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사례집
공지
12. 여섯째날, 전주에서 장성 갈재 너머 원덕마을 미륵석불까지
2015.12.15
1,868

본문

12. 여섯째날, 전주에서 장성 갈재 너머 원덕마을 미륵석불까지

옛길걷기 인문학 [12]

여섯째날, 전주에서 장성 갈재 너머 원덕마을 미륵석불까지

 

태인 향교에서 태인 동헌까지는 700m쯤 떨어져 있다. 동헌은 문이 잠겨있는데, 면사무소에 연락하니 관리인이 열쇠를 들고 달려왔다. 태인현을 다스렸던 또 한 사람의 이름난 인물로 이순신 장군이 있다. 이순신은 정읍 현감을 지낼 적에 태인 현감을 겸했다. 전란을 치르고 백의종군을 두 번이나 했던 이순신에게 정읍 현감 시절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절로 평가된다. 아산 가족들을 불러 함께 생활했는데,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전에 1년 2개월 동안 이 고장에 머물렀다. 전일귀 이야기/ 전일귀는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에서 늙은 부부의 오랜 기도 끝에 태어난 3대 독자였다. 늦게 얻은 자식을 귀하게 키우다보니 자식이 부모의 뺨을 때리는가 하면 자기만 아는 천하의 불효자가 되었다. 하루는 이웃 사람이 자식을 꾸짖는데 “너도 천하의 불효자 전일귀 같은 인간이 되려고 그러느냐?”는 말을 듣고, 전일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 그 뒤로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는데, 어느 날 갈재를 넘다 산적을 만나 음식과 보따리 모두를 빼앗겼다. 그런데 잠시 후 호랑이가 음식과 보따리를 입에 물고 가져다 놓고 가질 않는가. 어머님이 아프자 사람 고기를 삶아 드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본인의 자식을 삶았는데 솥뚜껑 안에 산삼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3년 시묘살이를 할 때는 항상 호랑이가 지켜주었다고 한다.  

 

태인 동헌은 고을 수령이 업무를 보던 공간이다. 조선 순조 16년 (1816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전라감영의 선화당을 지은 목수가 지었다. 그런데 목수는 동헌을 1천냥이면 지을 수 있음에도 3천냥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3천냥으로 튼튼하고 멋진 건물을 지어냈다.  

 

태인 마을 길은 편안하다. 높은 건물도 눈에 띄지 않고 소박하고 한적한 마을로 향교와 대성전과 피향정이 삼각 구도를 이루고 안정되게 배치되어 있다.

 

전주 삼천도서관 회원들과는 태인 피향정 앞에서 헤어졌다. 오후의 일정을 위해서 정읍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정읍 시립도서관은 1990년에 개관했는데, 2014년 2월에 새 건물을 올려 외부는 웅장하고, 내부는 섬세해졌다. 내부는 카페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도서관 주변엔 새 아파트들이 많아서인지, 걷기 행사에는 젊은 주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많이 참여했다. 모두 25명이 버스에 올라 갈재를 향해 출발했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갈재를 넘기 위해서, 정읍시 입암면 군령마을 초입의 당산나무 아래 모였다. 군령마을은 험한 갈재에 산적들이 들끓어서 고개 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사를 주둔시키다보니 생긴 지명이다. 군령마을 당산나무에서 갈재까지는 1.99km다. 갈재를 향하는데 길가 밭둑에 옛 주막터 팻말이 있다. 군령마을은 옛날보다 지금이 더 쓸쓸하다.

 

그런데 갈재로 향해가는 길이 너무 많아 어수선하다. 갈재를 향해 국도 1호선이 지나고, 호남고속도로가 달리고, 호남선 터널이 지나고, 또 새로 난 고속철로가 더불어 간다. 국도 1호선만 산을 넘고, 모두가 터널을 뚫고 지나간다. 갈재는 마치 화살을 잔뜩 맞은 과녁 같다.   군령마을 입구에서 750m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호남선 옛 철길이 나왔다. 호남선 철로는 1914년에 놓였고 1987년까지 사용되다가 새로운 철길로 대체되었다. 폐철로는 거둬내지고 생태탐방로가 생겼다. 생태탐방로 초입에서 갈재까지는 1,250m가 떨어져 있었다. 

 

옛 철길을 따라 가고, 폐 터널 위를 걷기도 하면서, 생태탐방로의 편백나무 숲과 참나무 숲을 지나 산길을 올랐다. 갈재를 오르는 길은 산자락을 타고 휘어있어서 걷기에 힘들지 않았다.

 

갈재의 정상은 바위가 V자로 패인 길이었다. 일부러 바위를 부셔 길을 낸 흔적도 보인다. 흙길을 밟고 오다가 고개 정상에서 바위의 호위를 받으니, 고갯마루에 올라섰다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갈재는 전남 장성 북이면과 전북 정읍시 입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높이 276m의 산 능선에 있는 220m 높이의 고개다. 갈재는 한자로 갈대 노(蘆)자를 써서 노령(蘆嶺)이고, 이 산줄기가 노령산맥이다.

 

갈재 정상의 안내 팻말을 보니, 입암면사무소까지는 4.24km, 백양사역까지는 5.56km가 떨어져 있다. 임암면사무소든, 백양사역이든 어느 쪽을 출발점으로 삼아도 3~4시간 정도면 충분히 답파할 수 있는 길이다.

 

산을 내려가는 장성쪽 길은 정읍쪽 길보다도 더 편했다. 장성군 원덕마을까지 가는 길에 갈애 바위를 보고, 반 토막 난 비석도 보았다. 토막 난 비석은 조선 정조 때인 1790년에  세워진 전일귀 효자비다. 1894년 4월 23일에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승리한 전봉준 장군이 이 길을 지나다가 비석에 제를 올렸다. 며칠 뒤에 관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그 소식을 듣고 비석을 깨고 비각을 불태워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반 토막 난 비석을 다시 세우고, 그 옆에 새로 비석을 하나 세워두었다.  

 

갈재를 내려온 우리 일행의 최종 목적지는 원덕마을 미륵석불이다. 갈재를 넘던 사람들의 수호신 역할을 했을 석불이다. 석불은 8각 보관(寶冠)을 얹고 왕방울 눈에 뭉툭한 도장 같은 코, 눌린 도너스 같은 입술을 하고 있다. 좁은 어깨의 일자형 몸통에 팔을 선으로 새겨놓아, 마치 몸통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그 흔적을 찾기 어렵고, 바로 옆으로 호남선 철로만 무심히 달려간다. 이 미륵석불은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찾아와 빌고 갔던 곳이라고 한다.

 

오늘은 태인 마을을 돌고, 갈재를 넘어왔다. 옛길을 걸으면서 옛 사연을 만나고 옛 사람들을 만났다. 같은 땅을 빌어 사는 나와 옛 사람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문득 궁금해졌다.   

<글·사진/ 허시명>

 

<여행정보>

교통정보/ 백양사역에는 호남선 무궁화열차가 선다. 백양사역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고 백양사 가는 버스가 있다. 버스를 타고 정읍이나 장성으로 나갈 수 있고, 열차를 타고 나갈 수도 있다. 백양사역에서 원덕마을을 거쳐 갈재를 넘는 코스는 길 안내판이 잘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