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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봄 : 3
201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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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봄 : 3
Ⅰ. 일대기 : 인생-사계(四季)


우물 안 개구리의 삶
엄영순 | 강남도서관_서울


나의 어린 시절
6·25 동란으로 우리는 읍 화평동에다 집을 한 채 구입하여 두 집 살림을 시
작했다. 집 가까이엔 꽤 긴 냇물이 흐르고 양옆으로는 크고 작은 빨래판 같은
널찍한 돌들이 길게 줄을 지어 놓여있어서 빨래도 하고 여름이면 낮은 곳에
선 멱도 하고 머리도 감고 노는 아이들도 많았다. 시냇물 중간쯤엔 양쪽을 건
너는 다리가 놓여있어 아이들이 다리 밑에서 물장구치고 떠들며 재미있게 노
는 모습을 보면서 다리를 건널 땐 부럽기만 했다.
읍에 있는 집 살림은 할머니가 하시면서 장날이면 꼭 학교 끝난 후 들리라
하여 가면 허약하고 편도가 아파 힘들어하는 날 위해 복어탕을 맛있게 끓여
놓고 먹이셨다. 여러 해 동안…… 할머니의 오랜 사랑과 보살핌으로 지금까
지 편도선으로 아파 고생한 기억이 없다. 그래 누가 편도가 부어 병원 이야기
하면 나는 꼭 복어를 권 한다. (할머니 사랑을 얘기하면서)
내 생각엔 그때부터 엄마는 몸이 조금씩 좋지 않아 자주 아파하셨다. 회복
되시는 듯하다가 다시 아프고, 전쟁 중이라 약과 병원 치료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완쾌되어 가는 듯했는데 욕심에 그만 돌 파리의 꾐에 혹하시어 할머
니와 아버지 몰래 출처 모르는 민간약을 드시고 악화되셨다. 빨치산은 밤마
다 찾아와 식량과 약과 의복, 신발, 다 가져가기를 6학년 때까지 계속되었다.
6학년- 여름방학 때면<하계 경찰학교>라 하여 경찰과 함께 동호해수욕장
에 가서 방학을 즐기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여름학교에 뽑히려면 성적이
6학년 전체 20% 안에 들어야 했다. 내 딴엔 식은 땀을 흘리며 노력하여 가게
되어 기뻐 뛰었다. 방학하고 며칠 후 설렘으로 준비물을 배낭에 챙기는데 엄
마가 내방으로 왔다. “꼭 가야 겠느냐”고 물으셨다. 난 놀라고 이상하여 고개
들어 쳐다보았다. 엄마 얼굴은 창백하고 이상했다. “응, 난 가고 싶어! 가지
말라면 안 갈게.” 하면서도 눈물이 비오듯 흘렀다. 그날 오전에 엄마는 정신
을 잃었다. 읍에서 할머니 언니 오빠 아버지 달려오시고 정신이 들으셨을 때
아버지가 먹고 싶은 걸 물으시니 가슴이 답답하다며 시원한 수박이 먹고 싶
다하시어 수박을 사 배달되었다.
밤이 무서워 다 읍으로 돌아가시고 엄마와 일꾼들과 두 동생과 아주머니들
과 나만 남았다. 그날 저녁 각 방에서 자는데 나는 해수욕장에서 뛰놀며 지낼
친구들을 생각하며 울다 늦게 잠이 들었다.
아침에 귀머거리 아주머니가 자꾸 깨웠다. 어서 엄마한테 가보라고 손짓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엄마는 누워계시며 나에게 건너 방에 가서 바늘과
실과 하얀 천 그리고 가위를 가져 오라하셨다. 말씀대로 준비하여 가져가니
천을 오려 엄마가 입고 누워 계시는 속 바지에 주머니를 만들라 하신다. 나는
놀라고 떨렸다. 바늘이 엄마 살을 찌를까 겁도 나고 마음에 안 들으셨는지 야
단도 치셨다. 어렵게 다 완성했다. 엄마는 요 밑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끄
집어내라 해서 보니 많은 돈이 보자기에 쌓여있었다. 그중 지폐 100환을 내
게 주시고 많은 돈은 내가 달아드린 속바지 주머니에 넣고 주머니를 꿰매라
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한 후 100환을 들고 방을 나와 지금쯤 동
호해수욕장에 도착하여 신나게 뛰어놀 친구들을 생각하며 울기도 하고 한숨
도 쉬었다.
