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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째날, 삼남대로 대장정이 시작되다! -토크콘서트와 남태령의 발대식 [옛길걷기]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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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째날, 삼남대로 대장정이 시작되다! -토크콘서트와 남태령의 발대식 [옛길걷기]

옛길걷기 인문학 [1]

첫째날, 삼남대로 대장정이 시작되다! -토크콘서트와 남태령의 발대식


삼남대로의 대장정은 노원어린이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 길을 떠나기 전 ‘도성 밖으로 길을 떠나다’라는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준비했다. 서울시 중계4동에 위치한 노원어린이도서관은 초등학생과 학부모를 위해 특성화된 도서관이다. 어린이와 학부모를 위한 유익하고 다양한 책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학생들을 위한 문화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토크콘서트 역시 초등학생과 학부모들의 참여로 진행되었다. 


토크콘서트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예술학부 정치영 교수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여행과 길’이란 주제 발표로 시작되었다. 정치영 교수는 옛 사람들의 여행부터 설명했다. 삼국시대 화랑들에게 국토 순례와 유람은 수련과 교육방식 중 하나였다. 성지순례와 유학으로 여행의 범위가 국제적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고려시대에는 전국을 여행하는 사람이 늘었고 고려후기에는 금강산이 여행지로서 큰 인기를 얻었다.


조선시대에는 여행의 목적이 좀 더 다양해졌다. 그중에 공무를 목적으로 한 여행도 큰 범위를 차지했다. 지방을 순시하거나 암행감찰, 시험 감독, 제사 봉행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적인 목적의 여행 역시 크게 성행했는데, 특히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는 여행이 유행하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여행을 얼마나 중요한 공부의 수단으로 여겼는지는 ‘독만권서讀萬券書 행만리로行萬里路’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친지를 방문하거나 묘소를 관리하는 일, 문상을 다녀오는 일들을 통해서도 여행은 확장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이용한 교통수단은 무엇일까? 단연, 가장 널리 사용된 교통수단은 말이다. 말은 도보에 비해 힘이 덜 든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금강산을 여행한 사람들의 경우 하루 이동 거리가 평지에서는 90리(약 35.3km), 산길에서는 60리(약 23.5km) 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말을 이용하는 교통수단으로는 매우 짧은 거리다. 이유는 말을 타고 이동 중에도 노복이 말의 고삐를 잡고 걸었기 때문이다. 말은 가격이 비싸서 친지나 지방관아에서 빌려 타는 경우가 많았으며 역驛이나 주막, 민가를 이용해 꼴을 먹이며 이동했다. 말 이외에는 나귀, 소, 가마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나귀는 체력이 강하고 말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소는 세상일을 등진 은사隱士를 상징하며 안전한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가마는 주로 고위관료들이 이용했다.


사대부들이 여행을 하며 이용했던 길은 바로 역로驛路이다. 역로는 조선시대의 간선도로로서 국가가 관리했다. 길 중에서 가장 넓은 길이었으며 곳곳에 역과 원 등을 설치했다. 역로 중에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6대로를 많이 이용했다. 대표적인 길은 삼남로, 영남로, 경흥로, 의주로 등이다. 이런 길은 여행자뿐만 아니라 공무를 보는 관료나 외국 사신들도 이용했다.


물론 기술력이 부족했던 조선시대의 도로는 오늘날에 비해 열악했다. 구불구불하고 경사가 급하며 노폭도 협소했다. 이는 산이 많은 지형적 특성과 자연을 인위적으로 개조하는 것을 꺼려한 전통이 접목된 결과다. 때문에 하천이 만들어낸 골짜기와 분지를 따라 도로가 건설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역로에도 이정표가 있었을까? 당시에는 노방장승 등이 길안내 역할을 대신했다. 가야할 길의 방향과 거리를 표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노방장승 이외에도 토후土?나 돌무더기, 중요한 나무 등도 이정표 역할을 했으며 민간신앙과 관련한 서낭당과 산신각 등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특히 서낭당을 지나면서는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를 올렸는데, 그 방법으로는 돌을 얹거나 침을 뱉기도 했으며 서낭목에 천을 묶기도 했다. 옛날에는 여행이 지금보다 위험했고 도적을 만나거나 호랑이를 만나는 일도 잦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다리가 많지도 않았다. 그나마 돌다리보다는 나무다리가 많았으며 이를 섶다리라고 불렀다. 경기도 안양 만안제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 가기 위해 만든 것이다. 양재동에도 대표적 다리가 있었고 전남 함평의 고막천교는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길을 떠나기 전에 친척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곳에 묵는 일이 흔했다. 이는 제사를 잘 모시고 손님에게 대접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전통은 관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고을의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는 동헌보다 중요한 곳이 손님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공간인 객사였다. 또한 객사 중앙 공간에는 임금을 대신하는 전패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에게 인사를 올렸다. 


다른 숙소로는 원이 있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원은 절에서 운영하던 곳이 많았다. 인덕원도 원이 있던 자리며 이런 곳은 사람이 많이 지나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주막도 중요한 숙소 중 하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보통 두 끼를 먹은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여행자는 세 끼를 먹었으며 여행자가 먹는 중식을 중화라고 불렀다. 여행자들이 지참하는 음식 중에 중요한 것이 술이다. 술은 여흥을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비상식량 역할도 겸했다. 또 다른 비상식량으로는 육포가 있었다. 예전에는 쇠고기뿐 아니라 사슴육포도 많이 애용했다.  

[글 박동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