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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편지] 삶은 결코 허무하지도 않고, 허무한 적도 없었다 / 박영대
201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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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편지] 삶은 결코 허무하지도 않고, 허무한 적도 없었다 / 박영대

 

삶은 결코 허무하지도 않고, 허무한 적도 없었다

 

박영대 (남산 강학원 연구원)

 

『안티크리스트』, 제목만 봐도 그리스도교에 반대하기 위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옹호든 비판이든 이 종교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펼쳐본다. 의외로 그런 사람들일수록 책의 묘미를 느끼기 힘들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은 단지 읽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것이다. 반면 이미 이 종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만 공고해질 뿐, 이 책을 통해 삶이 바뀌기 어렵다. 어느 쪽이든 그리스도교를 먼저 상정해둔 채 『안티크리스트』를 읽는다면, 그 사람들에게 이 책은 삶의 토대가 흔들리는 선물이 될 수 없다.

 

니체 자신이 허무주의와 벌인 싸움의 기록

 

그렇다면 누가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 만족과 안락함이 행복인줄 착각하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인정된 길을 따라가면 좋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는 사람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처럼 도덕을 보편적 의무로 오해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안티크리스트』가 필요한 독자들이다. 즉 선량하고 별문제 없어 보이는 우리 대부분에게 이 책이 필요하다. 우리의 공통점은 주어진 가치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사는 것만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 여긴다는 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모두가 따르는 방식대로 사는 것은 정말 ‘내’가 사는 것인가. 거기엔 내가 부딪히고 만들어내는 삶이 없다. 누군가의 삶을 베끼는 것일 뿐. 모방하는 삶이 보여주는 결론은 하나다. 삶이 허무하다는 것.

 

니체는 삶이 허무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 ‘그리스도교’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도교가 허무주의적 태도에서 태어났으며, 동시에 철학이나 도덕윤리에서 허무주의를 대표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적 철학은 현실 세계를 가상으로, 가상의 세계를 ‘참된 세계’로 왜곡하면서 현실을 무의미하게끔 만든다. 또한 허무주의적 도덕은 단일한 행동규범을 강제하면서 ‘선’이라 가르친다. 현실을 부정하고 행동을 획일화시키는 것보다 더 삶을 허무하게,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니체는 이를 ‘그리스도교적 철학’, ‘그리스도교적 도덕’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니체의 비판을 종교집단으로서의 그리스도교에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싸워야할 적은 외부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다. 가장 허무주의적인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다. 자기 삶을 스스로 구성할 수 없다고 미리 단념하며, 창조에 필수적인 고통조차 이겨내려 하지 않는다. 허무주의가 스며드는 것은 이 지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 모든 허무주의가 여기서 비롯된다.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것은 우리 삶의 역량을 스스로 믿는 것이다.

 

삶은 우리들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내야

 

니체는 이렇게 외친다. 삶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아니 한 번도 허무했던 적이 없다! 놀라운 것은 니체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 때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니체는 죽음을 예감하고 극도의 고통을 체험하는 시기에 『안티크리스트』를 썼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은 정신적으로 나약해지고 자신이 지켜온 가치를 포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니체는 달랐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지 않았다. 고통‘으로’ 삶을 더욱 욕망했다. 그래서 『안티크리스트』엔 니체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도했던 최후의 싸움이 담겨있다. 니체는 갈망했다. 설령 죽음이 눈앞에 닥쳐오더라도,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고귀한 가치들을 내팽개치지 않기를. 나약하고 비천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기를. 그러므로 『안티크리스트』는 니체 자신이 허무주의와 벌인 싸움의 기록이다. 죽음이 삶을 잠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결심이며, 스스로 구성하는 자만이 진정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삶의 의지였다.

 

만약 삶이 허무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오직 스스로 구성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허무하다고 말한다. 삶은 우리들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 삶에 필요한 유일한 윤리다. 주어진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삶을 만들어내는 자에게 삶은 허무하지 않다. 그에게 삶은 빛나는 승리와 쓰라린 패배가 공존하는 전쟁터가 될 것이다. 승리하든 패배하든, 어쨌든 허무함보다는 신나지 않겠는가!

 

“덕이란 우리들 각자가 만들어낸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장 사적인 방어수단이며 필수품이어야 한다. 그 이외의 어떤 의미에서도 덕은 단지 위험물에 불과하다. 우리 삶의 조건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삶에 해롭다.” (『안티크리스트』 11절)