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사례집
공지
[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여름 :1
2017.02.13
1,098

본문

[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여름 :1
Ⅰ. 일대기 : 인생-사계(四季)


아름다운 추억!
행복한 미래
조영남 | 울주옹기종기도서관_울산

20대 시절 이야기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대학을 가기는 쉽지 않았다. 학교에는 입시 준비하
는 반이 없었고 취업을 위한 과목 위주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혼
자서 공부하고 시험을 쳤지만 점수는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교육
대학교가 아니면 대학을 보내줄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결국 재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우리 집 경제사정으로는 재수를 절대 시켜줄
수 없었다. 셋째, 넷째오빠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둘
째 오빠가 딸 쌍둥이를 낳아 새언니 혼자 키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20살에 질녀를 돌보는 보모가 되었다. 질녀를 키우면서 틈틈이 책 읽고 입
시학원을 다니며 입시 공부를 했다. 하지만 또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다
취직을 했지만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직장을 다니면서 통신대
학을 다녔다.
직장생활 하면서 대학을 2년쯤 다니다 결혼하게 되었고 아이가 생기면
서 결국 공부를 중단했다. 나 자신보다는 남편과 아이가 더 중요하다 생각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한우리 수업을 한창 하던 40대 후반 사이버대
학에 입학해서 공부했다. 아내, 엄마, 일, 학생 1인 4역이 힘겨워 1년 정도
하다가 휴학하고 말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공부를 하려고 시도했지만 건
강에 무리가 갈 것 같아 도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에게 대학은
아직도 끝내지 못한 숙제 같은 것이다. 이력서를 낼 때마다 가장 힘든 부분
이 학력이다.
자격증과 경력은 충분한데 혹시 학력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늘 마
음 쓰인다. 지금도 가장 후회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 갔다면 어떤 모
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
는다. 나름대로 나의 능력을 개발하여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행복
하다. 단지 대학이라는 숙제를 다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 대학교 친구 황윤경, 윤호연

직장 생활
내 적성에 맞는 직장을 구하느라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돈이 없어
힘들어했고 나의 무능함에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많이 괴로워했던 시기로
일기장 제목에 “이 순간은 정말 괴로웠다”라고 적었다.
1986년 4월 22일 드디어 부산에 있는 범아공사라는 수출입검수회사에
취직을 했다. 수출입서류를 처리하는 타이피스트가 되었다. 처음에는 부
산시 해운대구 재송동에 있는 CY라고 부르는 컨테이너 야적장에서 1년 남
짓 근무했다. 남자직원 5명에 여자 직원 2명이 컨테이너를 사무실로 개조
한 곳에서 근무를 했다. 그러다 중앙동 본사 영업부로 옮겨서 근무하게 되
었는데 여자 직원 8~10명에 차대리님, 박과장님, 그리고 남자직원 1명이
있었다.
문 열고 들어가면 총무부, 입구에는 노조 위원장님이 같은 건물에 있었
다. 여자들이 많다보니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가 있어 처음에는 좀 껄끄러
웠다. 특히 나의 입장이 참 곤란했다. 영업부에는 나와 나이는 같지만 선배
인 여사원이 2명 있었다. 초등학교에 9살에 입학했으니 나이는 같아도 선
배여서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요상한 현실. 좀 억울했지만 입사도 졸업도
늦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일이 없는 시간이면 주로 책을 많이 읽었다. 직속상관이었던 박과장님은
독서하는 모습을 아주 좋아해서 여직원 생일 때 잡지나 책을 선물해주었
다. 사무실이 있던 중앙동은 그 당시 부산에서 제법 번화가였기에 지하상
가에 코오롱과 롯데상가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코오롱 상가에는 문방구
겸 서점이 있었는데 단골손님이 될 만큼 책을 많이 구입해서 읽었다. 월급
의 30퍼센트가 책값으로 나갈 정도였다. 그 인연으로 서점 주인이 내가 결
혼할 때 선물로 앨범도 선물해 주기도 했다.
범아공사 첫 월급은 126,810원 이었다. 월급은 박하지만 근무조건은 아
주 좋았다. 9시까지 출근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
는 대통령이 와도 업무를 봐주지 않는다”라고 할 정도로 철저히 자유 시간
이었다. 그래서 상가에 내려가 점심을 먹고 공연도 보고 쇼핑도 즐기다가
1시에 맞추어 사무실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6시면 정확하
게 퇴근했다. 또 여사원을 위한 복지도 잘 되어 있었다. 한달에 하루 생리
휴가가 있었고, 문화생활을 위한 연극. 영화표지원, 요리, 사군자, 등공예
등도 배울 수 있도록 학원과 협약해서 지원해 주었다. 그때 만든 등공예 거
울은 25년이 넘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회사 내에는 산악회가 있어 한 달
에 1~2회는 등산을 다녔다. 지리산, 설악산, 속리산, 금정산, 송광사, 쌍계
사, 천황산, 대둔산 등 전국의 명산을 다녔다. 때로는 회사의 이사님, 계장
님, 과장님과 같이 때로는 우리 영업부서끼리, 때로는 여사원들만 참 많이
도 다녔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등산은 속리산이다. 1989년 8월
19일 여사원 3명이 1박 2일로 속리산으로 등산을 갔다. 토요일 오전 근무
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속리산 마을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었다. 그때는
인터넷으로 숙소가 예약되지 않아 현지에 도착해서 숙소를 찾는 경우가 많
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숙소주인들의 호객행위가 한창이었다. 감나무집이
라고 외치는 소리에 주인을 따라 가려고 하니 남자 2명이 같은 숙소에 간
다고 승용차를 타라고 했다. 그때 ‘인신매매’라는 말이 뉴스에 종종 나올
때였다.
“우린 인신매매단입니다.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라는 농담도 하며 감나
무집이라는 숙소에 머물렀고 함께 속리산 정상까지 등산했고, 그 남자들
의 차를 타고 버스 정류장까지 편하게 왔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시간에
날씨가 변덕을 얼마나 부렸는데 무지개를 몇 번이나 보고 쌍무지개까지 보
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그 남자들과의 인연은 대둔산으로 이
어졌고 대둔산 산행 때는 충남 청원군 입장에서 거봉농장을 하는 남자가
거봉을 가져와서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다음 산행도 약속하고 몇 번의 편지도 주고받았다.
1986년 4월 22일 입사해서 1990년 11월 10일까지 약 5년 정도 다니던
직장은 결혼을 하면서 퇴사하게 되었다.