긴 여름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엄마는 혼자서 주무시고 나는 내 방에서 많
은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아침이 어수선하다. 머슴들은 이리 저리 사실을
알리려 달려가고, 할머니 아버지 언니 오빠도 오시고, 아주머니들은 울며 “어
쩌냐!, 어쩌냐! 어린 새끼 다섯을 두 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그때 죽
음을 처음 보았다.
나는 슬프지도 믿어지지도 않았다. 엄마 방에 들어갔다. 아랫목에서 옆으
로 누워 편안히 주무시는 것 같았다. 집안 풍습대로 (그때는 남자는 9일장 여
자는 5일장) 우리 다섯은 누런 삼베옷과 머리띠와 허리에 띠를 두르고 지팡
이를 짚고 하루에 몇 차례씩 곡을 하라 하셨다. 찌는 삼복더위에 5일장은 어
려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집안 곳곳과 시신에 알콜 소독으로 위생에 만전을
기울이다보니 엄마의 온 몸은 비에 젖은 것 같고, 내가 애써 달아드린 주머니
속의 두둑 한 푸른색 돈은 다 젖어 보이게 됐다. 그 모습을 본 집안 어른들과
많은 분들은 또 울으시며 “노자돈 안 넣어 줄까봐 돈까지 많이도 준비하셨다”
며 통곡.
꽃가마 만들어 타시고 집과 동네의 잘 다니시던 곳을 만사지에 쌓여 한 바
퀴 돌며 작별 인사드린 후 집에서 가까운 뒷산에 무덤이란 집에 누워 계신다.
그날이 음력으로 1954년 7월 초하룻날이다. (엄마의 예쁜 꽃상여는 동네 상
여 집에 넣어놓고 동네에서 사용하 는 줄 알고 있다) 지금은 상여집도 상여도
역사 속 뒤안길에 있으리라.
엄마가 생존해 계실 때는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여 할머니를 따랐
다. 하지만 엄마가 뒷산에 계시면서부터는 아침 낮 달 밝은 밤이든 가리지 않
고 시시때때로 내 발걸음은 엄마를 향하여가고 그 곳에서 공부도 노래도 이
야기도 하며 놀면 편안한 안식처가 되었 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부터 살아온 집, 화평동 집, 관사 세 곳 다 내게는 추억
이 많다. 그러나 정말 마음이 편하고 즐겁고 오래 머물며 노래 부르고 울고 웃
고 잠자고 책 보고 공부하던 곳은 내 방 다음으로는 엄마 무덤과 들녘이 떠올
려지고 그리워진다.
지금도 가끔 궁금해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뜻이 있으셔서 날 세상에 보
내 주셨으며 나에게 주신 사명은 뭘까?
나를 잉태하였을 때 누가 무슨 꿈을 꾸셨을까? 얼핏 듣기엔 할머니가 꾸셨
는데 아들 꿈이 아닌 딸 같아서 서운하여 엄마한테 말도 안하고 그냥 떨쳐 버
리고 잊고 사셨단다. 내가 커서 물어 봤을 때에 말씀이… 이해는 되지만 그지
없이 궁금하고 섭섭하다.
아들 손 귀한 엄씨 가문, 서둘러서 어린 아버지 14살 어머니 17 살에 혼례
치루고 아버지 21살에 첫아들 낳아 잔치, 잔치 후 외갓 집 다녀온 얼마 뒤 홍
역하다 첫아들 잃고 집은 초상집. 22살에 아들 아닌 딸 낳아 엄마는 죄인. 집
안은 실의에 차 낙담 근심에 차 있던 어느 날 집에 스님이 시주받으러 오셔서
할머니 시주 들고 나가니 스님께서 할머니 얼굴을 한참 뚫어지게 보시더니
이 가정에 손이 귀한데 딸이라고 서운하게 여기면 자손이 끊긴다 하셨단다.
외가에 다녀온 뒤 첫 아들 잃었다 하여 나는 태어나서 외가에 한 번 도 가본
기억이 없다. 아니 보내 주지 않았다.
스님이 다녀간 후 우리 언니는 보물중 보물이요, 재산 일호가 되었다. 읍내
5일장에는 아버지 위하여 가기보다도 언니 좋아하는 고기 사러 갈 때가 더 많
았던 것 같다. 그 덕으로 언니 별명은 드럼통, 물렁이, 내 보기엔 지금도 마마
걸(?) 같다.

