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사례집
공지
2. 첫째날, 삼남대로 대장정이 시작되다! -토크콘서트와 남태령의 발대식 [옛길걷기]
2015.11.12
1,565

본문

2. 첫째날, 삼남대로 대장정이 시작되다! -토크콘서트와 남태령의 발대식 [옛길걷기]

옛길걷기 인문학 [2]

첫째날, 삼남대로 대장정이 시작되다! -토크콘서트와 남태령의 발대식

 

정치영 교수에 이어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김지영 연구원이 ‘길 위의 조선 왕실’이란 주제로 토크 콘서트를 이어나갔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도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자제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대학의 원리를 군주의 통치론에도 적용한 때문이며 길도 넓지 않고 왕이 행차를 하면 준비할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시대 왕들의 행차는 매우 다채롭다. 왕이 탄 가마는 지붕에 빨간 양산을 세웠고 주변에는 좌우로 6겹 정도의 호위병들이 감쌌다. 왕의 행차에 동원되는 인원은 약 4~5천명이었다. 따라서 넓은 길이 필요했다. 가장 넓은 길은 왕이 다니는 길로서 너비에 규정을 두었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약 17미터 정도였다.  

 

정조의 경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 가기 위해 수원에 행차를 했는데 서울에서 수원까지 거리는 약 80리였다. 이를 이틀에 걸쳐 이동했다. 왕의 행차는 큰 구경거리였다. 구경꾼들을 막지도 않았으며 높은 곳에 올라가 구경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왕의 행차에 비하면 파격적인 조치였다. 행차가 많았던 진시황제의 경우 가마를 여러 개 준비해서 왕이 어디에 탔는지 알 수 없게 했다. 이에 비하면 왕의 가마에 표시를 해두는 것은 물론이고 주민이 나와 풍악까지 울린 것은 매우 개방적인 일이다.


정조는 행차 때 동작진을 이용했다. 강을 건널 때는 배를 연결하고 그 위에 판을 깔고 흙까지 덮어 배다리를 만들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지만 이전 방식보다 간결하고 저렴했다. 이전에는 왕이 탄 배를 다른 배가 끈을 연결해서 끌었다. 배다리는 정조의 고민을 통해 만들어진 개선방안인 셈이었다. 


왕의 행차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신문고는 궁궐 안에 있었고 누구나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조나 정조는 행차 중에 가마를 세우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듣기도 했다. 이런 일은 해당 관청에 신고하는 중간 과정이 없이 왕에게 직접 아뢰었기에 직고라고 했다. 즉, 조선시대 왕의 행차는 우아함보다는 시끄럽고 활기가 넘치는 행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조와 정조는 밤에 행차를 한 적도 있었다. 정조는 수원 행차 때 6시보다도 이른 시간에도 출발했다. 이는 매우 어두운 시간으로 조명이 필요했다. 조명은 오색 비단으로 만든 등불을 이용했으며 낮에는 깃발 색으로 신호를 보냈으나 밤에는 깃발이 보이지 않아서 등불 색상을  달리해서 신호를 주고받았다.


토크 콘서트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45인승 버스에 탑승하고 남태령으로 이동했다. 버스에는 정치영교수가 동승했다. 남태령은 삼남대로의 초입 부분이다. 관료나 선비들이 여행하던 길이며 거꾸로 지방 선비가 과거 보러 올 때 지났던 길목이기도 하다. 왼쪽에 우면산, 오른쪽에 관악산이 있고 그 사이에 남태령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시의 경계이다.


버스에서 하차한 후 주택가를 가로질러 남태령 옛길로 들어섰다. 차량이 다니는 큰길 옆에 놓인 길은 아마도 찻길 때문에 새로 개설된 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옛길 옆으로는 작은 냇가가 흐르고 있었고 이는 이 길이 가장 낮은 곳이란 의미였다. 숲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언덕길을 10여분 오르자 ‘남태령 옛길’이란 석비가 나타났다. 삼남대로를 잠시 거슬러 올라온 셈이다. 

 


 

 

이곳에서 간단한 발대식을 진행했다. 발대식은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한국도서관협회의 김태희 본부장이 진행을 맡았으며 강진 다산동호회 윤동옥 회장, 한국병학연구소 김영호 대표,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채화석 고문 등이 참석했으며 이들은 이번 행사에 도보단 인원이기도 하다. 참석자들의 인사말이 끝난 후 김태희 본부장의 선창에 따라 참석자들은 구호를 외쳤다. 구호는 안전하게 탐구하고 우정을 다지자는 의미에서 ‘안전! 탐구! 우정!’로 정했다. 


다시 버스를 탑승하고 이동한 곳은 과천초등학교 옆 과천현의 객사였다. 과천초등학교는 동헌이 있던 자리이

기도 하다. 과천현의 객사 이름은 온온사穩穩舍이며 현판은 정조가 쓴 글씨다. 


“객사 기둥을 보면 양쪽의 기둥은 사각인데 비해 가운데 기둥은 원형이죠? 원기둥은 궁궐이나 중요 건물에만 사용을 했습니다. 원형 기둥 안의 마루방 안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패를 모셔두고 인사를 올렸죠. 임금님이 멀리 있으니 자주 뵙지 못하니까, 이곳에서 대신 인사를 올린 겁니다.”


마루방 양쪽 온돌방에는 손님이 묵었다. 동쪽 방이 서열 높은 사람의 방이다. 간혹 동쪽에 묵다가 서열 높은 사람 오면 양보하고 서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일도 발생했다고 한다. 과천현은 현으로는 작은 규모였으나 오고가는 손님이 많아서 중요한 현이었다. 


참석자들은 도보로 지지대까지 이동했다. 지지대 고개는 정조의 효심이 깃든 곳이다. 아버지 묘소를 보는 마지막 지점이 바로 지지대였으며 ‘조금만 천천히 가라, 천천히 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인이 경부선 철도를 놓으려고 했으나 궁에서 반대했던 곳이며 현재는 의왕시와 수원시 경계이기도 하다. 지금 남태령의 모습은 시시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아주 험한 고개였으며 여우들이 많이 출몰해서 여우고개라고도 불릴 정도였다.
[글 박동식]



여행정보
온온사
조선시대 과천현의 객사이며 1650년(인조 27년)에 축조되었다. 온온사穩穩舍란 이름은 경관이 아름답고 몸이 편하다는 의미이며 1790년에 정조가 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머물며 이름 짓고 친히 편액을 썼다고 한다.
주소 : 과천시 관악산길 58
개방시간 : 24시간
입장료 :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