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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편지] 허준의 동의보감, 조선의 의학을 세우다 / 이영희
201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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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편지] 허준의 동의보감, 조선의 의학을 세우다 / 이영희 ?

허준의 <동의보감>, 조선의 의학을 세우다

 

이영희(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

 

“사람의 질병은 섭생을 잘 못해서 생기니 몸과 마음을 닦는 수양을 우선으로 하라. 기존 의서들의 처방이 번다하니 요점을 추리는 데 힘쓰라. 만백성이 두루 활용할 수 있도록 국산약명을 적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

 

때는 1596년, 선조는 허준에게 새로운 의서 편찬을 명하며 위와 같은 원칙을 제시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의 포화 속,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까지 나돌았다. 나라에선 약재도 의원도 턱없이 부족해 별다른 대책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타고난 자신의 생명력을 자양하는 ‘양생’을 기본으로

 

허준은 14년간의 고투 끝에 <동의보감>을 세상에 내놓았다. 허준은 선조가 제시한 원칙을 훌륭하게 구현해 냈다. 그 중에서도 섭생, 곧 양생을 의학의 기본으로 삼았다. 양생은 병을 막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신의 생명력을 자양하는 것이다. 질병 중심의 의학에서 생명 중심의 의학으로의 대전환! 이런 원대한 비전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몸을 ‘생명과 우주가 교차하는 시공간’으로 보기 때문이다.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손진인) 머리와 하늘, 발과 땅, 사시와 사지, 오행과 오장, 몸과 우주가 대칭적으로 만나고 있다. 이는 우주의 이치가 몸의 원리로 작동됨을 말한다. 하여 병은 내 몸의 리듬과 우주의 리듬이 어긋났다는 메시지다. 그러니 병을 치유하려면? 우주의 리듬과 일상의 리듬을 맞춰야 한다. 해가 뜰 때 일어나고 해가 질 때 잠을 잔다. 봄에 일을 펼치고, 여름에 분주히 활동하고, 가을에 결실을 맺고, 겨울에 기운을 모으고…. 이것이 바로 양생, 타고난 생명력을 기르는 것이다.

 

허준은 의학이론과 처방의 정리 또한 충실히 수행했다. <동의보감>에는 황제내경부터 16세기 말까지 거의 모든 동양의학 관련 서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는 동양사상의 근간이 되는 유교·불교·도교가 모두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동의보감>이 그려낸 몸에 대한 탐구는 나의 몸으로부터 이웃과 사회, 자연과 우주에 대한 탐구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허준은 자신이 집필한 책을 ‘동의’(東醫)라 명명한다. 중국에 북의(北醫)와 남의(南醫)가 있다면 조선에는 동의가 있다는 것. ‘동의’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중국 의학과의 구별이다. 허준은 조선의 기후와 풍토에 맞게 국산약(향약)을 정리한 것 뿐만 아니라 의학이론 전반을 체계적으로 재정리했다.

 

<동의보감>의 독창성은 목차에서 드러난다. 몸 안의 풍경에 해당하는 ?내경편?, 몸 바깥의 형상에 해당하는 ?외형편?, 육기(六氣)의 어긋남으로 생기는 병들의 화려한 축제 ?잡병편?으로 나뉜다. 이후 약물에 대해서는 ?탕액편?에, 침구치료는 ?침구편?에 배치하였다. 이전에 의서들이 병증을 중심에 놓고 처방과 치료방법을 나열한 것이었다면, <동의보감>은 사람의 몸을 중심에 두고, 몸을 안팎으로 나누고, 다시 우주와 몸이라는 안팎의 풍경을 그렸다. 이는 오로지 병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병이 생긴 지반을 몸 안에서, 몸 밖의 형상에서, 외부의 기운에서 두루두루 살피는 것이다.

 

조선의 산천과 기후, 풍습에 맞는 의학을

 

따라서 ‘동의’란 단순히 조선 의학이 중국 의학과 대등한 수준을 갖추고 자주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氣)의 차이, 곧 천지자연의 다름에 기초한다. 바람이 다르고, 물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고, 땅이 다르고…, 이 ‘다름’에서 중국과는 다른 병이 피어난다. 그러니 ‘동의’는 중국을 그대로 본뜨고 답습하는 의학에서 깨어나 조선의 산천과 기후, 풍습에 맞는 의학을 세우겠다는 포부다. 단순히 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방문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지혜를 일깨워 우리를 둘러싼 땅과 물과 바람과 통하는 길을 여는 일이었다.

따라서 <동의보감>은 단순한 의학서가 아니다. 그 구성 자체부터 몸과 우주의 원리가 삶의 방식으로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고, 모두가 양생의 지혜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의학은 우뚝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