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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편지] 조용한 위기 / 우응순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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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편지] 조용한 위기 / 우응순

조용한 위기

 

우응순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기획위원)

 

 

‘조용한 위기’는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교육의 미래를 논한 책,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언급하면서 한 말이다. 그녀는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교육과정에서 인문교양과 예술에 대한 교육적 가치가 폄하되고 제외되는 것을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조용한 위기라고 말하고 있다. 빈부격차, 인구 감소, 기후변화는 인류가 가시적으로 인지하고 공감하는 드러난 위기라 할 것이다. 수많은 매체가 이러한 위기의 심각함을 거의 매일 다루고 있으며,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값진 충언, 해결책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인문교양과 예술의 가치가 낮아지고 제외돼

 

이에 반해 인문교양과 예술을 쓸모없는 군더더기로 취급하고 교육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축소, 추방한 결과, 이제 목전에 닥친 ‘조용한 위기’에 대한 대응은 어떤가? 입시 중심의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사회적 상상력을 키우고자 하는 시도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이 무서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교사와 학생들을 짓누르고 있다. 대학도 다르지 않다. 인문학과에 진학한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영어 점수 올리기와 경영학 학습에 전념할 뿐, 정작 자신이 소속된 학과의 수업에는 관심이 없다. 인문학 교수들도 무력하다. 취업 앞에서 모두가 무릎을 꿇는다. 인구감소라는 현실 앞에서 대학의 인문학과는 폐지되고 있지만 아무도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미 무릎 꿇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힘이 없는 것이다. 사실 일어나 인문예술의 가치를 외칠 이유도 없다. 100여년의 근대화 기간 동안 부에 대한 욕망에 진심으로 복종했기 때문에, 가난한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은데, 왜?

 

근래 한국사회에서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허망한 꿈이라는 뼈아픈 자각과 맞물려 있다. 실패한 인생이라는 자조와 탄식이 10대부터 70대 까지 건 사회를 뒤덮고 있다. 그럼 누가 성공한 인생이란 말인가? 엄청난 부를 상속하는 재벌, 평생 부모의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상속자..... 그들도 행복지수가 높은 것 같지는 않다. 정부는 기술 개발로 이윤을 창출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창조 에너지를 뿜어내라고 하는데, 사막과 같이 메마른 개인, 사회의 어디에서 상상의 윤기가 돌겠는가?

 

인간적 삶에 대한 성찰로 위기를 극복할 때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우주, 자연의 리듬에 맞추는 평범한 일상의 지속, 인간다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이웃을 향한 따뜻한 시선 ..... 이런 것은 단기 학습이나 물질적 풍요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몸, 마음, 정신이 동시에 완전하게 바뀌어 다른 존재로 재탄생할 때 가능하다. 다른 존재들이 연결되어 다른 사회,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낸다.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런 형태로. 결국 우주, 자연에 대한 겸허한 마음가짐, 인문과 예술에 대한 성찰이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셈이다. 다행이다. 45억년의 인류 역사가 이런 길을 만들어 놨으니. 생존의 과정에서 터득한 인류의 유동적 사유능력, 보살핌의 힘이 없던 길을 내고, 있는 길을 다져 온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시적 위험보다 조용한 위기가 훨씬 더 두렵다. 대부분이 그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알았더라도 자신과 사회를 바꿀 결단을 미룰 때, 그 사회는 침몰한다. 나와 가족도 같이. 현재 한국 시민사회에 부는 인문학 열풍은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몇몇이 모여서 문학예술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단절되었던 끈을 잇는 것은 우주, 자연의 순환하는 에너지에 접속하는 것이다.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체념과 탄식은 대우주의 에너지를 거스르려 했던 오만의 찌꺼기이다.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나답게 사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을 길 위에 살다 가야 하는 것이 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숙명이다. 은하계의 모든 행성은 궤도를 돌고, 자연은 생장, 소멸을 되풀이 하며, 생명체들은 공생한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무자비한 인문예술의 폐기처분으로 닥친 ‘조용한 위기’가 인간적 삶에 대한 성찰로 전환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