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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여덟째날, 강진도서관에서 강진만 가우도 출렁다리까지
201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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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여덟째날, 강진도서관에서 강진만 가우도 출렁다리까지

옛길걷기 인문학 [15]

여덟째날, 강진도서관에서 강진만 가우도 출렁다리까지


10월 25일, 삼남대로 걷기 마지막 날이다. 오늘 일정은 강진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 강진도서관은 정원이 잘 가꿔져 있어 열린 공원 역할도 함께 하고 있었다. 도서관 정원에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있다. 강진은 다양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강진 출신 시인 김영랑을 통해서 남도의 서정과 만나고 있고, 유홍준을 만나 ‘남도답사 1번지’의 찬사를 받았고, 지금은 다산의 고장이 되어 있다. 다산초당, 동문주막, 다산기념관, 다산수련원 등 다산 문화콘텐츠가 많아졌다.    


강진도서관의 세미나실에서 삼남대로 마지막 여정을 정리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한국도서관협회가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삼남대로 답사는 지역 도서관들의 참여로 풍성하게 이뤄졌다.  

 

길은 늘 새롭게 생겨난다. 지방도, 국도, 고속도로, 철로, 고속철로가 거침없이 국토를 가로지르고 지나간다. 그 속에 지워져버린 옛길도 있고, 되살아나는 옛길도 있다. 길이란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인데, 마을도 사람도 변하니 길도 변할 수밖에 없다. 다만 지역민들은 자기 주변의 길들에 너무 익숙해 있다보니, 변화에도 금방 무뎌진다. 그래서 전체의 시선에서 길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도서관과 도서관을 연결하여 길을 걷는 것도 재평가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삼남대로 걷기 평가자로 나선 연세대학교 김용흠 교수는 “이 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가치를 찾는 작업이다. 근대화 이후에 외래의 문명에서 대안을 찾았다면, 이제는 우리 안에서 가치를 찾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시기다. 역사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작업은 그래서 소중하다. 다산의 실학은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집대성했다. 21세기 문명사회의 전환기에 서서, 서양 문명이 인류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갈등과 불화를 일으키고 있으니, 동양 문화를 전면 검토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이에 다산학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오늘의 답사는 다산이 머물고 걸었던 길을 되짚어보는 일정이다. 첫 방문지는 사찰 고성사(高聲寺)였다. 소리가 높다는 고성사답게 법당 마당 가득히 스님의 독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산은 1805년 봄에 승려 혜장(1772~1811)을 알게 되면서 고성암(당시는 암자였다)을 알게 되었다. 승려 혜장과 교유하면서, 다산은 고성암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다산은 유배와서 처음 머물렀던 동문주막 생활을 접고 1805년 겨울에 고성암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이유는 큰 아들 정학연이 1805년 겨울에 찾아왔는데 주막이 좁고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다산은 보은산방에서 겨울을 나면서 아들과 강진 제자들에게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다.


고성사에서는 강진만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멀리 철탑이 산등성이를 건너가고 계곡 저수지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지만, 멀리 내다보이는 강진만과 산자락은 다산이 보았던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다산이 혜장과 교유하며 차를 마시며 짓던 웃음과, 제자들을 가르치며 책 읽던 소리와, 뒷산에 올라 흑산도로 유배간 형님을 그리워했던 마음이 아직도 고성사에 머물러있는 듯하다. 

 <글·사진/ 허시명>

<여행정보>
다산기념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061-430-3911
다산수련원/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수련원길 33. 061-430-3625
다산초당/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 061-430-3911
백련사/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 061-432-0837
영랑생가/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 061-430-3185
동문주막, 사의재/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27 061-433-3223

백련사/ 강진 만덕산에 있다.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가 창건할 때는 만덕사였다. 고려 1211년에 원묘국사가 중창하면서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로 불리게 되었다. 백련결사는 민중들과 함께 참회하고 염불수행을 행하여 현세를 정토로 만들자는 민간 결사 운동이다.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이 백련사에 들어와 8년간 법회를 열고 수행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과 교류한 혜장선사가 이곳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