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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봄 : 1
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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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쓰기 모음집]나에게 인생을 묻는다. - 일대기:인생-사계 - 봄 : 1
Ⅰ. 일대기 : 인생-사계(四季)

내가 살아온 길
이재은 | 강남도서관_서울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해방되던 해 1학년만 14명이 논두렁길로 7킬로미터가 되는 면 소재지에
있는 소성국민학교에 다닐 때다. 입학식 이후 14명은 결석하는 사람도 없
고 지각하지 않으려고 줄지어 앞만 보고 잘 다녔다. 한 달 쯤 지나면서는
날씨도 풀려 개구리도 눈에 보이고 냇가에 물고기도 잡아보고 싶은 생각
이 든다. 한 아이가 개구리를 잡아서 멀리 던지니까 너도 나도 개구리를 잡
아서 던지는 일을 하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학교 앞 언덕 위에 올라가
서 보니 운동장에 학생들이 모여서서 조회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걸 보고
급히 뛰어 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누가 지금 가면 지각했다고 선생님한테
혼나니까 가지 말자고 한다. 그 말에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합의가 되었다.
단, 집에 돌아가서 절대 말하지 않기로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되돌아오면
서 산에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고, 편을 갈라 씨름을 하는 등 시
간을 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생각이 난다. 집에 돌아 와서 약속을 잘
지켰는지 그 뒤의 일은 기억이 없다.
해방이 되어 타면(他面)이지만 보다 가깝고 다니기 좋은 입암초등학교
에 다시 입학하였다. 1학기 담임선생님은 6학년을 맡았던 선생님이신데
좀 무뚝뚝한 편이어서 다른 건 별 기억에 없는데 학기말 통지표에 과목별
성적이 대부분 갑(甲)인 걸 보고 내가 이렇게 잘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학기 때 새로 오신 담임선생님은 자상하시고 감정 표현이 풍부하셔서 교
실 분위기가 활기찼다. 선생님께 서는 맨 앞에 앉아 있는 나를 가끔씩 번
쩍 들어 안아 한 바퀴 돌린 다음 내려 주시기도 하고, 말대답을 잘 할 때마
다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니 나는 학교생활이 즐거운 하루하루였다. 학년
말이 되어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반에서 우등생이 6명인데 첫째 줄에 한 명,
둘째 줄엔 없고.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내가 앉은 줄에는 두 명이라고 하셔
서 나는 나하고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해 했다. 드디어 종업식 날
운동장에서 우등상을 받는 학생을 1학년 1반부터 6학년 끝 반까지 연이어
부르는데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그때 너무 기대에 어긋나 혼자 많이 속
상해 했다. 그런데 2학년 때부터는 학년말이 되어도 운동장에서 우등생
이름을 불러 주는 일은 없고 다만 통지표에 우등이라는 고무인만 찍어 줄
뿐 상장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1학년 때의 섭섭함이 오래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3학년에 올라와서 일제고사를 보았다. 선생님께서 채점한 시험지를 들
고 들어오셨다. 그러시더니 성적이 가장 높은 남, 여 한 사람씩 불러 교탁
바로 앞의 책상에 함께 앉힌다. 나는 부끄럽기도 하면서 한편 기분이 나쁘
지 않았다. 옆 자리 여학생의 이름은 이순옥이다. 보아하니 머리도 단발머
리를 단정히 빗고 옷차림도 깨끗하였다. 나는 연필 두 자루를 책갈피에 끼
운 채 교과서와 공책 몇 권을 보자기에 말아서 허리춤에 묶고 학교 오갈 때
뛰어다니는 것이 일 쑤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가지런히 깎아진 연필과 지
우개 등이 보기 좋게 필통 안에 들어 있었고 책가방을 짊어지고 다녔다. 나
는 신이 나서 공부도 열심히 하니 공부시간도 더 재미있었다. 그런 즐거움
도 잠깐. 옆 반에 형제간이 같이 있는 학생을 떼어 놓는다며 옆 반 반장인
형과 나를 맞바꾸면서 나는 그 여학생하고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3학
년 때부터는 체구가 작지만 성적을 중시하여 부반장을 시켜주어 덩치 큰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지는 안 했다.
6·25전쟁으로 5학년 말에 읍내 학교로 편입학하여 적응하기가 쉽지 않
았다. 이웃집과는 널빤지로 성글게 울타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말소리는 들린다. 뒷집 아이가 몇 학년인 줄은 모르는데 엄마가 공부하지
않고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고 야단치는 말을 들었다. 나는 집에서 아이한
테 공부하라는 말은 처음 들었기에 좀 의아했다. 농촌에서는 아이한테 공
부하라는 말은 아예 없다. 논, 밭에 가서 할 일도 많고 집에서 도와야 할 일
도 많기 때문에 학교 다니는 것 자체를 호강으로 생각한다. 이런 환경적 차
이로 인한 주눅도 드는 것 같았다. 키도 작고 옷매무새도 내가 보아도 촌놈
티가 나고, 모두가 기초가 잘 닦여 있어 보이는 학생들 속에서 긴장 속에
수업을 받는데 마침 수학시간이다. 주산으로 곱셈법을 배우는데 선생님께
서 한번 가르쳐 주시고, 누구 나와서 해볼 사람을 찾는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내가 나가서 구구단을 외면서 칠판 위의 커 다란 주판알을 올렸다
내렸다하면서 마쳤더니 선생님께서 과분한 칭찬을 해주셔서 그 뒤로 힘을
얻어 잘 적응해 갔다.
