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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넷째날, 공주와 논산의 옛 흔적들을 찾아서 - 공주와 논산 일대
201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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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넷째날, 공주와 논산의 옛 흔적들을 찾아서 - 공주와 논산 일대

옛길걷기 인문학 [7]

넷째날, 공주와 논산의 옛 흔적들을 찾아서 - 공주와 논산 일대


어제부터 내린 비는 멈추지 않고 밤새 가을밤을 적셨다. 숙소가 한옥이었기에 운치 가득한 밤이었다. 더욱이 보일러가 아니라 장작으로 난방을 하는 한옥이었다. 장작이 타면서 내뿜는 나무 향기는 빗소리는 제법 잘 어울렸다. 다행히 이른 아침 비는 멈추었지만 날이 완전히 갠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언제 다시 비가 내릴지 모르는 날씨였다.  


다시 길을 나섰다. 축축하게 젖은 도로에는 많은 낙엽들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가을 색을 가득 품고 있던 많은 나뭇잎들이 밤새 내린 비로 또 그렇게 나뭇가지에서 떨어져나갔다. 사람은 길을 걷고, 길은 또 자연의 순리에 따라 점점 깊은 가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오늘의 첫 방문지는 공주시립도서관이다. 공주시립도서관은 현재 무령왕릉 인근의 웅진관과 강북 월송동에 강북관을 운영 중이다. 이날 도보단이 찾은 곳은 웅진관. 매달 다양한 독서문화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웅진관 관계자들은 비가 오는 가운데도 도보단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독서활동을 통해 시민들이 인문학을 가까이 할 수 있게 하고, 길에서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들을 넓혀 가는데 도서관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펼쳐나가자는 의견을 주고받고 도서관을 나섰다.  


다음 방문지는 공산성. 오늘은 도보단에 손님이 한 명 늘었다. 새로운 손님은, 오후에 계룡시 계룡도서관에서 강의가 예정되어 있는 이현군 박사이다. 이현군 박사는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서울, 성 밖을 나서다> 등을 저술했고 현재 서울대학교 국토문제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다.
공주는 한때 백제의 왕도였다. 하지만 왕도로서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했다. 475년 문주왕이 한성에서 공주로 천도한 후 성왕이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64년 동안 수도 역할을 했다. 공산성은 당시에 공주를 수호하기 위해 지어진 성이다. 성이 지어질 당시에는 웅진성이라고 불렸으나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공산公山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워진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공산성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금서루로 오르는 언덕 우측에는 40여 개가 넘는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다. 공주와 관련된 인물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들이다. 애초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고, 공주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은 것이다. 대부분 누군가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한 송덕비인 가운데, ‘제민천교 영세비’라는 비석이 눈에 띄었다. 1817(순조17)년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이를 다시 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비문에는 다리를 복구한 시기와 하천의 둑을 고쳐쌓은 시기는 물론이고 사업자금의 조달 방법과 과정, 자금을 지원한 사람들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오르막 끝에는 금서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공산성을 찾는 외지인은 대부분 금서루를 통해서 성 안으로 들어간다. 공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는데 금서루는 그중 서문이다. 현재의 금서루는 본래의 것은 아니다.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던 것을 1859년 편찬된 공산지 등의 문헌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1993년 복원한 것이다. 비록 최근에 복원된 문루이지만 공산지가 편찬된 시기인 조선시대의 성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보단은 금서루를 지나 공산성 내부로 입성했다. 공산성의 저지대 분지 일대는 현재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백제 시대에 왕궁에서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었던 자리로 현재까지 30여기에 이르는 건물지를 비롯해 배수로, 도로, 저수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하늘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았다면 공산성을 일주할 수도 있었으나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공산성을 빠져나왔다.  
공산성 바로 앞은 금강교가 자리하고 있다. 금강교는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할 때 보상물로 세운 다리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미군이 폭파한 후 도하를 막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며 이후 1956년 복구되었다. 지금은 일방통행으로 운행되는 낡은 철교로 전락했지만 1986년 공주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천천히 늙어가는 철교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공주사대부고로 이동했다.  


공주사대부고는 조선 후기 충청도의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충청감영이 자리했던 곳이다. 충청감영은 공주 내에서 몇 차례 이전을 하다가 1707년(숙종 33)에 지금의 공주사대부고 자리에 안착했다. 이후 1932년 대전으로 이전할 때까지 200여 년 간 충청감영과 충남도청의 자리를 지켰다. 현재 남아 있는 흔적은 거의 없지만 운동장 한쪽에는 당시의 석재들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본관의 현관에 귀중한 사진 하나가 전시되고 있었다. 연대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교문이 있던 자리에 있었던 충청감영 당시의 문루 사진이다.   

<글 사진 박동식>


<여행정보>
공산성
주소 : 공주시 웅진로 280
문의 : 041-856-7700(관광안내소)
개방시간 : 24시간
입장료 : 어른 1,200원/청소년 800원/어린이 600원

중악단(신원사)
주소 : 공주시 계룡면 신원사동길 1
문의 : 041-852-4240
개방시간 : 일출~일몰
입장료 : 어른 2,000원/청소년 700원/어린이 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