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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봄 : 7
201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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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봄 : 7
Ⅰ. 일대기 : 인생-사계(四季)


사랑과 용서의 뜨락을 걸으며
소은 | 전주시립완산도서관_전북


사랑과 용서의 뜨락을 걸으며
내가 떠오르는 첫 기억은 6살 때다. 우리 집은 대밭이 둘려있었다. 집 옆
으로 있는 산 아래에는 옹달샘이 있었다. 큰 언니를 따라 샘에 갔다. 언
니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옆에서 바가지로 샘물을 떠올리다 미끄
러져서 그만 샘에 빠져 버렸다. 그때 솟아오르는 나를 언니가 용케도 건져
올렸다. 물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는지 뜨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도 생생하다. 샘에 빠졌던 생각만 하면 무섭다. 언니와 함께 집으로 들
어가니 저녁때였다. 옷감을 펼쳐놓고 가족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검
정색과 하얀 색 천이었는데, 초등학교 입학식 날 입고 갈 옷을 만든다고 하
는 말을 들었다.
고향 집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 금마산이
나란히 보였다. 고조선이 망할 때 준왕이 망명하여 금마산에서 마한을 세
웠다는 전설이 있다고 들었다. 마당이 무척 넓은 집이었다. 대지가 300평
이라고 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원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있고, 대문
옆을 지나면 큰아버지네 집이다. 돌단을 높이 쌓은 뜰에 큰집이 있었다.
집이 여러 채 있고, 사랑채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옆에 화단에는 진
분홍빛 해당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가 진동했다. 채송화도 피어있고,
대밭에는 옹달샘이 있었다. 대밭에서 흐르는 맑은 물은 연못을 지나 우리
집화단 뒤로 사시사철 졸졸졸 흘렀다. 내 방은 아주 긴 마루를 지나 화단
이 보이는 방이었다. 잠자리에 들면 개울이 흘러가는 소리가 고요한 밤에
적막을 깨뜨렸고, 그 규칙적인 물의 리듬을 들으며 나는 곤히 잠을 자곤
했다.
육이오 사변이 일어났을 때였다. 빨강색 비행기가 방으로 내려앉을 듯이
굉음을 내며 날라 다녔다. 그럴 때면, 우리 집 식구들은 대밭에다 파놓은굴
속으로 숨으러 갔다. 그때 그 비행기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자지러
지게 놀라는 나를 큰언니가 등에 업고 대밭으로 도망하다 발에 상처를 입
었다고 했다. 그 몸서리쳐지는 비행기 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는지 평생 잊어지지 않는다. 전쟁은 참혹하고 소름
끼친다. 나는 요즘도 어디에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혹시 전쟁이 일어
났나 싶어 가슴이 철렁해진다.
햇살이 따스한 봄날이었다. 나는 검정색 멜방 치마에 하얀색 상의를 입
었다. 엄마는 옥색 치마를 입으시고는 내 손을 잡고 입학식에 갔다. 여섯살
때였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나이 별로 손 들어라고 하면 내 나이는 나밖에
없었다. 동네친구들은 아무도 입학 하지 않았는데 나만 그렇게 혼자 학교
에 갔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골방으로 숨기도 했다. 그런 나를 아
침마다 집으로 데리러오는 선생님이 있었다. 양 선생님은 우리 할아버지
친구 손자였다. 얼마나 신신 당부를 했는지, 양 선생님은 비가 오는 날도
어김없이 나를 데리러 오셔서 내 손을 잡고 우산을 받쳐주며 학교로 데리
고 갔다. 참, 친절하게 해주신 선생님이셨다. 한번은 공부하다말고 엉엉 소
리내어 울었다. 양 선생님이 다가오셔서 왜 우냐고 물어보셨다. 앞에 앉은
애가 냄새 나서 운다고 했다. 선선히 자리를 바꿔 주셨다. 그 일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참 철이 없었다. 옆 친구한테와 양 선생
님한테 미안한 마음도 든다. 참으로 천친난만한 어린 시절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싱그러운 어느 봄날이다. 4월인가 5월쯤에 엄
마는 나를 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에 대한 동경은 끝이 없다. 어머니
의 체온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베개를 눈물로 적시며 잠이 들곤 했다. 엄마
가 병석에 누워 계실 때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다. 철없는 나는
보랏빛 자운영 꽃이 활짝 핀 논바닥에서 친구 설자와 뒹굴며 놀았다. 그러
다가 앓아 누워계신 어머니 곁에서 책을 펴놓고 글자를 물어보곤 했다. 엄
마는 아프면서도 누워서 글을 가르쳐주시곤 했다. 그런데 불과 며칠 뒤 엄
마가 돌아가신 거였다. 어머니는 익산군 용안면 중실리 임씨 가문에서 만