초등학교 시절
생각해 보면 내 자신이 겁이 없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단기 4276 년 2월 15
일(서기1943년 그때는 단기사용) 태어났을 때 나는 집안에 큰 기쁨을 드리지
못한 것 같다. 위로 딸 아들인데도 은근히 아들이기를 내심 기다리셨다니 3
살 터울로 태어난 내 동생도 또 딸이었다. 두 이레가 지나도 아버지는 여동생
을 쳐다 볼 생각도 하지 않으셔서 할머니는 며느리 볼 면목이 없었단다. 아침
에 식사를 하실 때 아기를 아버지 무릎에 안겨주며 딸이라도 이목구비가 별
나게 예 쁘다며 할머니께서 안겨드렸단다. 한번 슬쩍 보시더니 한참 후 다 시
보고 안아 주시며 “예쁘긴 하네요.” 하신 뒤로 아버지의 섭섭함도 어머니의
미안함도 차츰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자라면서 유독 편식이 심하고 투정이 많았나 보다. 오남매 중 돌연변
이인 듯 약하고 왜소하고 잘 울고 허약 자체다. 또 나에겐 특이한 게 두 가지
가 있다.
하나는 누구나 한 번은 꼭 한다는 홍역을 안 한 채 이 나이 되도록 지내고
있다. 죽어서도 한다는데… (동네 이웃집 아이가 홍역을 곱게 치루었다고 전
송 떡을 하면 제일 먼저 가져다 먹이곤 하여도 효과가 없었단다.) 또 하나는
치아다. 남들은 사랑니가 날 때 아파하곤 한다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나올 기
미가 없다. 그런 내가 떼쟁이로 떼를 써 학교에 들어가고 또 입학식 날 교회
도 가게 되어 곱의 축복으로 흥이 솟았다.(추운 겨울 학교 오가는 길에 손발
이 꽁꽁 얼어서 힘도 들었지만)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숫자, 글자 쓰고 책 읽
고 공부하는 것도 좋았다. 또한 동무들이 하나하나 늘어나고 예쁜 선생님,
호랑이 선생님, 따뜻한 선생님께서 내 불편함을 챙겨 주며 가르쳐 주시고 함
께 놀아주신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김하열 선생님, 김보하 선생님, 김창식
선생님, 백 선생님) 또 1학년 4반 때 한반으로 만나 졸업할 때까지 같은 반이
었고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 오는 희자, 태희, 경현. 민환, 선애랑이 있어 고
맙다,
눈 내리는 추운 일요일, 샛길로 뛰다시피 교회에 가면 목장갑 끼고 교회 마
당 눈 치우시던 목사님께서 꽁꽁 언 내 손 감싸고 교회 안 난로 곁으로 가 녹
여 주시던 인자하신 그 모습!
크리스마스 때면 캐럴송 부른다고 어른들 따라다니면 초가집 처마에다 남
포 불, 호롱불 켜 놓고 부부가 나와 맞아준다. 두 손 모아 기도드리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끝나면 우리들을 방으로 안내한 뒤 따끈한 생강차와 엿을 내
놓으신다.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그 맛을 알 수 없다. 교회로 돌아오
면 예배드리기 위해 흔들어 깨울 때까지 우리들은 예배당 마루바닥 난로 주
위에서 곯아 떨어져 잤다.
6 ·25 전쟁이라는 남과 북의 비극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많은 사
연과 힘들고 불편한 과정 과정을 견디면서도 추억은 쌓여 져갔다. 어린 우리
들은 고사리 손으로 국군 아저씨께 손수건 한쪽 에 수를 놓고 위문편지를 써
서 보내기도 했다. 빨치산으로 밤이 불 안하여 읍에다 집을 사, 두 집 살림이
시작되었다. 나는 명절 때마다(추석, 설, 대보름) 언제나 읍에 있는 집에서 할
머니가 준비해 놓고 가신 음식과 시루떡 과일을 먹으며 혼자서 집을 본다. 밤
엔 무서워 읍에 사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떡을 시루 채 놓고 먹으며 둥근 달
이 크게 떠오르면 우리끼리 동화 속 연극놀이를 하곤 했다.(왕, 공주, 왕자, 시
녀, 마녀, 귀신놀이, 콩주 팥쥐 놀이 등)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나면 친구들은 시골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그때는
또 어김없이 하는 행사가 있다. 우리 집엔 위 아래채집에 문이 많았다. 그 많
은 문짝의 창호지를 다 뜯어내고 새 창호지를 바르는데 뜯는 작업은 친구들
과 내 담당이다. 힘이 들었을 텐데 그저 즐겁고 재미있기만 했다.