자취생활
직장을 구하는 동안 잠시 언니 집에 얹혀 살다가 취직을 하면서 자취를 했
다. 처음에는 부산시 진구 가야3동에서 친구 미옥이와 둘이서 자취생활을
시작 했다. 적은 월급으로도 살 수 있는 집. 리어카도 들어가지 못하고 짐
을 일일이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골목골목을 돌아 작고 초라한 방을 구했
다. 도시살림에 서툴러 조립식 옷장을 사서 조립을 못해 며칠 동안 옷을 쌓
아 두었고, 연탄을 사용한 적이 없어 연탄 불구멍 맞추는 것이 어려워 친구
미옥이가 거의 연탄을 갈았다. 우리 방 옆에는 작고 더러운 도랑이 있었는
데 수시로 부엌에 쥐가 들어와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또 옆방에 세 들어 사는 신혼부부는 자주 싸웠던 기억이 난다. 열악한 환
경의 자취집에서 2개월 20일을 살다가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게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연탄가스 때문이었다. 5월 어느 날밤. 미옥이는 일찍 잠을
자고 나는 책을 읽는데 조금씩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생각하고 책을 덮고 잠을 잤다. 자다가 배가 너무
아파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다가 부엌에서 쓰러져 구역질 하는 소리에 친
구 미옥이가 일어나 부엌에 나와 함께 쓰러졌다. 그러고 얼마 후 우리는 알
았다. 연탄가스라는 것을. 그래서 정신을 차려 겨우 주인 할머니를 찾아갔
으나 그날따라 할머니가 계시지 않았다. 우리는 할머니방 앞마루에서 오
돌오돌 떨면서 아침이 오도록 기다렸다. 다음날은 회사를 결석 할 만큼 심
하게 가스를 마셨다. 고향에 가서 연탄가스 마신 이야기를 했더니 “다 큰
딸 일갈뿐 했네”하시며 당장 이사 하라고 하셨다. 한 달 만에 어렵게 새로
구한 집, 부암동으로 이사를 해서 친구들(미옥, 영미)과 3명이 함께 자취하
게 되었다. 1년 남짓 살다가 미옥이 언니 집에서 3명이 함께 계속 자취를
했다. 그러다 영미는 마산으로 떠나고 미옥이는 언니집 근처에서 나는 6촌
동생 영미와도 1년 정도 자취했다. 그리고 6촌 동생 영미도 동생 영만이가
서울에서 내려와서 영만이와 같이 자취한다고 떠나고 나는 같은 회사 동
생 문지옥이와도 자취를 했다. 자취를 할 때 열쇠도 없이 살았으며 친구들
이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살 때도 있었고, 꼭꼭 열쇠로 문단속을 잘
하고 다녀야 할 때도 있었다. 열쇠 없이 생활할 때는 도둑을 맞은 적이 없
었는데 열쇠로 문단속을 잘 해두었는데 도둑이 들어 썸뜩했던 기억도 있
다. 부산시 진구 연지동 어린이 대공원 근처에서 6촌동생 영미와 자취생활
할 때였다. 그 집에는 많은 세입자가 살았다. 옥상에 빨래를 널어두면 가끔
없어지기도 해서 모두들 출근할 때는 꼭꼭 문단속을 하고 나갔다.
1988년 10월 17일 월요일. 문을 꼭 잠그고 출근했다 돌아오니 자물통이
빠져 있었다. 순간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등골이 오싹 했다. 방안은 깨끗했
고 재산목록 1호인 카세트만 없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가 다치지
않았고 카세트만 가져갔다는 사실을 위로해야만 했다. 항상 라디오를 듣
거나 음악을 들어야 잠을 잤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일어났다. 카세트라디
오는 알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월급과 보너스를 받아 거금 84,000원을 주
고 새로 구입했다. 그러고 그 집에서 나와 새로운 집을 구해 자취를 했다.
자취방 구하는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퇴근 후에나 주말을 이용해
골목골목 붙어있는 셋방 전단지를 보며 우리 형편에 맞는 셋방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사 또한 힘들었다. 조금 멀면 용달차를 빌려 이사했
고, 큰길까지는 용달차가 들어가도 골목길은 일일이 손으로 옮겨야 했다.
가까운 거리는 최대한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리어카를 빌려서 이사를 했
다. 자취하면서 연탄불은 난방으로 곤로는 밥하고 반찬하는 용도로 사용
했다. 아침, 저녁 밥해먹고 직장 다니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시골에
서 자란 우리는 밥심으로 산다고 자취하면서도 꼬박꼬박 아침 챙겨먹고 외
식보다는 집에서 반찬 만들어 밥은 잘 챙겨먹었다. 부모님은 늘 바빠서 자
취방에 한 번도 와 본적이 없었고, 반찬도 직접 만들어 먹었고, 김치까지
담가 먹었다. 친구 미옥이는 감자 된장찌개를 잘 만들었고, 6촌 동생 영미
는 카레를 잘 만들어 전기밥솥에 가득 만들어 두었다가 이틀씩 먹기도 했
다. 직장 다니면서 친구, 6촌 동생, 회사 동생 등 여러 사람들과 여러 곳을
다니면서 자취하던 시간들은 힘들었지만 살림을 배우고 맘껏 자유를 누렸
다. 많은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갔고 애환도 많았던 5년 남짓한 자취생활도
결혼을 하면서 끝냈다.