석꾼 부잣집의 딸로 태어나셨다. 어느 날 갑자기 호열자로 온가족이 목숨
을 잃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양반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
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부엌일을 잘 못하셔서 옆집에 사는 대양댁 할머니
가 일을 돌봐 주셨다. 나는 그 할머니만 보면 좋아했다. 할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세세한 것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할머니한테 가면 그리운 엄마
이야기를 실컷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주 놀러갔다. 어머니의 유품으로
화려한 함 속에 보물들이 들어있었다. 빨강색 공단에 수놓은 수젓집도있
고,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요즘도 한
옥마을에 가면 고풍스런 물건들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이끌린다. 어디서
많이 보던 물건같이 느껴진다. 친구네 집에 갔을 때 친구 엄마가 칭찬해주
며, 반겨주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부러웠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무던히도
슬펐다.내 유년 시절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나날들이었다. 나
도 모르게 하늘을 자주 바라보았다. 낮부터 떠있는 낮달도 보고 상현달, 하
현달과 쟁반 같이 둥근 보름달도 보았다. 시골의 밤하늘의 별들은 검은 빛
우단에 보석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나는 별과 달을 보며 혼자서 달 노래를
가만가만 불러보기도 했다.
산새소리 대나무들이 서로 부딪치는 바람소리, 봄이 되면 뻐꾸기 소리,
논에서 들려오는 뜸 북이 소리, 5월이면 노란빛 옷을 입은 꾀꼬리가 깨죽
나무 위에서 우리 집을 보며 노래했다. 참 듣기가 좋은 소리였다. 아버지가
계셔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채울 수가 없었다. 위로 언니 세 분, 오빠
한 분이 있었지만, 나는 늘 외로웠다. 이유 없이 몸이 자주 아파서 학교에
결석하는 날이 잦았다. 학교가지 못하는 날은 집으로 친구(선영이, 영자,
은심, 화국, 순규, 홍자, 문영, 유희, 설자)들이 찾아왔다. 그중에도 설자와
순규 와 나는 친했다. 셋은 집에 오는 방향이 같아서 늘 붙어 다녔다. 순규
는 교회 장로님 딸이었다. 한번은 순규가 예쁜 그림 카드를 보여 주며 전도
를 했다. 예수님 가슴에 십자가가 있고 밖에는 나쁜 동물들이 우글거리는
그림이었다. 교회에 오면 선물도 준다는 말에 설자와 나는 순규를 따라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옛날 교회는 종을 쳐서 예배당에 오라고 알리곤
했다. 초종을 치면 준비하고 재종을 치면 예배가 시작되었다. 교회에 들어
서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나는 수다스럽게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세월이 흘러 소녀가 되었다. 학
교에서 돌아오면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내가 자라는 동안 언니들은 한 명
씩 시집을 갔다. 나는 마음이 더욱 외롭고 허전했다. 나를 두고 결혼한 언
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지금에야 짐작해 본다. 둘째 언니는 여러 번 선을 보
더니 지금의 형부와 서로 마음에 들었는지 결혼해서 서울로 갔다. 그 언니
집에 가면 책이 많았다. 형부는 좋은 분이셨다. 교육청에 근무하시다가 나
중에는 중앙청 문공위원장으로 계셨다. 서예화가이시고 소설을 쓰셔서 집
에는 책이 무척 많았다. 형부는 불량도서를 보는 아이들에게는 책을 빼앗
고, 대신 다른 책을 사서 보라고 돈을 주시기도 했다. 나는 한 번씩 언니네
집에 가면 오랫동안 머물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책을 읽었다. 그
러면서도 나는 자주 아팠다. 그렇게 아프면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형부는
편지를 보내 주시곤 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소설 이야기도 써
서 보내주시곤 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회갑이 될 무렵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형부께서 세상
을 떠나셨다. 내 마음은 몹시 슬펐다. 의지했던 형부께서 떠나신 뒤, 이화
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약국을 하던 언니네 딸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줄초상을 겪었던 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내게
는 엄마같은 언니의 마음을 떠올리니, 지금도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


▶ 이 글은 소은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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