요즈음도 가끔 어릴 적 연극놀이, 창호지 뜯던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동
네 친구가 없는 내겐 학교친구가 제일 소중하고 큰 재산 이다.
엄마는 점점 건강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나는 6학년이 되었다. 여름방학
때면 동호해수욕장에서 하계 경찰학교가 열린다. 성적이 6학년 전체에서
20% 안에 들어야 했기 때문에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노력하여 뽑혔는데 참
가하지 못하여 슬퍼서 울었던 일! 엄마는 그날 밤이 당신이 이승에서 마지막
임을 알고 꼭 해수욕장 가겠냐고 물으셨을까?
그날 철없이 고집 부려 해수욕장에 갔다면? 평생 마음 아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끔찍하기만 하다.(음력 1954년 7월 1일 12살 때 엄마를 잃었다) 죄인
의 상복을 입고 허리띠를 매고 머리엔 죄인의 띠를 두르고 지팡이를 짚고 시
시때때로 곡을 5일간 시키는 대로 했다. 철이 없어서일까? 부족함이 없어서
일까? 엄마는 아프신 날이 많았 고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에 할머
니를 더 따르고 좋아해서 였을까? 당시엔 슬프긴 했지만 간절함을 몰랐던 것
같다.
무덤이 만들어지면서부터 뼈 속까지 사무치게 엄마가 그립고 한이 서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입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고창군은 읍이 하나, 면
이 14개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안에 여학교는 하나뿐인 걸로 기억된다. 그러
니까 중학교에 가려면 입시준비를 하기 위해서 <새공부> 란 공과를 가지고
머리를 쌓아 메고 매달려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한 친구도
있지만 14개면에서 모이기에 긴장이 되었다.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과외공
부하고 2키로가 넘는 캄캄한 신작로 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쉬
운 일이 아 니었다.
농촌에서는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깡통에다 숯불을 담아 끈을 달아 뱅뱅
돌려 가며 논두렁 밭두렁을 태우는 쥐불놀이를 한다. 이상하게도 눈이 와 쌓
였다가도 불놀이에 태운 자리가 먼저 녹는다. 눈 내려 하얀데 녹은 그 자리는
검어 꼭 사람처럼 보인다. 온몸엔 두려움과 떨림과 무서움으로 다리가 떨리
며 힘이 없어진다.
어린 그때부터 나는 어둠속에서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걸 알았다. 약하고
겁이 많은 나로서는 중학교 가기 전 쓰러져 죽을 것 같 았다. 체력에 한계가
와 읍에 있는 할머니 곁으로 갔다.
시험 성적을 염려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열손가락 안에 들었으니)
허나 기뻐해 주는 사람 하나도 없고 당연하다는 반응에 섭섭하고 엄마 생각
에 눈물이 나왔다.
졸업식 날! 다른 친구들은 엄마랑 아빠 친지들이 오셨는데 무슨 사정인지
아버지도 안보이고 외로웠다. 눈물이… 기가 죽어 있었는데 친구 엄마 세 분
이 오셔서 내가 순이 엄마로 왔다며 축하선물도 주시고 두 팔로 감싸 안아주
셨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6개월 되었는데 아버지 재혼 준비로 온 신경이 집중되
었다는 걸 늦게야 알게 되었다.
동네 분들은 부러워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녀 14명이 입학하였는데 형
편상 중도에 다 그만두고 여자인 나 하나만 졸업하고 중학교에도 나 하나만
진학하니… 그분들 마음에 어려운 형편이 얼 마나 한스러웠을까?
아주 어릴 적 나랑 함께 놀이할 또래가 없어 심심함 빼곤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떼쓰고 어리광으로 귀한 대접을 받아도 보았고, 학교에선 친구 사
랑, 선생님 사랑과 관심도 받았다. 소풍, 운동회 날이면 지나치리만큼 준비하
여 나눠주시며 좋아하시던 어머니. 제일 약한 나를 강하게 키우려고 산으로
데리고 다니셨고, 3~4 학년 때부터 정구 라켓을 손에 들려 데리고 다니신 아
버지. 때로는 그런 부모님의 속을 상하게 하여 울리기도 했으니…
초등학교 때 나는 기쁨과 슬픔과 번뇌 무서움 외로움을 다 겪고 맛 본 것
같다.

▶ 이 글은 엄영순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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