6학년이 되어 전교 주번을 맡게 되었다. 전교 주번은 월요일 운동장 조
회가 있는 날 각 교실을 돌아다니며 교실에 남아 있는 학생들 을 운동장으
로 빨리 내보내는 일을 한다. 어느 날 5학년 반을 들어 갔는데 거기에 순옥
이가 있지 않는가! 나는 반갑고 너무 놀랐다. 달려가서 손을 붙잡고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 보진 못했지만 그 이상의 설렘과 희망찬 방망이가 가슴을
두드린다. 그 뒤로 몇 번 주번 완장을 차고 그 반을 가보았지만 이미 운동
장에 나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내가 겪은 6·25전쟁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할 때 나는 입암초등학교 5학년생이었다. 전쟁
으로 인하여 어느 날부터 휴교령이 내려졌고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학교에
서 학생들 등교하라는 연락을 받고 학교에 갔더니, 벌써 태극기가 걸렸던
곳에 북한 공산당기가 걸려 있었고 공연단이 와서 연극을 하였는데 내용
은 공산당 찬양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학생들은 북한 인민공화국 국가부
터 배웠다. 어느 정도 부를 수 있게 되자 돌아가서 동네 주민을 모아놓고
가르치라는 과제를 받고 하교하였다. 그 뒤로 며칠 동안은 빨치산 노래 등
을 배워서 동네에 보급하는 게 우리의 일과였다. 그 후에는 학교에서 배웠
던 책을 수집하는 일이 전개되었다. 1학년 교과서부터 가지고 있는 책을
몽땅 거두어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인민군이 학교를 점령하고
있어서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다.
동네에서는 경찰로 지냈던 사람들이 잡혀가고 머슴으로 살던 사람이 주
인집에 들어가 가구를 함부로 꺼내오기도 하고 낯선 사람이 동네에 들어
와 사람을 찾더니 그 동안 고생 많이 했다면서 악수를 청하는 것도 기이하
게 보였다. 그러면서 동네 사람들은 차츰 좌익과 우익으로 양분 되어 갔다.
경찰 가족이었거나 잘 살았던 사람들은 우익으로, 숨어 지냈던 사람의 가
족이나 가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좌익으로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갈수록 좌익 세력이 커져서 소위 우익이라는 사람들은 눈치나 보고 숨죽
이고 살아간다.
아버님과 큰형님은 동네에서 계속 지내시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리
시고 정읍 읍내 작은 아버지 댁으로 가셨다. 9.28수복 이후 이기 때문에 시
내나 면소재지가 있는 곳은 조금씩 치안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우리 마을
처럼 관청에서 먼 곳은 더욱 치안이 나빠지 고 있었다. 좌익 세력이 드세
지고 세력을 키우기 위해 사람을 끌어 들이기에 혈안이 되어, 형님을 찾아
오라고 날마다 집에 와서 어머니를 못 살게 구니까 나를 시켜 읍에 다녀오
라고 하셨다. 읍내 작은 아버지 댁을 찾아 가서 내용을 말씀 드렸더니 네
가 돌아가서 얘기하면 더 어려워지니까 너도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하
신다. 읍내도 밤이 되면 빨치산들이 경찰서 가까이 와서 교전을 벌이는 일
이 간간이 있었다. 총알이 바로 귓가로 스치고 달아나는 발자국 소리를 부
엌 낮은 바닥에 엎드려 숨죽이고 30분가량 듣고 있으면 잠잠해지는 일이
몇 차례 있었고, 가장 심했던 것은 경찰서 무기고에 있는 무기를 탈취하려
고 정읍여고 담을 넘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정읍여고 2층에서 경찰이 지
키고 있다가 담을 넘는 빨치산 부대 7명을 사살시켰던 사건이다. 작은 집
이 경찰서 가까이 위치해 있었기에 어린 나도 이런 상황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인민군이 머물러 있던 기간은 불과 3개월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도 북한
공산당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그들이 말하는 인민에게 어떻게 사상교육을
시키며 어떤 방법으로 한 곳으로 몰아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동네는 더욱 지내기가 어려워져 11월엔 작은 집 식구, 우리 집 식구가 모
두 읍내 작은 집으로 모여 들어 20명의 식구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입암초등학교는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불을 질러 학교건
물이 완전히 소실되어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학 서류도
떼러 갈 수 없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께서 나와 동생을 데리고 정읍서 국민
학교 교장실로 찾아가 사실 설명을 하시고 편입학 말씀을 하시니까 교장
님께서 선생님 한 분을 불러 간단한 테스트를 해 보라고 하신다. 수학 몇
문제를 내주시고 국어 읽기를 시켜 보시더니 선생님께서는 6학년으로 들
어가도 되겠다고 칭찬까지 해주신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집은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경찰관
으로 계셨던 첫 번째 작은 아버지께서 학살됨으로써 작은 집 식구가 갈 데
도 없고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어 같이 고생을 하며 지내게 되었고, 매형이
전사하시어 누님께서는 딸 하나 데리고 평생을 고생하시며 사시게 되어 안
타깝기 그지없다.
나에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읍내로 피난 온 덕으로 읍내 학교로 편입학
함으로써 학교 건물이 소실되어 한 해 학교를 다니지 못할 공백을 막을 수
있게 되었고, 봄이 되어 농사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식구는 시골집으
로 들어 가셨는데 큰형님 내외분과 바로 위 형 과 나는 새집을 구하여 그대
로 남아 학교에 다니게 되어 읍내 중학교 입학도 순조로웠다.

▶ 이 글은 이재은 님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며,
전문은 홈페이지(www.libraryonroad.kr)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홈페이지 공지 및 보도-홍보에서 원본파일을 다운하실 수 있습니다.(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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