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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덟째날, 강진도서관에서 강진만 가우도 출렁다리까지
201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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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덟째날, 강진도서관에서 강진만 가우도 출렁다리까지

옛길걷기 인문학 [16]

여덟째날, 강진도서관에서 강진만 가우도 출렁다리까지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동문주막 사의재(四宜齋)다. 다산이 1801년 11월 23일 강진에 도착하여 처음 머물던 곳이다. 사의재는 생각, 용모, 언어, 행동 이 네 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하면서 지은 당호다.  


동문주막은 복원되어 주막 구실을 하고 있는데, 사의재는 정갈한 선비방으로 꾸며져 있어서 다산이 책을 읽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하다.  

 

강진 읍내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 일행은 다산 기념관에서 열리는 ‘다산과 다산학단, 그리고 방산’ 주제의 제14회 다산 문화제 학술대회를 잠깐 참관하고 나서 직선거리로 400m 떨어진 다산수련원으로 넘어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산수련원에서 언덕 하나를 넘어가면 다산초당 마을이 나온다. 다산수련원에서 다산초당까지는 700m 정도 된다. 다산초당 가는 길은 나무가 울창하여 그늘이 짙다. 세상도 하늘도 보이지 않고, 오롯이 나만 보이는 곳이다. 다산은 1806년에 고성암 보은산방에서 제자인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2년을 머물다가,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다산은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10년 동안 이곳 초당에 머물면서 『목민심서』를 포함하여 600여권의 저술을 완결 지었다. 

 

다산초당에서 천일각을 거쳐 백련사로 넘어가는 길 가에는 차밭이 있고 동백나무 숲이 있다. 다산 초당에서 혜장선사가 머물던 백련사까지 거리는 800m 정도 된다. 다산에게 있어서 혜장선사는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다고 평할 정도니, 서로 의지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만하다.     

 
백련사 법당과 동백나무숲을 빠져나와 우리 일행이 마지막으로 간 곳은 강진의 새로운 명소가 된 가우도 출렁다리다. 백련사에서 망호선착장까지는 11km 정도 떨어져 있다. 망호선착장에서 가우도를 거쳐 강진청자박물관이 있는 대구면까지 출렁다리가 놓여있어서 걸어서 강진만을 가로지를 수 있다.  


다산은 강진만을 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어부들의 삶을 꼼꼼히 관찰하여 '탐진어가(耽津漁歌)'라는 시를 남겼다. 그 시 속에는 강진 어촌의 생활상이잘 투영되어 있다. ‘어촌에서 모두가 낙지국을 즐겨먹고/ 붉은 새우 녹색 맛살은 치지를 않는다/ 홍합이 연밥같이 작은 게 싫어서/ 돛을 달고 동으로 울릉도로 간다네.’ 크기가 커서 먹음직한 울릉도 홍합을 잡기 위해서 그 시절에 강진 사람들이 울릉도까지 갔음을 알 수 있다.


삼남대로라 함은 한양 남대문에서 과천 남태령, 수원, 안성천, 성환 차령고개, 공주, 논산, 삼례, 전주, 태인, 정읍, 나주, 강진을 거쳐 해남의 이진항에서 제주 관덕정에 이르는 육로와 해로를 이른다. 제주로 가는 항구로 해남군 북평면 이진항, 해남군 화산면 관두량, 강진읍 탐진항을 이용했다. 해남 이진항보다는 강진 탐진항이 북쪽에 있어서, 탐진에서 이진을 가려면 걸어서 하루를 더 가야 한다.

 
사람이 다닐 때는 바다 쪽으로 더 나가있는 해남 이진항이 편하고, 무거운 물건이 드나들 때는 강진 탐진항이 더 편했다고 한다. 또 관리들의 일이 힘들어서 해남 이진과 강진 탐진이 번갈아가면서 제주가는 배편을 관리했다고 한다. 강진의 포구는 탐진, 남포, 백금포 등 다양한 지명으로 거론되는데, 남포와 백금포는 이웃해 있고 이 둘을 통틀어 탐진이라는 이름으로 아우를 수 있다.  


강진이라는 지명은 강진 북쪽의 성전, 병영, 작천 쪽의 도강군과 강진읍내의 아래쪽 탐진에서 한자씩 따와서 조선 태종 때에 강진현이라 하면서 생겨났다. 강진군청에서 남쪽으로 2.5km 내려가면 강진만이 나온다. 탐진강과 강진만이 만나는 지점에 남포가 있고 백금포가 있는데 이곳이 조선시대에 이용되었던 탐진항이다. 탐진강이 강진만과 만나는 하구의 강변길이 지금은 백금포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강진만이 바다를 향해 나팔처럼 넓어지는 지점에 마량항이 있다. 조선시대에 제주의 말이 이곳에 부려져서 관리되었던 곳으로, 말이 잠자던 숙마(宿馬) 마을, 새 말이 들어온 신마(新馬) 마을, 그리고 원마(元馬) 마을이라는 지명이 전해온다.  


8일간의 삼남대로 여정은 바다 위에 떠있는 가우도 출렁다리에서 끝이 났다. 가우도 출렁다리는 국내 최대 규모의 해상 인도교로 대구면 저두리~가우도~도암면 망호리(길이 1.12㎞·폭 2.2m) 구간에 놓여있다. 배를 타고 제주 관덕정까지 가야 삼남대로의 끝이지만, 우리는 제주로 이어지는 강진만의 물길 위에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길은 사람이 낸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도 있고, 새들이 다니는 길도 있다. 하지만 그 길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사람뿐이다. 삼남대로는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길이다. 그 길을 걷고, 그 길을 잘 읽으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인다.   

<글·사진/ 허시명>


<여행정보>
다산기념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061-430-3911
다산수련원/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수련원길 33. 061-430-3625
다산초당/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 061-430-3911
백련사/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 061-432-0837
영랑생가/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 061-430-3185
동문주막, 사의재/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27 061-433-3223

백련사/ 강진 만덕산에 있다.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가 창건할 때는 만덕사였다. 고려 1211년에 원묘국사가 중창하면서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로 불리게 되었다. 백련결사는 민중들과 함께 참회하고 염불수행을 행하여 현세를 정토로 만들자는 민간 결사 운동이다.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백련사에 들어와 8년간 법회를 열고 수행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과 교류한 혜장선사가 이곳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