하면 된다고 하였다. 정말이지 그런 사람이 우리 남편이다. 엄
마 아버지가 선을 보고 눈이 날카롭고 차남이며 울산에서 직장이 든든한
신랑감을 고른 것이다. 선을 보고 일주일 만에 어른들이 결혼 날짜를 잡아
서 한 달 안에 결혼을 하였다. 나의 결혼 내가 선택하지 않았기에 항상 아
쉬움은 남는다. 내가 직장 다니던 때 여자가 직업이 뚜렷하면 남자는 백수
가 많던 때였다. 애들 키우면서 생겨도 챙기며 직장 생활하는 선배들이 좋
은 것만 같지 않았다. 결혼하기 1주일 전 1989년 12월 31일 사표라는 것을
내고 일주일 남은 결혼준비를 하였다.
이렇게 나의 처녀시대는 일 막 일장 막을 내린다.


▶ 이 글은 권민정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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