휴일과 여가시간
오전근무 마친 토요일 오후에는 밀린 빨래를 하거나 친구들을 만났다.
일요일은 등산을 가거나 친구들 만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책을 읽었다. 그
리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고향에 갔다. 농번기에는 월차(생리휴가)까지
받아 고향 가서 보리 베고 모내기하고 가을 추수를 도왔다. 시골에서 하루
종일 모내기를 하거나 벼베기를 한날은 2층이던 사무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다리가 아파서 며칠을 고생하기도 했다.
1990년 6월 24일은 형제 7남매가 모두가 모였다. 오빠4명, 올케언니 4
명, 언니, 형부, 동생, 조카8명 까지 모두가 와서 모내기를 거들었다. 그때
엄마, 아버지는 아주 기분 좋아하셨다. 서울, 경기, 부산, 대전. 대구 등 멀
리 떨어져 생활하기에 한 번 모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날은 다 모여서
모내기를 했다. 농번기가 되면 고향에 일도와 주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 버
스도 엄청 복잡했다.
한창 볼링과 탁구가 유행할 때라 시간이 나면 자주 치러 다녔다. 볼링은
워낙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예약 해두었다가 늦은 밤 11시 12시에 가
서 친 적도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생활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자취의 매력이 바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등산도 자
주 다녔다. 회사에서 직장동료와 함께 또는 친구들끼리. 등산은 일주일의
스트레스 풀고 또 일주일을 살아갈 힘을 충전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 중에
서도 밤하늘을 잊을 수 없는 산행이 있었다. 1989년 10월 8일 토요일. 창
원에서 직장을 다니는 친구 광자와 단둘이서 지리산으로 1박 2일 등산을
갔다.
산장에 묵을 것이라 가볍게 생각하고 텐트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 산장에서 묵지 못하고 야간 산행하는 사람들을 따
라 무작정 걸었다. 칼바위를 지나 점점 어둠은 짙어지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밤하늘의 별은 빛났다.
시골에서 자라서 은하수도 많이 보았고 별도 많이 보았지만 그때만큼 많
은 별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수많은 별들. 하늘에
금빛보석이라도 박힌 듯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수없이 감탄했다.
잠자리 걱정도 잊고 밤하늘의 아름다움에 빠져 마냥 행복하게 산을 올랐
다. “산을 찾는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다”라고 했던가? 다행히 대우조선
에 다니는 젊은 총각 2명이 우리에게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해주어 무사히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용감하게 남자들의 2인용 텐
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지리산 정상 천왕봉을 찍고 내려와 진주 촉석루
에서 함께 놀았다. 그 후 함께 찍은 사진도 받았다. 겁없는 젊음의 도전이
었고, 잊지 못할 지리산의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 이 글은 조영남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